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노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자원이며, 인적자원이라고도 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노동 또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히브리어 멜라크토(מְלַאכְתּוֹ, melakhto), 곧 “그가 하시던 일”이라는 말로 표현되며,[1] 하나님은 그 일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창 2:2–3). 이 단어의 기본형은 멜라카(מְלָאכָה, melāʾkhāh)로서 “일,” “노동,” “작업” 또는 “직무”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이 단어는 인간이 하는 일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창 39:11; 왕상 7:14; 대하 16:5; 느 4:15). 따라서 성경에서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서부터 나타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이 세상에서 일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고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노동의 시작
“경작하다” 또는 “일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바드(עָבַד, ʿābad)로서 “섬기다,” “노동하다,” “일하다,” 또는 “경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 아바드(עָבַד)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는 창세기 2장 5절에서 처음 사용된다. 당시에는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아직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창 2:7), 인간의 노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2장 1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여기에서 “경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바드(עָבַד)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땅과 식물과 나무들을 경작하고 돌보게 하셨다. 아담의 이러한 노동은 단순히 땅을 경작하는 경제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이자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아바드가 “일하다” 또는 “경작하다”와 함께 “섬기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노동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에덴동산에서 땅과 식물과 나무들을 경작하고 돌보는 노동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복의 일부였다. 타락 이전의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면서 노동의 기쁨과 그 열매를 누렸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 자체가 인간의 죄에 대한 저주의 결과는 아니었다.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의 사명이자 하나님의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일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타락하였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6절에서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과정을 영어로도 “labor”라고 부르는데, 이는 출산이 큰 수고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출산의 고통은 크게 증가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출산과 관련된 수고와 고통이 타락 이후 인간이 경험하게 된 고통스러운 현실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도 없었다면, 여성의 출산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큰 고통을 수반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자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었지만(창 1:28), 타락 이후에는 그 복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수고와 고통이 더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7–19절에서 아담에게 그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에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며 “17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동 자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 결과 인간의 노동에 “수고”와 “땀”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다룬 창세기 2장 15절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타락 이전에도 아담은 땅을 경작했지만, 타락 이후에는 동일한 노동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수고와 땀을 동반하게 되었다.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더글러스 믹스(M. Douglas Meeks)는 노동에 대하여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견해, 곧 노동을 저주로 보는 견해와 축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말한다.[3] 그렇다면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창세기 3장 17절에서 “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잇차본(עִצָּבוֹן, ʿiṣṣāḇôn)은 “고통,” “수고,” 또는 “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한다.[4] 이 단어는 또한 “슬픔”이나 “고통”을 뜻하며, 이 문맥에서는 먹고 살아가기 위하여 해야 하는 힘들고 지속적인 노동, 곧 고된 수고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아바드(עָבַד, ʿābad)와 잇차본(עִצָּבוֹן, ʿiṣṣāḇôn)을 비교하면 노동의 두 가지 모습을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아바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수행하는 노동을 나타내는 반면, 잇차본은 타락 이후 생존을 위하여 감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수고를 나타낸다. 아바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땅과 나무와 식물을 경작하고 돌보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노동 자체는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노동에는 고통스러운 수고가 따르게 되었다. 아담은 이제 “평생에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7–19).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노동 자체가 저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노동에 타락으로 인해 노동에 고통스러운 수고가 더해졌다고 할 것이다.
노동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은 출애굽기 20장 9–11절에서 노동과 안식의 원리를 말씀하시며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야 한다. 심지어 인간의 노동을 돕는 가축에게도 안식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엿새 동안의 노동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창조의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 “힘써” 또는 “일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바드(עָבַד, ʿābad)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바드는 “일하다,” “노동하다,” “경작하다,” 또는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바드는 타락 이후의 고통스러운 수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정상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노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브리어 아바드(עָבַד)의 개념은 헬라어 오이코노메오(οἰκονομέω, oikonomeō)의 개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오이코노메오는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로서 가계를 관리하거나 청지기로서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두 단어가 어원적으로 같은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청지기 또는 종으로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하나님의 청지기이자 종으로서 일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전도서 5장 18–19절은 노동의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수고와 노동은 때로 힘들고 고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노동과 그 노동의 열매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재물과 부요를 얻고, 자신이 하는 일과 그 결과를 기쁨으로 누릴 수 있다면, 그 노동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은 단순히 노동의 결과로 얻는 재물과 부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 자신의 수고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얻는 것, 그리고 그 수고를 통하여 얻은 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노동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노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안식일에 어떤 행위가 노동에 해당하는가를 판단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유대교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였으며, 정통파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일부 호텔이나 건물에서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하여 엘리베이터가 각 층에 자동으로 서고 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운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흔히 “안식일 엘리베이터”(Sabbath elevator)라고 부른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행위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자동으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버튼을 누르는 대신 비유대인에게 필요한 층의 버튼을 눌러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행의 배경에는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오랜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이 있다. 유대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안식일에 허용되는 행위와 금지되는 행위를 세부적으로 규정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는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전혀 일해서는 안 되는가?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문제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중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등의 일을 행하셨으며, 이를 통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2장 1–8절(막 2:23–28; 눅 6:1–5)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비난하였다(마 12:2).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안식일에 금지된 일, 곧 노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엿새 동안의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세부적인 규정과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세부 규정 가운데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서 직접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후대의 유대교 전통에서 만들어지고 발전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도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는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어떤 종류의 일이 금지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의 규정과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작은 일이라도 금지된 노동에 해당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으로 보았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노동을 중단하고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달랐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작은 행위를 안식일 계명을 범하는 노동으로 보지 않으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쉼을 주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단순히 모든 활동을 금지하는 규정으로 이해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생명을 돌보는 행위는 안식일의 본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이 말씀은 안식일이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에게 쉼과 유익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선언하셨다(마 12:8).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들이 노동에서 벗어나 쉬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막 2:27).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예배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절박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도 포함된다. 따라서 안식일에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얻도록 하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마 12:7; 호 6:6), 제자들을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규정과 의식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을 놓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이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쉼을 주고, 생명을 보호하며, 자비를 베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보여 주셨다.
마태복음 12장 9–14절(막 3:1–6; 눅 6:6–11)에서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만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하여 마태복음 12장 10절에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11–12절에서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손을 내밀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온전하게 되었다(마 12:13).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이러한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면,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일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목적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돕는 선한 일은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에도 있다(마 12:1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다(출 20:8; 신 5:12).
안식일의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에 노동에서 벗어나 쉬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안식일에 쉰다는 것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심으로써 이러한 원리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따라서 안식일의 정신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노동을 멈추고 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창조와 보호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데 있다. 동시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도 안식일의 정신에 부합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일로 지키는 주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창조와 구원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한편,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지만, 예수님 당시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강조했던 지나치게 엄격한 안식일 규정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 위로와 영혼의 회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은 인간에게 쉼과 회복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나치게 세분화된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고(마 12:8),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12).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쉼과 회복을 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주어진 날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윤리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하나님의 뜻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안식일의 정신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주일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서의 노동
하나님께서 타락한 여자와 남자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지만(창 3:16–19), 노동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는 아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지만, 노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다.
특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쁨으로 행하고 그 노동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노동의 결과로 얻는 재물과 소유만이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전 5:18–19).
바울은 저명한 유대 율법 교사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행 22:3; 참조 행 5:34–39),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5]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동안 천막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았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도시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고린도에서는 자신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지내며 일하였다. 사도행전 18장 3절은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기록한다.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천막을 만드는 노동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삶이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었으며, 동시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들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꺼이 노동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직업을 통한 노동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가계를 섬기고 복음 전파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일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비록 이 세상의 주인이나 고용주를 위하여 일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고용주를 위하여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경제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청지기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의 눈만 의식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터도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고, 그 노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일하라는 바울의 노동에 관한 가르침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노동의 책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노동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노동 자체를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단순하게 평가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자세로 일하는가를 중요하게 가르친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일하고(골 3:23),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고용주를 위하여 하는 일상적인 노동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과 그의 가계를 위하여 직접 수행하는 노동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고 임금을 얻기 위한 경제 활동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기회를 사용하여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그 노동은 거룩한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일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노동의 종류만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일하는가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노동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거나 소득을 얻기 위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주어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지만, 노동 자체가 저주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고,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다른 사람과 사회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따라서 직업의 종류나 사회적 지위만으로 노동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기업가, 전문직 종사자, 교사, 공무원, 회사원, 자영업자, 농부, 노동자 등 각기 다른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자신의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단순히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수행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더 많은 소득이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만을 직업의 성공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주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노동과 함께 안식의 중요성도 가르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노동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명하셨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노동과 안식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을 하나님의 맡기심으로 받아들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노동의 열매에 감사하고, 적절한 안식을 누리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 『Strong’s Hebrew Concordance』, “4399. melakah,” 『BibleHub』.
[2] 같은 자료, “5647. abad,” 『BibleHub』.
[3] M. D. Meeks, God The Economist. Fortress Press, 1989, 128-130.
[4] Strong’s Hebrew Concordance, “6093. itstsabon,” 『BibleH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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