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5, 2015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
어떤 미국인 목사님이 부목사로 몇 년간 목회하다가 1,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가서 첫 주일 예배를 잘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가 그와 악수를 하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한마디합니다. “아유, 젊으신 목사님이 이 많은 교인들의 말을 일일이 다 들어주려면 고생 꽤나 하셔야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교인들과 인사하는 것을 중단하고 급히 단에 올라가서 아직 흩어지지 않은 교인들을 향하여서 입을 엽니다. “저는 이 교회에 여러분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여러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따라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원하신다면 저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두 세 교인이 “우리가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저기서 “저희도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잠시 후에는 전체 교인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목사님은 그가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였으며,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아래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복종시키는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는 저 자신도 딜렘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심과 교인들이 듣기를 원하는 설교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다른 복음’ ‘다른 말씀’ 전함을 허용하지 않으심을 강하게 느끼기에 교인들의 원함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주장과 의견이 교환되고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몰몬교에 속한 사람들이 참으로 전도를 열심히 잘 감당합니다. 둘씩 짝지어서 전도를 하러 다니는데 그들의 전도 열심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평안이 깃들어있는 표정만 보면 그들이 분명 기성 교회의 신자들보다 복음의 진수를 그 마음에 경험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저의 집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서 장미를 파는 사람을 봅니다. 통일교에 속하여 있는 사람입니다. 장미를 파는 사람은 일정한 주기로 바뀌지만 통일교를 위한 그들의 수고는 한결같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장미를 팔면서 책을 보거나 무엇에 골똘하여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던 가수 초년생도 있었고 학식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들로 저렇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게 할까 궁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찾아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집 안으로 들인 적은 없지만, 가끔은 ‘저들은 어떻게 훈련하길래 저렇게 충성스럽게 개인 날이나 궂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가리지 않고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전도하러 다니나?‘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단에 속한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와 강요와 할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러한 전도의 열심은 본받을 만 한 것입니다.
기성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러한 열심이 아쉽습니다. 여러분의 자유함 가운데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생활의 일부를 희생하면서 교회와 복음증거를 위한 열심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헌신은 개인의 의지와 작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바울은 6절에서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이지만, 교회생활을 한다고 동일한 이해와 동일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것을 듣고 새기는 사람이 각기 다른 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엉뚱한 이해와 엉뚱한 복음을 좇는 일이 나타납니다.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교인들 중에 가끔 제게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러한 뜻으로 설교를 하지 않아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설교를 한 적이 없는데요.” 전하는 사람의 메시지가 제대로 들려지지 못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낸 모세는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 수 있고 부릴 수 있는 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욕구에 따른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해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하늘에 속한 기쁨과 축복을 선포하는데, 여전히 땅의 것에 연연하며 땅의 축복만을 진정한 축복이라고 여기는 미련한 사람들은 선포된 복음을 자기의 욕구에 맞추어서 달리 듣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강도 있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외치십니까?
바울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고수하고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참복음에서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도 모두 ‘다른 복음’(ἕτερο 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죄사함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고, 영생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데, 그위에 할례나 율법 지킴을 구원의 요건으로 제시할 때, 이는 ‘다른 복음’이요,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목사님, 왜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듣는 사람 헷갈리네요.’라고 질문할 성도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고, 6장 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고,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했고,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함이 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어느 한 사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율법의 기준으로는 죄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원의 규정을 적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좋은 소식(good news)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율법대로 살지 못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여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어짐이 믿음입니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우리를 의롭게 하며 구원받게 하는 요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아도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단서도 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은 구원받기 위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이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 사람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 받음도 세례가 구원의 한 요건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크리스천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겠노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부모가 어린아이를 세례 받게 할 때, 혹 어린아이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때라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보험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성인의 세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도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른 신앙인으로 잘 키우겠다는 공적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른 복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라고 말씀하심은 변경의 여지가 없는 케리그마(κήρυγμα: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겠지! 예수님은 ‘구원으로 향한 길(the way)'이라고 하셨지만, 그 길은 큰 길이긴 하지만 유일한(only) 길은 아닐꺼야. 다른 종교도 구원으로 향한 다른 작은 길은 될 수 있지!’라고 하며 나름대로 논리와 주장을 전개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이 사람의 마음에 이 세상 주관자인 사단이 비집고 들어옵니다.‘그럼, 네 생각이 맞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그렇게 편협한 구원의 방법만 갖고 계시겠어?’라며 우리의 생각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사단의 미혹에 넘어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구 때문에, 어떠한 마음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되어진 영생과 축복을상실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17절에 케리그마로 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임의 해석하고자 할 때 인간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야 할(proclaim) 목회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또는 교인들을 위한답시고 말씀의 강도를 스스로 조정할 때 이 사람은 ‘다른 하나님의 말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듣기를 들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목회자가 하늘에 속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요 인기가 없다고 판단하여 세상축복-만사형통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을 증거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경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으로 향한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설교한다면 이는 성도들을 혼잡케 하는 변경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란 강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어 9절에서도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이 말씀으로 참으로 중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역설(力說)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라고 했고 9절에서는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얻고, 구원함에 이르며 영생하게 됩니다”라고 선포하였는데, 후에 “이전에 내가 선포한 것은 아직 복음이 잘 모를 때 얘기고 실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야 됩니다.”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말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가 바울이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려 내려온 천사라고 하더라도, 혹은 위대한 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하나님께로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런 망발(妄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단호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좋은 소식은 더하여질 수도 감하여질 수도 없는 유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Let him be accursed"--"아나세마 에스토(ἀνάθεμα ἔστω)"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선포입니까?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잘못된 복음--“다른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반문함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좇는 삶을 살 때 이로서 망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이 항상 바르고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또한 바울의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 기록된 마가로 인한 바나바와의 다툼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그는 부름(calling)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힘썼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나 원함이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바른 하나님의 길을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고 반문했습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사역’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원함이 서로 상충할 때, ‘사람들을 좋게 할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디 하늘의 것만 바라보고 살 수 있나요?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성경은 하늘나라의 것을 말씀하는데 누가 하늘나라에 가보았나요? 그건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요. 성경의 기록은 2,000년 전의 것이므로 이대로 믿지 않아도 되요.” 이것이 목회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3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음이 이상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함이 요란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역설하며 경고합니다.
임의로 ‘다른 복음’을 증거하고, 임의로 ‘다른 복음’을 좇을 때, 이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죽음의 효력성을 무효로 만드는 자요, 사도들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바로 믿고 바로 좇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에 속한 삶에 진전이 있으며 성화의 과정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좇지 않는 사람의 신앙의 삶은 항상 제자리에서 답보(踏步)하게 되거나 아니면 후퇴하게 됩니다. 일생을 교회생활을 하지만 마지막 때에도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며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윤리 교과서의 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깊숙이에 와 닫기를 바라며,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참 기쁨을 끊임없이 샘솟듯이 공급하여 주기를 축원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