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5, 2015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갈 1:1-5)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갈 1:1-5)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
어떤 목사님이 한 집사님에게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좀 맡아서 봉사하여줄 것을 당부하였더니 못들은 척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집사님이 이 일을 꼭 감당해야 하겠습니다”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더니 이번에는 마지못하여 시간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얼마간의 날수가 흘렀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세 번째로 간청을 하였더니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급히 한국을 방문할 일이 생겨서 동일한 집사님에게 (그분이 여행사 쪽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겠냐?’고 지나가는 말로 문의하였는데, 이 문제를 위하여서는 그가 정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였는데도 결과적으로는 표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교회 일로 그렇게 간청하였는데도 거절했던 그 사람이었기에 별 기대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표를 구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에도 그저 덤덤하였는데, 이 사람은 표를 구하지 못함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죄송스럽고 면목 없는 일로 여기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음은 별로 죄송스러워 하지 않는데 목사님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때는 마치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는 모습들이 교회의 잘못된 현상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당부는 성도가 전심으로 감당할 바이요, 목회자의 개인적인 부탁은 형편이 닿으면 들어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들어주지 않아도 그만인 것인데, 많은 교인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개인적으로) 선대함이 세상 복 받는 비결’이라는 ‘잘못된 복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목회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의 교회에 팔십 세가 넘은 할머니께서 출석하는데, 이분이 한국에서는 어느 시골에서 살다가 자녀를 따라 미국에 이민 오고 교회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나온다기보다는 그 자녀(둘째 아들과 그 식구들)를 따라 나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시간 내내 조는 것이 그분의 일이었습니다.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코까지 골기에 설교를 하는 목사님의 주의를 산만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목사님께 떨어져 사는 큰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큰아들이 허리가 무척 아픈데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머니, 제가 기도는 하겠어요. 그러나 그 아들이 예수님 좀 잘 믿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큰아드님의 허리가 예수님처럼 든든해지게 되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큰아들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전도할 요량으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얼마 뒤에 할머니께서 그 목사님에게 말씀하더랍니다. “큰아들에게 목사님 하신 말씀을 전했지 뭐유. 예수님 좀 잘 믿으라구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어머니가 대신 믿고 저 위해서 기도만 해 달래요. 그러기에 제가 이렇게 말해 줬시유.” 할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그래 널 위해 기도해주마. 어미가 되어 어찌 자식 위해 기도하지 않겠니?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어야 하겠다. 그래 네가 아픈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내가 대신 먹어주면 그 병이 낫겠느냐? 약은 네가 먹어야 네 병이 낫는 것처럼 예수는 네가 믿어야 하겠다.” 어머니의 이 말 한 마디에 큰아들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로 인해서 기쁨이 넘칩니다. 할머니가 설교시간에 조는 줄로만 알았는데, 복음의 진수가 그 할머니의 입술을 통하여 증거되었으니 말입니다. 한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 할머니였지만,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이 오묘한 가운데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지혜로 그가 말씀하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2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갈라디아서를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 최상의 것으로 여겼는데,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입니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루터의 아내, 수녀출신)입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표어”(the battle-cry of the Reformation)이요, "신앙 자유의 대헌장“(the great charter of religious freedom)이요, ”크리스천의 독립선언문“(the Christi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2세기의 극단적 바울주의 좌경(左傾) 이단이었던 마르시온(Marcion)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 중에 갈라디아서를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Christianity)가 유대교(Judaism)와 어떻게 다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함으로써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의 선교여행의 시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받아 첫 번째 여행에서 간 곳이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어키)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명칭은 소아시아 내륙의 남쪽(남갈라디아)과 북쪽(북갈라디아)을 다 포함하는데,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는 주로 남갈라디아 지방--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와 더베 등--이었고(행전 13-14장) 이차 전도여행 중 그가 방문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행전 16:6)는 ‘북갈라디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가 일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공회(행전 15장)를 전후하여 그 공회에 상정된 구원의 문제(행전 15:1-2)에 관하여 편지한 것이라고 한다면(주후 50년 전후) 그 대상은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지였던 남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 중에는 갈라디아서가 이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또는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러할 때는 주로 ‘북갈라디아’(혹은 남·북 갈라디아 전역)의 교회들이 그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1절에서 그의 사도권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의사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의사면허증을 비롯하여 그가 졸업한 학교들과 무슨 세미나과정을 이수했다는 유명대학의 증서들(certificates), 출강하는 의과대학의 외래교수증 등이 온통 한 벽을 장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쯩’들을 벽에 걸어놓습니까?
그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의 자격과 권위를 대변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사의 권위와 자격은 그 의사가 얼마나 병을 잘 고치는가로 결정나는 것인데, 자기가 찾아온 의사가 어떤 의사인지 잘 알지 못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이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가 어떤 의사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함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증서들을 전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환자의 병의 치료가 어느 정도는 ‘의사에 대한 신뢰도’에 좌우되어지기 때문에 ‘쯩’의 전시도 무시할 수 없는 (심리적) 치료효과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의사가 아무리 용하다고 하더라도 외모나 말에서 신뢰감을 주지 못할 때, 환자의 치료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씀 증거에 대한 권위가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그가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 말씀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사도권은 무엇으로 인정받았습니까?
그들에게 유명 신학대학의 졸업장이 있었습니까? 사도로 인정받기 위하여 그들은 어떤 유명 대학(institution)의 졸업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이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의 전부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말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우리와 함께 다님’이 사도 됨의 요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으로 따진다면 바울은 분명히 사도로서 결격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그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가 비록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고 그의 가르치심을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그의 사도권의 근거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부르심을 얻고 보내심을 얻었음을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반복적으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과 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맡기심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고, 22장 21절에서 “(주께서)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26장 15-18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使徒)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내다’ ‘파송하다’(send, send out or away)는 뜻의 헬라어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 히브리어는 חלשׁ)에서 나왔습니다. 즉,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됨은 사람들(혹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요 어떤 특정한 사람의 임명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들)이나 교회가 그에게 그러한 직분을 부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를 부르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기에 그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사도권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는 그 직분을 감당함에 사람 혹은 사람들의 집단인 교회의 만족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도권의 부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고 안수한 것이 안디옥 교회였지만(행전 13:1-3) 바울은 어떤 기관이나 사람의 안수 이전에 역사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교 교육과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교회나 노회가 행하는 ‘목사 안수’의 절차를 거쳐서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있기에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절차로서는 노회나 교회를 통하여 안수를 받기에 노회나 교회를 만족하는 목회를 하여야 할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를 목사로 예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으로 목사가 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시고 명하심에 충실한 목사가 됨이 중요합니다.
‘장로’나 ‘집사’로 안수 받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목사를 통하여 ‘장로’나 ‘집사’로 안수를 받지만, 안수의 효과는 안수를 행하는 목사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안수의 주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를 장로나 집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목사를 (인간적으로)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쁘시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2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는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편지가 일차 전도여행과 이차 전도여행 사이에 쓰여진 것이라면 안디옥 지방일 것이요, 이차 전도여행 기간 중이나 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쓰여진 것이라면 고린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곳에서 쓰여졌던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형제로 더불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바울 서신들의 전형입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가 한 타운이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울이 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또한 이차 전도여행 때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까닭입니다.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은혜(恩惠)’란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은혜’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은혜(χάρις)는 ‘우리가 행위로는 의롭지 않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는(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εἰρήνη; 히브리어로는 샬롬[םולשׁ])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값없는 선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혜를 받았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5장 2절에서는 이 말씀을 바꾸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에 들어간 사람”(=은혜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입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그의 전 서신을 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참복음(true Gospel)의 내용입니다. 이것 이외의 어떤 ‘좋은 소식’(good news)이나 ‘듣기 좋은 말’도 참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은 4절만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임의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대(=this age)는 악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은 바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심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대상이 “우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인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대신 죽을” 대속물(代贖物)로 독생자 예수님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속물로 지명하셨을 때,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믿어지지 않기에 여전히 ‘땅에 속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들의 간증집회들을 보면, 90% 이상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간증꺼리로 삼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었더니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축복받았다’ ‘주일 성수를 잘 하였더니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축복이요 지위가 높아졌다’ 등등. 땅에 속한 것에서 자유롭고 진정한 복음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간증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기에 세상을 살 때에도 평안하고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복음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하여 “더하여주시는 것”일 뿐입니다(마태 6:33).

   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5절로 서두 문안인사를 마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광의 주체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입술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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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참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은 그의 사도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음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하심에 의한 것임을 변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파송하신 것이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집사로서, 성도로서 우리에게 이러한 소명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자녀로 삼으시고 나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명하시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고 이를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림을 아까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더라도, 세상을 좇아 변질되고 타락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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