Sunday, July 5, 2015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
어떤 미국인 목사님이 부목사로 몇 년간 목회하다가 1,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가서 첫 주일 예배를 잘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가 그와 악수를 하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한마디합니다. “아유, 젊으신 목사님이 이 많은 교인들의 말을 일일이 다 들어주려면 고생 꽤나 하셔야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교인들과 인사하는 것을 중단하고 급히 단에 올라가서 아직 흩어지지 않은 교인들을 향하여서 입을 엽니다. “저는 이 교회에 여러분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여러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따라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원하신다면 저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두 세 교인이 “우리가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저기서 “저희도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잠시 후에는 전체 교인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목사님은 그가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였으며,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아래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복종시키는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는 저 자신도 딜렘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심과 교인들이 듣기를 원하는 설교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다른 복음’ ‘다른 말씀’ 전함을 허용하지 않으심을 강하게 느끼기에 교인들의 원함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주장과 의견이 교환되고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몰몬교에 속한 사람들이 참으로 전도를 열심히 잘 감당합니다. 둘씩 짝지어서 전도를 하러 다니는데 그들의 전도 열심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평안이 깃들어있는 표정만 보면 그들이 분명 기성 교회의 신자들보다 복음의 진수를 그 마음에 경험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저의 집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서 장미를 파는 사람을 봅니다. 통일교에 속하여 있는 사람입니다. 장미를 파는 사람은 일정한 주기로 바뀌지만 통일교를 위한 그들의 수고는 한결같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장미를 팔면서 책을 보거나 무엇에 골똘하여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던 가수 초년생도 있었고 학식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들로 저렇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게 할까 궁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찾아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집 안으로 들인 적은 없지만, 가끔은 ‘저들은 어떻게 훈련하길래 저렇게 충성스럽게 개인 날이나 궂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가리지 않고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전도하러 다니나?‘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단에 속한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와 강요와 할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러한 전도의 열심은 본받을 만 한 것입니다.
기성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러한 열심이 아쉽습니다. 여러분의 자유함 가운데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생활의 일부를 희생하면서 교회와 복음증거를 위한 열심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헌신은 개인의 의지와 작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바울은 6절에서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이지만, 교회생활을 한다고 동일한 이해와 동일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것을 듣고 새기는 사람이 각기 다른 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엉뚱한 이해와 엉뚱한 복음을 좇는 일이 나타납니다.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교인들 중에 가끔 제게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러한 뜻으로 설교를 하지 않아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설교를 한 적이 없는데요.” 전하는 사람의 메시지가 제대로 들려지지 못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낸 모세는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 수 있고 부릴 수 있는 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욕구에 따른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해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하늘에 속한 기쁨과 축복을 선포하는데, 여전히 땅의 것에 연연하며 땅의 축복만을 진정한 축복이라고 여기는 미련한 사람들은 선포된 복음을 자기의 욕구에 맞추어서 달리 듣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강도 있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외치십니까?
바울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고수하고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참복음에서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도 모두 ‘다른 복음’(ἕτερο 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죄사함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고, 영생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데, 그위에 할례나 율법 지킴을 구원의 요건으로 제시할 때, 이는 ‘다른 복음’이요,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목사님, 왜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듣는 사람 헷갈리네요.’라고 질문할 성도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고, 6장 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고,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했고,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함이 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어느 한 사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율법의 기준으로는 죄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원의 규정을 적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좋은 소식(good news)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율법대로 살지 못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여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어짐이 믿음입니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우리를 의롭게 하며 구원받게 하는 요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아도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단서도 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은 구원받기 위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이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 사람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 받음도 세례가 구원의 한 요건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크리스천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겠노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부모가 어린아이를 세례 받게 할 때, 혹 어린아이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때라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보험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성인의 세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도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른 신앙인으로 잘 키우겠다는 공적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른 복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라고 말씀하심은 변경의 여지가 없는 케리그마(κήρυγμα: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겠지! 예수님은 ‘구원으로 향한 길(the way)'이라고 하셨지만, 그 길은 큰 길이긴 하지만 유일한(only) 길은 아닐꺼야. 다른 종교도 구원으로 향한 다른 작은 길은 될 수 있지!’라고 하며 나름대로 논리와 주장을 전개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이 사람의 마음에 이 세상 주관자인 사단이 비집고 들어옵니다.‘그럼, 네 생각이 맞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그렇게 편협한 구원의 방법만 갖고 계시겠어?’라며 우리의 생각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사단의 미혹에 넘어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구 때문에, 어떠한 마음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되어진 영생과 축복을상실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17절에 케리그마로 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임의 해석하고자 할 때 인간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야 할(proclaim) 목회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또는 교인들을 위한답시고 말씀의 강도를 스스로 조정할 때 이 사람은 ‘다른 하나님의 말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듣기를 들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목회자가 하늘에 속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요 인기가 없다고 판단하여 세상축복-만사형통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을 증거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경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으로 향한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설교한다면 이는 성도들을 혼잡케 하는 변경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란 강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어 9절에서도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이 말씀으로 참으로 중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역설(力說)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라고 했고 9절에서는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얻고, 구원함에 이르며 영생하게 됩니다”라고 선포하였는데, 후에 “이전에 내가 선포한 것은 아직 복음이 잘 모를 때 얘기고 실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야 됩니다.”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말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가 바울이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려 내려온 천사라고 하더라도, 혹은 위대한 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하나님께로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런 망발(妄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단호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좋은 소식은 더하여질 수도 감하여질 수도 없는 유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Let him be accursed"--"아나세마 에스토(ἀνάθεμα ἔστω)"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선포입니까?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잘못된 복음--“다른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반문함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좇는 삶을 살 때 이로서 망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이 항상 바르고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또한 바울의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 기록된 마가로 인한 바나바와의 다툼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그는 부름(calling)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힘썼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나 원함이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바른 하나님의 길을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고 반문했습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사역’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원함이 서로 상충할 때, ‘사람들을 좋게 할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디 하늘의 것만 바라보고 살 수 있나요?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성경은 하늘나라의 것을 말씀하는데 누가 하늘나라에 가보았나요? 그건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요. 성경의 기록은 2,000년 전의 것이므로 이대로 믿지 않아도 되요.” 이것이 목회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3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음이 이상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함이 요란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역설하며 경고합니다.
임의로 ‘다른 복음’을 증거하고, 임의로 ‘다른 복음’을 좇을 때, 이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죽음의 효력성을 무효로 만드는 자요, 사도들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바로 믿고 바로 좇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에 속한 삶에 진전이 있으며 성화의 과정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좇지 않는 사람의 신앙의 삶은 항상 제자리에서 답보(踏步)하게 되거나 아니면 후퇴하게 됩니다. 일생을 교회생활을 하지만 마지막 때에도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며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윤리 교과서의 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깊숙이에 와 닫기를 바라며,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참 기쁨을 끊임없이 샘솟듯이 공급하여 주기를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갈 1:1-5)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갈 1:1-5)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
어떤 목사님이 한 집사님에게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좀 맡아서 봉사하여줄 것을 당부하였더니 못들은 척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집사님이 이 일을 꼭 감당해야 하겠습니다”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더니 이번에는 마지못하여 시간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얼마간의 날수가 흘렀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세 번째로 간청을 하였더니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급히 한국을 방문할 일이 생겨서 동일한 집사님에게 (그분이 여행사 쪽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겠냐?’고 지나가는 말로 문의하였는데, 이 문제를 위하여서는 그가 정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였는데도 결과적으로는 표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일로 그렇게 간청하였는데도 거절했던 그 사람이었기에 별 기대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표를 구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에도 그저 덤덤하였는데, 이 사람은 표를 구하지 못함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죄송스럽고 면목 없는 일로 여기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음은 별로 죄송스러워 하지 않는데 목사님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때는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는 모습들이 교회의 잘못된 현상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당부는 성도가 전심으로 감당할 바이요, 목회자의 개인적인 부탁은 형편이 닿으면 들어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들어주지 않아도 그만인 것인데, 많은 교인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개인적으로) 선대함이 세상 복 받는 비결’이라는 ‘잘못된 복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목회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의 교회에 팔십 세가 넘은 할머니께서 출석하는데, 이분이 한국에서는 어느 시골에서 살다가 자녀를 따라 미국에 이민 오고 교회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나온다기보다는 그 자녀(둘째 아들과 그 식구들)를 따라 나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시간 내내 조는 것이 그분의 일이었습니다.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코까지 골기에 설교를 하는 목사님의 주의를 산만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목사님께 떨어져 사는 큰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큰아들이 허리가 무척 아픈데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머니, 제가 기도는 하겠어요. 그러나 그 아들이 예수님 좀 잘 믿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큰아드님의 허리가 예수님처럼 든든해지게 되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큰아들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전도할 요량으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얼마 뒤에 할머니께서 그 목사님에게 말씀하더랍니다. “큰아들에게 목사님 하신 말씀을 전했지 뭐유. 예수님 좀 잘 믿으라구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어머니가 대신 믿고 저 위해서 기도만 해 달래요. 그러기에 제가 이렇게 말해 줬시유.” 할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그래 널 위해 기도해주마. 어미가 되어 어찌 자식 위해 기도하지 않겠니?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어야 하겠다. 그래 네가 아픈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내가 대신 먹어주면 그 병이 낫겠느냐? 약은 네가 먹어야 네 병이 낫는 것처럼 예수는 네가 믿어야 하겠다.” 어머니의 이 말 한 마디에 큰아들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로 인해서 기쁨이 넘칩니다. 할머니가 설교시간에 조는 줄로만 알았는데, 복음의 진수가 그 할머니의 입술을 통하여 증거되었으니 말입니다. 한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 할머니였지만,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이 오묘한 가운데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지혜로 그가 말씀하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2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갈라디아서를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 최상의 것으로 여겼는데,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입니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루터의 아내, 수녀출신)입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표어”(the battle-cry of the Reformation)이요, "신앙 자유의 대헌장“(the great charter of religious freedom)이요, ”크리스천의 독립선언문“(the Christi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2세기의 극단적 바울주의 좌경(左傾) 이단이었던 마르시온(Marcion)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 중에 갈라디아서를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Christianity)가 유대교(Judaism)와 어떻게 다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함으로써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의 선교여행의 시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받아 첫 번째 여행에서 간 곳이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어키)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명칭은 소아시아 내륙의 남쪽(남갈라디아)과 북쪽(북갈라디아)을 다 포함하는데,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는 주로 남갈라디아 지방--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와 더베 등--이었고(행전 13-14장) 이차 전도여행 중 그가 방문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행전 16:6)는 ‘북갈라디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가 일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공회(행전 15장)를 전후하여 그 공회에 상정된 구원의 문제(행전 15:1-2)에 관하여 편지한 것이라고 한다면(주후 50년 전후) 그 대상은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였던 남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 중에는 갈라디아서가 이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또는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러할 때는 주로 ‘북갈라디아’(혹은 남·북 갈라디아 전역)의 교회들이 그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1절에서 그의 사도권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의사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의사면허증을 비롯하여 그가 졸업한 학교들과 무슨 세미나과정을 이수했다는 유명대학의 증서들(certificates), 출강하는 의과대학의 외래교수증 등이 온통 한 벽을 장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쯩’들을 벽에 걸어놓습니까?
그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의 자격과 권위를 대변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사의 권위와 자격은 그 의사가 얼마나 병을 잘 고치는가로 결정나는 것인데, 자기가 찾아온 의사가 어떤 의사인지 잘 알지 못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이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가 어떤 의사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함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증서들을 전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환자의 병의 치료가 어느 정도는 ‘의사에 대한 신뢰도’에 좌우되어지기 때문에 ‘쯩’의 전시도 무시할 수 없는 (심리적) 치료효과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의사가 아무리 용하다고 하더라도 외모나 말에서 신뢰감을 주지 못할 때, 환자의 치료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씀 증거에 대한 권위가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그가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 말씀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사도권은 무엇으로 인정받았습니까?
그들에게 유명 신학대학의 졸업장이 있었습니까? 사도로 인정받기 위하여 그들은 어떤 유명 대학(institution)의 졸업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이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의 전부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말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우리와 함께 다님’이 사도 됨의 요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으로 따진다면 바울은 분명히 사도로서 결격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그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가 비록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고 그의 가르치심을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그의 사도권의 근거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부르심을 얻고 보내심을 얻었음을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반복적으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과 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맡기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고, 22장 21절에서 “(주께서)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26장 15-18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使徒)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내다’ ‘파송하다’(send, send out or away)는 뜻의 헬라어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 히브리어는 חלשׁ)에서 나왔습니다. 즉,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됨은 사람들(혹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요 어떤 특정한 사람의 임명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들)이나 교회가 그에게 그러한 직분을 부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를 부르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기에 그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사도권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는 그 직분을 감당함에 사람 혹은 사람들의 집단인 교회의 만족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도권의 부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고 안수한 것이 안디옥 교회였지만(행전 13:1-3) 바울은 어떤 기관이나 사람의 안수 이전에 역사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교 교육과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교회나 노회가 행하는 ‘목사 안수’의 절차를 거쳐서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있기에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절차로서는 노회나 교회를 통하여 안수를 받기에 노회나 교회를 만족하는 목회를 하여야 할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를 목사로 예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으로 목사가 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시고 명하심에 충실한 목사가 됨이 중요합니다.
‘장로’나 ‘집사’로 안수 받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목사를 통하여 ‘장로’나 ‘집사’로 안수를 받지만, 안수의 효과는 안수를 행하는 목사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안수의 주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를 장로나 집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목사를 (인간적으로)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쁘시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2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는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편지가 일차 전도여행과 이차 전도여행 사이에 쓰여진 것이라면 안디옥 지방일 것이요, 이차 전도여행 기간 중이나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쓰여진 것이라면 고린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곳에서 쓰여졌던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형제로 더불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바울 서신들의 전형입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가 한 타운이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울이 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또한 이차 전도여행 때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까닭입니다.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은혜(恩惠)’란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은혜’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은혜(χάρις)는 ‘우리가 행위로는 의롭지 않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는(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εἰρήνη;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값없는 선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혜를 받았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5장 2절에서는 이 말씀을 바꾸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에 들어간 사람”(=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입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그의 전 서신을 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참복음(true Gospel)의 내용입니다. 이것 이외의 어떤 ‘좋은 소식’(good news)이나 ‘듣기 좋은 말’도 참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은 4절만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임의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대(=this age)는 악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은 바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심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대상이 “우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인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대신 죽을” 대속물(代贖物)로 독생자 예수님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속물로 지명하셨을 때,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믿어지지 않기에 여전히 ‘땅에 속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들의 간증집회들을 보면, 90% 이상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간증꺼리로 삼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었더니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축복받았다’ ‘주일 성수를 잘 하였더니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축복이요 지위가 높아졌다’ 등등. 땅에 속한 것에서 자유롭고 진정한 복음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간증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기에 세상을 살 때에도 평안하고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복음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하여 “더하여주시는 것”일 뿐입니다(마태 6:33).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5절로 서두 문안인사를 마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광의 주체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입술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3
하나님의 참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은 그의 사도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음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하심에 의한 것임을 변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파송하신 것이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집사로서, 성도로서 우리에게 이러한 소명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자녀로 삼으시고 나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명하시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고 이를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림을 아까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더라도, 세상을 좇아 변질되고 타락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개관


갈라디아서 개관


1.  배경
   ‘갈라디아’라는 명칭은 소아시아 내륙의 남쪽(남갈라디아)과 북쪽(북갈라디아)을 다 포함하는데(지금의 터키),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는,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주로 남갈라디아 지방--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와 더베 등--이었고(행전 13-14장) 이차 전도여행 중 그가 방문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행전 16:6)는 ‘북갈라디아’를 가리킵니다.


2.  저작 연대와 장소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총회(49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2장 1절 이하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사도행전 11장 29-30절, 12장 25절의 부조(扶助)를 위한 방문(45-46년경)으로 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따라서 2장 1절의 십사 년의 기산(起算)은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으로부터인데 이는 문맥상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가 일차 전도여행 후에 쓰여졌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총회의 논의와 결정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봄이 옳습니다. 그리하면,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는 49년이나 50년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행전 15장)를 마치고 그 공회에 상정된 할례, 모세의 율법과 구원의 문제(행전 15:1-2)에 관하여 편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은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였던 남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갈라디아서가 이차 전도여행 기간(50-51년경) 중에 또는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55-56년경)에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러할 때는 주로 ‘북갈라디아’(혹은 남·북 갈라디아 전역)의 교회들이 그 대상이며 2장 1절의 예루살렘 방문은 49년의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봄이 자연스럽습니다. 삼차 전도여행 중에 기록되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4대 서신--로마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저작 장소에 관하여는, 갈라디아서가 일차 전도여행과 이차 전도여행 사이에 쓰여진 것이라면 안디옥 지방일 것이요, 이차 전도여행 기간 중이나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쓰여진 것이라면 고린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  저작 목적
    이방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방문하여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도 받아야 하고, 또한 모세의 율법도 잘 지켜야 한다고 선동하는데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바울에게 믿음을 통한 의로와짐과 구원받음의 도를 받은 것에서 흔들리며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말에 미혹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치는 그의 복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로 되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만일 이에서 떠나 율법을 좇는다면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를 경고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며, 율법의 역할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결되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복음에 속한 자는 자유자로서 믿음과 함께 그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살며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합니다.


4.  개요
   1:1-5          편지의 서언(Prescript)
   1:6-10         선언적 명제(Proposition)
   1:11-2:14      바울의 경험적 변론(Narration)
   2:15-21         중간 명제(Proposition)
   3:1-4:3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책망(Rebuke)과 논증(Argument)
   5:1-6:10         실천적 권고(Exhortation)
   6:11-18         편지의 결언(Post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