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이자와 부채
대출, 이자와 부채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
개인이나 기업은 가계생활이나 사업을 위하여 자금이 필요할 수 있다. 필요한 자금을 다른 사람이나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리는 것을 대출(loan)이라고 하며, 돈을 빌리는 대가로 원금에 추가하여 지불하는 금액을 이자(interest)라고 한다. 그리고 빌린 사람이 갚아야 할 금전적인 의무를 부채(debt)라고 한다.
모세 시대에도 하나님은 돈을 빌려 주고 빌리는 것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셨다. 출애굽기 22장 25절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줄 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이자를 받지 말도록 명하시며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23장 19–20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형제에게 돈이나 양식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지 말 것을 명하시며 “네가 형제에게 꾸어 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 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 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족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하셨다.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단순한 영리 목적의 금융거래라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형제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하셨다. 그러나 신명기 23장 20절은 타국인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는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따라서 모세 율법의 이자 금지 규정을 모든 종류의 대출과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이자 금지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규정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부채를 이용하여 착취하지 않고 보호하는 데 있었다.
동족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해져 돈을 빌려야 할 형편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형제, 곧 같은 언약 공동체에 속한 동족 이스라엘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하셨다. 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타국인에게 빌려 줄 때에는 이자를 받는 것이 허용되었다(신 23:19–20).
레위기 25장 35–38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는 원칙에 대하여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서 이자를 받지 말라는 명령은 가난한 형제를 보호하고 그의 생계를 돕는 것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돈이나 양식을 빌려 주는 것은 그의 곤궁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규정의 핵심은 단순히 이자를 금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살아가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출과 이자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모세오경 전체에서 일관된 원칙을 보여 준다. 출애굽기에서는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출 22:25), 레위기에서는 가난해진 형제에게 돈이나 양식을 빌려 주면서 이자나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하며(레 25:35–38), 신명기에서도 동족에게 빌려 준 돈이나 음식물 등에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금한다(신 23:19–20). 이러한 규정들의 공통적인 정신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나님의 백성을 부채를 통하여 착취하지 않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더글러스 믹스(M. Douglas Meeks)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높은 이자율이 채무자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키고, 경우에 따라 빚을 갚기 위하여 자신을 종으로 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고 설명한다. 당시의 높은 이자율이 가난한 채무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를 보여 주면서 믹스는 “고대 근동의 법전들은 엄청나게 높은 이자율을 허용하였다”고 지적한다.[1]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은 단순한 금융 규제가 아니라 과도한 채무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더욱 궁핍해지고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제적 보호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가난과 부채 때문에 다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동족에게 돈이나 양식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신 규정은 이러한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출 22:25; 레 25:35–38; 신 23:19–20).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5:42). 따라서 가난한 사람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용하여 높은 이자를 받고, 그 결과 그가 빚을 갚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뜻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웠다.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대신, 어려움에 처한 형제가 다시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시편 37편 21절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라고 말한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빌려 주는 사람의 선의를 악용하여 갚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빚을 갚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돈을 빌려 주는 사람에게 관대함을 요구하는 동시에, 돈을 빌린 사람에게는 자신의 부채를 성실하게 갚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을 외면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시편 112편 5절은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재물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관대하게 베풀고 필요할 때에는 돈을 빌려 줌으로써 그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권면하면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고후 9:7). 이 말씀은 대출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과 기꺼이 나누는 관대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 따라서 성경은 돈을 빌려 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 모두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빌려 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말고 관대하게 도와야 하며, 빌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선의를 이용하지 말고 자신이 진 빚을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 이러한 상호 책임은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함께 실천하는 경제생활의 중요한 원칙이다.
흥미로운 것은 에스겔서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행동을 대조하면서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문제를 경제윤리의 한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에스겔 18장 7–8절에서 의로운 사람은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익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또한 17절에서도 의로운 사람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아니하며 이자나 이익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불의한 사람은 이웃의 어려운 형편을 자신의 이익을 얻는 기회로 이용한다. 에스겔 18장 13절은 이러한 사람을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며 이익을 받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에스겔 22장 12절에서도 “너는 이자와 이익을 취하고 네 이웃을 압제하여 부당한 이득을 얻는다”고 책망한다. 이처럼 에스겔서에서 이자를 받는 문제는 단순한 금융 거래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말씀은 모든 형태의 이자부 대출을 동일하게 불의한 것으로 규정한다기보다,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의 절박한 형편을 이용하여 이자와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특별히 경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의로운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가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반면, 불의한 사람은 그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오늘날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이 은행과 금융시장에서 일반적인 경제활동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정상적인 상업적 대출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하여 과도한 이자와 이익을 취하는 착취적인 대출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서가 제시하는 경제윤리의 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면 그가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이웃으로 보는가?
부채의 탕감(蕩減)
돈을 빌려 주는 사람은 자신이 빌려 준 돈을 돌려받기를 기대한다. 또한 돈을 빌린 사람은 자신이 빌린 돈을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빌린 사람이 그 돈을 갚을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을 빌려 준 사람은 빌린 사람이 왜 돈을 갚지 않거나 갚을 수 없는지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을 빌려 준 사람이 돈을 빌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 칠 년 끝에는 동족이 진 부채를 면제하도록 명령하셨다. 신명기 15장 1–3절은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 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 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돈을 빌려 준 사람이 어떻게 칠 년의 기간이 끝날 때 동족이 진 부채를 면제해 줄 수 있었을까? 그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한 모든 재물의 궁극적인 소유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가진 재물의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물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청지기였다. 따라서 부채를 면제하는 것은 단순히 채권자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청지기적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제의 부채를 면제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형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안식년이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기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 안식년이 가까워지면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기를 꺼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는 이유로 가난한 형제에게 악한 마음을 품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을 경고하시며, 오히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하셨다(신 15:8–9). 따라서 안식년의 부채 면제 제도는 단순히 일정한 때가 되면 부채를 없애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부채로 인해 계속해서 가난과 경제적 속박에 머무르지 않도록 보호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관대함과 자비를 실천하도록 하는 데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부채 면제의 원리는 신약성경에서 죄의 용서라는 더 넓은 신학적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성경에서 부채의 면제와 죄의 용서는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둘 다 자신에게 갚아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놓아준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이처럼 구약의 부채 면제 제도와 신약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을 주장하기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대출과 이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2절에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돈을 빌리고자 할 때 그 사람에게 인색하게 등을 돌리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라고 가르치신다. 물론 자신에게 빌려 줄 돈이 없다면 돈을 빌려 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예수님은 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만을 염려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빌려 주는 사람은 당연히 빌린 사람이 그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경제적 손익계산을 넘어선다. 우리의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도록 요구한다.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한다(롬 5: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대출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제적 거래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가만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의 필요를 살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관대하게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대함은 앞에서 살펴본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가르침과도 그 정신에 있어서 서로 연결된다(출 22:25; 레 25:35–38; 신 23:19–20).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4–36절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을 넘어,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꾸어 주는 사랑과 자비를 말씀하시며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일반적인 경제적 사고방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도 돌려받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상대방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고, 돌려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는 기준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그에게서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며,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은 단순한 인간적 호의나 경제적 상호교환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며,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삶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돈을 빌려 주는 행위도 단순한 경제적 거래를 넘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선행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대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가르치신다(마 6:19–20).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당장의 경제적 보상을 얻는 데 있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야 한다. 특히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하여 원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행이 반드시 그 사람을 회심시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책임은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선을 행하는 데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말과도 연결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한다. 원수에게 악으로 보복하는 대신 선을 베풀 때, 우리의 선한 행동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잘못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히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원칙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처럼 조건 없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선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선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고,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베푸는 선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보상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본받아 행하는 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인 선(absolute goodnes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채와 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고 약속한 때에 갚지 못하면, 빌린 사람은 채권자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죄를 부채의 개념과 연결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죄와 부채가 모두 갚아야 할 의무 또는 책임이라는 공통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채를 진 사람에게는 채권자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함으로써 도덕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서는 부채의 언어가 죄와 용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부채는 때때로 채무자, 곧 돈을 빌린 사람을 채권자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만들 수 있다. 잠언 22장 7절은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돈을 빌린 사람은 자신의 부채를 모두 갚을 때까지 채권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채무자 자신이나 가족이 채무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부채와 종의 관계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언 22장 7절을 채권자가 돈을 갚을 때까지 채무자에게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의 핵심은 부채가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 힘의 불균형과 종속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그를 부당하게 지배하거나 착취해서는 안 되며, 채무자는 자신이 빌린 것을 갚기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채의 개념은 죄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사람이 부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채권자에게 종속될 수 있는 것처럼, 죄도 사람을 속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의 빚을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마 6:12).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마 18:21–35). 이 비유에서 한 종은 자신의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었다(마 18:24). 당시 한 달란트는 일반적으로 약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고,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는 약 6천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 사람이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사실상 상환이 불가능한 부채였다. 성경은 이 종이 어떻게 주인에게 이처럼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종에게 갚을 능력이 없자 주인은 그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하였다(마 18:26). 그러나 실제로 그가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마 18:27). 종이 갚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그의 엄청난 부채가 탕감된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온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종을 만났다. 백 데나리온 자체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약 백 일 품삯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조금 전에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극히 작은 금액이었다. 약 6,000데나리온을 한 달란트로 계산한다면 일만 달란트는 약 6천만 데나리온이므로, 백 데나리온은 그 금액의 60만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동료 종을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였다(마 18:28). 동료 종은 엎드려 조금만 참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 종을 감옥에 가두었다(마 18:29–30).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그 종을 다시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책망하였다(마 18:32–33). 그리고 주인은 크게 노하여 그가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그러나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부채를 생각하면 그가 그 빚을 모두 갚고 풀려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부채를 진 우리 각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선행으로 죄의 빚을 모두 갚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그처럼 큰 죄의 빚을 용서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부채의 탕감을 통하여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신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다(마 6:12; 참조 눅 11:4). 여기서 마태는 죄와 용서를 부채와 탕감의 언어로 표현한다. “우리 죄”로 번역된 ‘오페일레마타’(ὀφειλήματα, opheilēmata)는 문자적으로 “우리의 빚들” 또는 “우리의 부채들”을 뜻하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로 번역된 ‘오페일레타이스’(ὀφειλέταις, opheiletais)는 문자적으로 “우리의 채무자들”을 뜻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부채의 탕감에 비유하시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빚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러한 용서의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시며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마 6:14–15). 따라서 주기도문에서 사용된 부채의 이미지는 단순한 경제적 부채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와 용서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의미로 확장된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빚을 용서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기억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태는 여기서 부채와 죄 또는 잘못을 서로 밀접하게 연결하여 사용한다. 마태복음 6장 12절에서는 죄를 “부채”의 언어로 표현하고, 14–15절에서는 “잘못”을 뜻하는 ‘파랍토마타’(παραπτώματα, paraptōmata)를 사용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부채의 탕감은 죄의 용서를 설명하는 매우 적절한 비유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의 순서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와 부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와 부채를 용서하지 않은 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공로나 대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께 자신만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치신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면,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4).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형제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한 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도 “먼저”라는 순서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으며,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2:14–16).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엡 2:18).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들 사이의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의 빚
바울은 로마서 13장 8–10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던 죄의 빚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빚진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남아 있던 빚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죄인들이 죄의 빚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직접 경험하였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행 9:1–9).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은 사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사명의식을 “빚”이라는 언어로 직접 표현한다.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한다(롬 1:14). 바울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값없이 받은 복음과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책임을 자신이 진 빚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죄의 빚을 용서받았다는 것은 모든 빚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제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 죄의 빚을 용서받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 되었다. 죄의 빚은 그리스도 안에서 탕감되었지만, 사랑의 빚은 평생 계속해서 갚아야 하는 빚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한다(롬 13:8).
그러나 사랑의 빚에는 일반적인 경제적 부채와 중요한 차이가 있다. 경제적인 부채는 모두 갚으면 채무가 끝나지만, 사랑의 빚은 한 번 갚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계속해서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계속해서 갚아야 하지만 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는 빚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그의 유익을 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한다(롬 13:10).
그러면 본 장에서 살펴본 대출과 이자와 부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가?
첫째, 돈을 빌리는 사람은 부채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여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성경은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말한다(잠 22:7). 부채는 주택 구입이나 교육, 사업과 같이 필요한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친 부채는 개인과 가계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고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소득과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차입은 피해야 한다.
둘째, 돈을 빌린 사람은 약속한 부채를 성실하게 갚아야 한다. 시편 37편 21절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라고 말한다. 대출은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 사이의 약속이므로, 차입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빌리고 약속한 원금과 정당한 이자를 갚을 책임이 있다. 성경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자비와 부채의 면제를 강조한다고 해서 차입자의 책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차입자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하여 지나친 이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은 특히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그의 곤궁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경계한다. 출애굽기 22장 25절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 줄 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을 명한다. 이러한 말씀의 중심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보호하라는 원리가 있다.
넷째, 대출과 이자의 문제에서도 경제적 이익보다 공정성과 사랑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은행이나 금융기관이 자금을 조달하여 대출하고 그 대가로 합리적인 이자를 받는 상업적 금융활동과, 경제적으로 절박한 사람의 형편을 이용하여 과도한 이자를 부과하는 행위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관심은 단순히 이자율이라는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정의와 자비가 실천되고 있는가에도 있다.
다섯째, 특히 가족과 가까운 사람 사이의 금전 관계에서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형제와 자매 사이에서, 심지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돈을 빌려주고 법정이자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가족 간의 금전 거래에서도 책임을 분명히 하고 원금을 갚도록 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으며, 모든 경우에 이자를 받는 것이 곧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법적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가족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반드시 이익을 얻어야 하는가를 묻게 한다.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필요한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는 말씀은 가족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권리보다 사랑과 자비를 앞세워야 할 때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섯째,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무이자로 빌려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새로운 부채로 해결하려 하면 오히려 어려운 사람을 더 깊은 부채에 빠뜨릴 수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고 필요한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명하셨으며(신 15:7–8), 예수님은 그보다 더 나아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의사결정에서는 “얼마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대출인가, 무이자 대출인가, 아니면 조건 없는 도움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일곱째, 개인과 가계는 건전한 재정관리를 통하여 불필요한 부채를 줄이고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소득의 범위 안에서 소비하고, 미래의 필요에 대비하여 저축하며, 대출이 필요한 경우 원금과 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은 지혜로운 가계관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동시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어려움에 처한 가족과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성경은 대출과 부채와 이자의 문제를 단순히 허용과 금지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는 신중한 차입과 성실한 상환의 책임을 요구하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는 공정성과 절제와 자비를 요구한다. 특히 성경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제와 이웃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사람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법적으로 얼마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재물을 이 사람에게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인가?”이어야 한다. 법이 허용하는 권리를 모두 행사하는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할 최선의 길은 아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이익을 얻는 것보다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고, 부채를 면제하며, 손을 펴서 넉넉히 꾸어 주라고 하신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의 경제생활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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