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1, 2026

책_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_제3부: 복음 전도의 경제

  

 

 

 

 

제3부


 

복음 전도의 경제:

국제경제학적 관점


 

 

제 18장:    복음 전도의 경제란 무엇인가?

오이코노미아의 또 다른 의미

제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 또는 위탁받은 직분을 설명하면서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 곧 ‘경제’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전 9:17; 엡 3:2; 골 1:25).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이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경제, 곧 사명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7–18절에서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복음 전도를 자신에게 위탁된 사명, 곧 반드시 수행해야 할 위탁받은 직분으로 이해한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2절에서 에베소 사람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경륜’으로 번역된 말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 또는 청지기직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이며 선물로 이해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적 직분에 관하여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사도직은 자신의 지위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직분이었다.

복음 전도

복음 전도(evangelism)는 복음, 곧 좋은 소식(good news)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행위이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euangelion)은 “좋은(good)”이라는 뜻의 ‘유’(εὖ, eu)와 “소식 또는 소식에 대한 보상”과 관련된 ‘앙겔리온’(ἀγγέλιον, angelion)에서 유래한 말로, 기본적으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Thayer’s Greek Lexicon』은 ‘유앙겔리온’을 첫째, “좋은 소식을 전한 데 대한 보상(reward for good tidings),” 둘째, “좋은 소식(good tidings)”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삼하 18:20, 22). 신약성경에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euangelion)은 모두 76회 사용된다.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euangelion)과 관련된 동사형은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 euangelizō)로, “좋은 소식을 알리다(announce good news),” “좋은 소식을 전하다(bring good news),” 또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preach good tiding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앙겔리조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61회 사용되며, 특히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복음, 곧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이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신 최초의 분으로서, 공생애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고 선포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나타난 복음 전도의 경제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막 1:1). 네 복음서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소식이 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 곧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9장 35절은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3년이 넘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중간 무렵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바로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 37–38절에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가운데 하나도 그들을 사람을 얻는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눅 5:10; 참조 마 4:19; 막 1:17).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4–6절에서 자신의 복음 사역에 대하여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 전도가 단순히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러한 사역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역사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징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복음에 관하여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셨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사 61:1–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읽으신 후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눅 4:21).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예언한 복음의 선포가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사역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막 13:10).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마지막 때, 곧 종말(eschaton)이 올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 11장 25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복음 전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땅끝을 향하여 계속 확장되어 갔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 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민족이나 한 지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하여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계속 전파되고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5–18절은 예수님의 명령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전한다. 여기에서도 복음은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 한정되지 않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마태가 전하는 대위임령과 같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누가가 다른 형태로 전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도행전 1장 8절은 복음이 지리적으로 어떻게 확장되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준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복음 전도의 사역은 이제 그의 제자들에게 맡겨졌으며,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게 되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복음 전도의 경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도행전 5장 42절은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고, 사도들을 제외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8:1).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교회가 박해를 받도록 허락하셨을까?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박해는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고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당한 박해까지도 사용하셔서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도록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와 그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흩어짐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복음의 지리적 확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행 12장).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세 핵심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헤롯 왕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베드로는 후에 하나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구출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계속된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지역으로 더욱 널리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하나님의 교회에 고통과 희생을 가져온 나쁜 소식이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복음도 그들과 함께 전파되었으며, 결국 복음이 땅끝까지 확장되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 편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로마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복음의 확장이 유명한 사도들만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이름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라 주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밝힌다(롬 1:2–4). 따라서 바울에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선언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이 단순한 가르침이나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을 높이 평가한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 사명인지를 보여 준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6장 25절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하는 메시지를 “나의 복음”이라고 부르며,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나의 복음”은 바울 자신이 만들어 낸 복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셔서 전하도록 하신 복음을 가리킨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도의 사명을 통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고린도 교회도 바울이 세운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하여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 전도의 경제는 하나님의 경제, 곧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전도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오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따라서 복음 전도의 목적은 단순히 복음을 더 넓은 지역에 전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가계,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는 데 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 세계로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의 가계도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계속 확장되어 갔다.

 

 

 

제 19장:    복음 전도에서의 교회의 역할

교회의 어원

영어 처치(church, 교회)라는 말은 “주님”을 뜻하는 헬라어 ‘키리오스’(κύριος, kyrios)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키리아콘’(κυριακόν, kyriakon)은 “주님께 속한 것” 또는 “주님의 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 말이 게르만어 계열로 전해져 독일어 ‘키르헤’(Kirche)와 고대 영어 ‘치리체’(cirice)등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교회라는 말에는 본래 “주님께 속한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되는 말은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ekklēsia)이다. 에클레시아는 ‘에크’(ἐκ, ek, “~로부터, 밖으로”)와 ‘칼레오’(καλέω, kaleō, “부르다”)와 어원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에클레시아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모인 “모임(assembly)” 또는 “회중(congregation)”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14회 사용된다.

『Thayer’s Greek Lexicon』에 따르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ekklēsia)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첫째, 예배를 위하여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을 의미하며,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면서 함께 종교적 의식을 행하고 모임을 가지며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규정에 따라 자신들의 일을 관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함께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56]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마 16:16),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으며,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로스(Πέτρος, Petros)는 “돌” 또는 “바위”를 의미하며,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이름과 “반석”을 뜻하는 페트라(πέτρα, petra)를 연결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교회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당시, 이 말씀에서 말하는 “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앞으로 세워질 자신의 교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를 미리 말씀하셨을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 18장의 문맥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권면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미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록 당시 그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공식적으로 “교회”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부름을 받아 함께 모이고 가르침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그들의 공동체는 장차 형성될 교회의 모습을 이미 보여 주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처음으로 형성된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여 있던 약 120명의 제자들의 공동체였다(행 1:12–17). 그들이 모였던 다락방의 소유자가 누구였는지는 사도행전 1장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던 다락방으로 여겨져 왔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따르면, 후에 베드로가 감옥에서 구출된 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약 120명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으로 맛디아를 제비뽑아 선택하였다(행 1:23–26).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그들과 함께 계실 때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행 1:14).

오순절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셨다. 사도행전 2장 1–4절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으며, 그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으며(행 2:14–40), 그날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약 3천 명이 제자들의 수에 더해졌다(행 2:41).

이렇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따르면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 집에서도 함께 교제하였다. 그 후 사도들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자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믿은 남자의 수가 약 5천 명이나 되었다(행 4:4). 이처럼 성령의 임하심과 사도들의 복음 증거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짧은 기간에 매우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활동은 주로 예루살렘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썼고, 교회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매일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다(행 6:1–4).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열두 사도 외에도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선택하였다(행 6:3). 그들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으며,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행 6:5–6). 그들에게 처음 맡겨진 주된 책임은 매일 음식을 나누어 주는 구제의 일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말씀을 증언하였고(행 6:8–10),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후에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행 8:5–40).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택된 일꾼들의 역할은 교회 안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왕성하여졌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사도행전 6장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섬김을 통하여 계속해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 또는 역할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과 우리에게 그 사명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지역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였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μάρτυς, martys)이었다(행 6:8–7:60). 헬라어 ‘마르튀스’(μάρτυς, martys)는 본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생명까지 바친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면서 영어의 “martyr”(순교자)라는 말로 발전하였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사도행전 8장 3절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가 행하시는 일을 인간의 생각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사울과 다른 박해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였으며,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교회를 파괴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도들을 제외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행 8:1–3).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참으로 놀랍다. 만일 교회가 계속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예루살렘 밖에서는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박해자 사울까지 사용하셔서 그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지게 하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도 함께 전파되었다. 사도행전 8장 4절은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한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려는 인간의 계획은 오히려 복음을 예루살렘 밖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당한 박해와 그리스도인들의 흩어짐까지도 사용하셔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제, 곧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더욱 넓은 지역과 민족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선택된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행 8:5–13).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표적을 행하며 병든 사람들을 고쳤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마술을 행하던 시몬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도행전 8장 13절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말한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의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고 더 먼 지역의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인 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었다(행 8:26–39). 그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빌립은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 53장 7–8절의 말씀을 설명해 주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사도행전 8장 35절은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말한다.

빌립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내시는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세례를 받기를 원하였고,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그리하여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의 회심과 귀환은 아프리카 복음 전도의 시작과 연결되어 전해져 왔다.

빌립의 복음 전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도행전 8장 40절은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을 사마리아 사람에게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디오피아 사람에게까지 전하였으며, 그 후에도 아소도와 여러 성을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의 복음 전도는 복음이 지역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점차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계획은 사도행전 9장에서 박해자 사울이 오히려 박해를 받는 바울로 변화되는 사건을 통하여 나타났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행 9:2). 그런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그는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행 9:3–19; 22:6–16; 26:9–23).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아나니아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다메섹으로 갔던 사울은 이제 오히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9장 20절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말한다. 그를 듣는 사람들은 놀랐으며,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였다(행 9:21–2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을 변화시키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더 넓은 세계로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교회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복음이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확장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셔서 그 가족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행 10장). 빌립을 통하여 복음이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전해지고,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전해졌으며, 이제 바울을 통하여 복음은 이방 세계로 더욱 널리 확장되어 가게 되었다.

사도행전 8장의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지만,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행 11:19). 그러나 그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은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행 11:20–21). 이처럼 안디옥에서는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찾아가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 함께 모여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말한다. 바울의 안디옥 사역은 다메섹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부르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앞으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여러 도시에서 수행하게 될 선교 여행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말씀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섬기면서 이방인 선교를 위한 실제적인 경험을 쌓아 갔다.

특히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선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한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까지 전해졌고, 이제 안디옥 교회는 그 복음을 다시 더 먼 이방 세계로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의 형성은 복음이 예루살렘 중심의 단계에서 세계 선교의 단계로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가 한곳에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도록 두지 않으셨다. 교회는 다시 한번 더 큰 시련과 박해를 겪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는 헤롯 왕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 12:1–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교회가 이러한 박해를 받도록 허락하셨을까?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먼 지역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복음도 함께 전파되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처럼 박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이러한 복음의 확장은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은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말한다.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특정한 사람들을 선교사로 세워 다른 지역으로 파송하는 본격적인 선교 사역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택한 나의 그릇”으로 부르셨으며(행 9:15), 이제 안디옥 교회와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그 부르심이 실제적인 이방인 선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바울서신에 나타난 교회

바울은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ekklēsia)라는 말을 특정한 장소에서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하여 모이는 모임, 지역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또는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에클레시아의 기존 의미인 ‘회중’(congregation)을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고 표현한다(롬 12장; 고전 12장). 또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그 몸의 지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서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표현들이다.

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 곧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ekklēsia)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롬 6장).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처럼, 바울서신에서 교회는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친밀하고 연합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 하나님께서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한다(골 1:18 참조).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연합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처럼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합된 공동체이다.

3.    지역 교회로서의 교회

1세기의 초기 기독교 교회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았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비교적 넉넉한 신자들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었다. 이러한 교회를 가정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의미는 특정한 장소나 건물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루는 공동체에 있었다. 따라서 교회의 중요성은 그 규모나 힘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해 나가는 데 있었다.

바울에게 교회는 복음 전도를 시작하고 확산시키는 기반이자 공동체였으며, 동시에 경제적으로 더 넉넉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나눔을 통하여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평균의 경제’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지역 교회는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역할과 함께, 그 구성원들이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나눔을 실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역할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교회 자체의 규모를 키우거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초대교회는 많은 건물과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더 넓은 세계로 복음을 전하였다. 박해를 받아 흩어졌을 때에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으며,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복음이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파되도록 하였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 건물과 토지와 재정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가계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건물의 크기나 재산의 규모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돕느냐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복음의 가치를 삶으로 보여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서로의 소유를 나누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에게 맡겨진 재정과 자원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복음 전도와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 자체를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고 있는가?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자신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보여 준 교회의 모습이며, 오늘날의 교회가 계속해서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 또는 역할이다.

 

  


제 20장: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

이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누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해 있었는가?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 ‘남자’는 ‘자카르’(זָכָר, zakar), ‘여자’는 ‘네케바’(נְקֵבָה, neqebah)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자신의 동산에 두신 남자 ‘아담’(אָדָם, adam)과 여자 하와(חַוָּה, ḥawwah)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두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다스리심 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최초의 하나님의 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는 한 민족이나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에녹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창 5:22, 24),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창 5:24).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의 가계가 존재하는 물리적인 장소는 없었지만, 에녹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도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였으며(창 6:9),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노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도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이다. 곧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복을 주시며 다스리시는 경제적·정치적 통치 활동이다.

그 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가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과 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때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창세기 46장 27절에 따르면 애굽으로 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명이었으며, 사도행전 7장 14절에서는 7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75명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Septuagint)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에 정착하였을 때 하나님의 가계는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까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창 15:13; 행 7:6), 다른 본문에서는 4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출 12:40–41; 갈 3: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계수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때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스라엘 남자의 수는 603,550명이었다(민 1:1–46). 따라서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을 모두 포함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약 200만에서 3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가계는 더 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야곱의 가족 약 70명으로 확장되었던 하나님의 가계는 출애굽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이방인들까지 자신의 가계에 포함시켜 하나님의 가계를 더욱 크게 확장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5장 22절에서 모든 민족을 향하여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부르신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땅끝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이사야 52장 7절은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소식과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 비록 이사야 시대에는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이 더 넓은 세계로 전파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사야 54장 2–3절에서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장막을 넓히고 줄을 길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방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장막, 곧 가계를 모든 방향으로 넓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5장 1절에서도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며,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은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을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민족에게 전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계의 진정한 확장은 건물이나 재산의 증가가 아니라 생명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데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때가 이르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의 참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24절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5–6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것은 복음 전도의 범위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로, 그다음에는 사마리아로,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려야 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어디에서나 역사하실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모든 민족과 땅끝까지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도 모든 민족을 향하여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했다.

제19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고(행 2–7장), 그 후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었으며(행 8장), 마침내 더 먼 지역과 이방 세계로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행 12–28장). 이처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 전도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이 새로운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가계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을 향하여 계속 확장되어 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박해하던 사울을 부르셨다. 왜 그를 부르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9장 15–16절에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다(행 22:21; 26:17 참조).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와 고난을 받는 바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로 보내지기를 원했는가(행 25:10–12)?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중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부터 이미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롬 15:24, 28). 스페인은 당시 바울이 바라보던 서방의 매우 먼 지역이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까지도 복음 전도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복음을 더 먼 지역, 곧 땅끝까지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행 28:16).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2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자신이 세낸 집에 만 이 년 동안 머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0–31).

바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복음 전도의 여정도 이제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이자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권면과도 같은 서신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면한다. 복음 전도는 우리에게 상황이 좋고 유리할 때에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때가 우리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울 자신이 박해와 체포와 투옥 가운데에서도 복음 전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하나님의 가계는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하여 이름이 알려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신약 외경과 여러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으며,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지역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몇몇 유명한 사도들의 사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고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함으로써 복음은 더 많은 지역과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가계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갔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로마 정부의 박해와 감시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로마의 카타콤(catacomb)은 주로 지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죽은 신자들을 장사하고 그들을 추모하였다. 박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을 피난처로 이용하거나 그곳에 모였다는 전승도 있지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카타콤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찬송가나 완성된 형태의 신약성경 정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의 소망을 고백하였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언하는 삶은 세상의 재산이나 지위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로마의 여러 카타콤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벽화와 상징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식탁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장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신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을 모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묘사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그림과 상징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죽음과 박해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 세상의 삶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을 더욱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증언을 통하여 복음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계속 전파되었으며, 하나님의 가계도 더욱 넓게 확장되어 갔다. 

2세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체포되어 총독 앞에 끌려가 순교를 앞두게 되었다.[57] 그러나 총독은 폴리캅이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나이를 생각하시오.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고 회개하여 ‘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고 말하시오.”

폴리캅은 잠시 침묵하였다. 총독은 다시 그에게 강요하였다.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소. 그리스도를 저주하시오!”

그러자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지만,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다시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시오!”라고 강요하였다.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가이사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한다면 분명히 들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고 싶다면, 날을 정하여 들으십시오.”

총독이 말했다. “나에게는 맹수들이 있소.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맹수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그들을 부르십시오.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에서 더 나쁜 것으로 돌이키는 회개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에서 의로 돌이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총독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회개하지 않을 경우 불로 태워 버리겠소.”

폴리캅은 대답하였다. “당신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지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에서 악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폴리캅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이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86년 동안 자신을 지켜 주셨으며 자신을 구원하신 왕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죽음의 위협보다 강하였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쓴 소설 『침묵』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가톨릭 신부 프란시스코 가르페(Francisco Garrpe)의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58]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가르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일본 관리들은 가르페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을 바다에서 죽게 한다. 그들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로 끌려가 물속에 던져졌다. 가르페는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향하여 헤엄쳐 갔지만, 결국 그 자신도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가르페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대신, 죽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잃었다. 물론 가르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침묵』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문학적으로 보여 준다.

19세기 초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거의 6년 동안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한 사람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거나 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셨으므로 반드시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마침내 약 6년의 선교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첫 회심자가 나타났다. 저드슨은 그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저드슨이 오랜 세월 인내하며 복음을 전한 끝에 얻은 첫 열매였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이후 복음은 그 지역에서 계속 확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저드슨의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그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다. 복음 전도의 열매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크게 나타날 것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스코틀랜드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였으며 특히 100미터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100미터 예선 경기가 주일에 열리게 되자 그는 그 경기에 출전하기를 거부하였다. 영국 올림픽 관계자들과 유력 인사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경기에 출전하도록 그를 설득하였지만, 그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그러나 에릭 리델은 자신의 신앙과 삶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가장 유력했던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였다. 그는 대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에릭 리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자신도 믿음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에 따라 살고자 하였다. 그의 선교사 생활은 때로 고통스럽고 가난하였지만, 하나님께 충실한 자신의 삶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The Flying Scotsman』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소개되었으며, 후에는 그의 이야기가 영화 『Chariots of Fire』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 제목에 사용된 ‘불수레’의 근원적인 성서적 근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은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고 기록한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릭 리델은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에게 운동선수로서의 명예와 성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에릭 리델보다 약 60여 년 후, 영국의 세단뛰기 선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66–)도 비슷한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로 자란 그는 당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육상 경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일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영국 대표 선발전의 세단뛰기 경기가 주일에 열리자 출전을 거부하였으며, 199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세단뛰기 예선이 주일에 열렸기 때문에 출전을 포기하였다. 그에게 당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세계적인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명예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성경을 다시 연구하면서 주일에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1993년부터는 주일에도 경기에 출전하였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세단뛰기 선수로 성장하여 세계기록을 세우고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의 초기 신앙적 결단은 약 60여 년 전 에릭 리델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주일 경기를 포기했던 모습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사의 가장 좋은 모범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신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파송된 선교사로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의 옷, 곧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선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시는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목회자이자 성경학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Our Guilty Silence(우리의 죄된 침묵)』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기회가 있음에도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복음 전도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속되어 온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아브라함의 가정을 거쳐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명을 따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후에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의 재산과 명예와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는 세대와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넘어 계속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이 사명을 위탁받았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교회의 외형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건물의 크기나 재정의 규모만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얼마나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가고 있는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바울이나 저드슨(Judson)처럼 먼 나라로 가는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사용하여 복음 전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기회를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책임은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이며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역시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복음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중요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교회를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고 있는가? 우리가 가진 건물과 재정과 인력과 모든 자원은 교회 자체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확장은 어떤 특정한 대형 교회나 유명한 부흥사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름 없이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사도들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계를 확장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데 반드시 큰 능력이나 많은 재산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직접 전하고, 어떤 사람은 선교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후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각 사람에게 맡겨진 역할과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3:6),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복음의 씨를 충실하게 심고 물을 주는 것이다.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복음 전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이나 재산, 교회의 규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수고와 충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단순히 교회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중요한 길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