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8, 2015

“율법과 약속”(갈 3:15-18)


“율법과 약속”(갈 3:15-18)

           
  3: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1
요즈음은 재벌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그 힘이 많이 약화된 감이 있지만, 제가 직장생활을 하던 1970년대 후반기에는 정부의 수출장려 정책(export-drive policy)의 후광을 입고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재벌기업이 중소기업들과 하청계약을 맺을 때, 제품의 가격, 납품 기간, 대금 결제 등 계약의 거의 모든 조건들이 대기업 위주로 되어집니다. 납품 기간은 중소기업이 전 노동력을 동원하여 식은 죽 먹듯 밤을 세워야 겨우 마출 수 있고, 대금 결제는 대기업은 정부로부터 수출장려금까지 현금으로 받아쓰면서 납품을 맞춘 중소기업에는 현금결제 대신에 90일짜리 어음을 발행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중소기업 사장이나 전무가 자금압박을 호소하면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음을 받는 것이 불만스러우면 다음에는 다른 중소업체에 하청을 주겠다고 겁을 줍니다. 따라서, (요즈음은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전에는) 한국에서의 대기업 중소기업의 쌍방 계약은 거의 일방적으로 대기업에게 유리합니다. 계약이지만 대기업은 거의 모든 권리의 주체이며, 중소기업은 거의 모든 의무를 담당해야 했습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무역 협정에 있어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강대국은 거의 모든 협정을 일방적으로 자국에 혹은 자국 기업에 유리하도록 정합니다. 어떤 때에 약소국은 자기 나라에서도 넘쳐 나는 농산물, 육류 등의 품목들을 강대국으로부터 억지로 떠맡다시피 수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강대국이 약소국의 수출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위협합니다. 해서, 약소국의 농부들, 육류 생산업자들은 망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은 계약의 불평등으로 인한 피해입니다.

예외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무상원조를 주기 위한 협정을 체결할 때는 약소국에 최소한의 의무만을 부과시킵니다. 이러한 계약은 어떤 이면 사항이 없는 한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간섭하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면) 약소국과 그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계약(contract) 혹은 언약(covenant, testament)은 마치 초강대국과 약소국의 그것과 같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간의 계약에서 피조물이 창조자께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거의 일방적 수준입니다. 그런데, 막강한 초강대국의 대통령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약소국 국민인 우리들에게 그저 무상원조를 주시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아무 의무 규정도 두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고, 또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대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초강대국인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약은 원래 쌍방이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인데, 이 경우 하나님과 체결한 계약은 거의 일방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손해보는 것이 전혀 없는 오직 이익과 축복만 있는 그러한 계약입니다. 쌍방적인 계약이행의 의무가 있다는 의미에서 계약 혹은 언약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 경우 사람의 의무는 거의 미비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원조와 축복이 거의 전부를 이루는 면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규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성경에 언약이란 말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9장으로서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입니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다음에 노아와 언약을 세우되,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복주시되,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는”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또한 다시는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대신에, 노아와 그 가족에게 한 가지 의무를 지어주시는데, “고기를 먹되 그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라”(창 9: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창조자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에게 주신 이 의무가 미비하기에 노아와 그 가족에게  이 “무지개 언약”은 언약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을 매체로 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언약을 설명하면서 또한 약속(16, 18절)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계약 혹은 언약은 사람들 편의 의무는 거의 없고 하나님 편의 축복의 약속이 주종을 이루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5절: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언약”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세-케”(διαθήκη)는 언약, 계약, 유언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 혹은 언약은 처음부터 동등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하시되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우시는 정도의 계약입니다. “네가 내 안에 거하고, 나를 바라보기만 하면(믿으면), 너를 구원하고 영생을 주리라.‘”고 말씀하심이 언약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언약을 맺을 때, 이것도 거의 일방적입니다. 아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이번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상위 5%이내에 들면, 너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줄께.” 5% 이내에 들 자신이 없는 아들이 아버지께 다른 제안을 합니다. “10% 안에 드는 것으로 하면 안돼요?”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아들의 제안을 물리칩니다. “안돼. 반에서 10% 정도 해가지고 무엇에 쓸래?” 아버지가 어떤 생각에서 아들에게 이런 언약을 하였든 간에, 후일에 아버지가 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언약이 계속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과 맺은 언약을 신실함으로 지켜야 합니다. 아들의 성적이 5% 안에 들었는데도, 마침 그때에 돈이 궁하여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아들과 다음 번에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 신용이 없는 아버지로 찍혀서 애를 먹게 됩니다.

이 언약은 “유언”(will)이라는 뜻도 있는데, 유언이 언약과 같은 것은 유언자가 자녀들 혹은 다른 상속자의 부모 공양의무 수행 자세를 보고 유언의 내용--약속--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언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언자의 거의 일방적인, 약속에 가까운 언약입니다.
어떤 재벌 1세에게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60세쯤 되었을 때에 혹 불의의 사고가 그에게 닥칠 것을 생각하여서 전임 변호사에게 그의 유언장을 맡기되, 큰 아들에게는 40%를, 그리고 나머지 네 아들들에게는 각각 15%씩의 재산 상속을 하도록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는데, 큰 아들의 태도가 영 못 마땅하여, 그의 유언장을 수정합니다. 이번에는 큰 아들에게 20%, 마음에 가장 드는 셋째 아들에게는 35%, 나머지 세 아들들에게는 15%라고 정정해 놓았습니다. 또 5년이 흐르는데, 그의 마음이 또 바뀌었습니다. 이 셋째 아들이 유언장의 내용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된 것을 안 후부터는 아버지에게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괘씸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시 유언장을 고칩니다. 이번에는 그의 사후 재벌 경영을 생각하여 경영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둘째에게 재산의 40%를,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15%를 상속하는 것으로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가 타계하였는데, 그러고 나니, 유언장의 변경 경위를 둘러싸고, 형제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재산상속의 다툼이 법정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인데, 바로 언약 혹은 유언의 변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창 15:6) 하나님께서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주신 언약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후 일년이 경과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아래 광야에 머물렀었는데, 이제 떠날 때가 되어서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두 지파(요셉은 두 지파)를 계수하였더니 그 수가 603,550명이었습니다(민 1:46, 2:32). 그들 중에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의 수가 몇 명이었습니까?
두 명이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기준을 적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장정들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셨습니까? 이제 방금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기준을 따라 그들을 구원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별 기준은 여전히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언약이 여전히 유효한데,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백한 사람이 단지 두 명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이후 1,500년 가까이 흐른 바울 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기준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약속의 기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은혜 가운데 믿음의 기준을 낮추셨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고 믿는 것이 너무나 어려울 것 같아서 아들의 형상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하셨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유대주의 신자들의 부추김과 임의의 생각으로 버리고, 믿음 기준 이외에 율법 기준을 더하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기준을 분명히 주지시키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에 근거한 언약 기준은 바울 이후 2,000년 가까이 경과한 현재의 성도들에게 여전히 적용됩니다. 지금도 오직 믿음만이 유효합니다.
믿음이 온전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행위의 기준을 더하거나 율법의 기준을 더할 때, 그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율법의 기준을 더하거나 행위 혹은 윤리 기준을 더하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 같고, 마음에는 위안을 얻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의 착각입니다. 예수님 때에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고, 또한 율법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드러냈지만,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반복하여서 주어집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13장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시고, 17장 7절과 8절에 반복하여,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아서 늙었고 그 아들 이삭의 아내 맞기 위하여 충직한 종(엘리에셀일 것임)을 그의 본토 메소포타미아 갈대아-우르로 보내면서 그는 하나님의 반복되었던 언약을 종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창세기 24장 7절에서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하나님)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봅니다.

“그 자손에게”라고 했는데, 여기서 “자손”(see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라아”(헬라어는 σπέρμα)는 단수 형태이지만, (집합적으로) 복수의 의미(헬라어 σπέρμα도 마찬가지임)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그의 해석 목적으로 “자손”이 단수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음에 착안하였습니다. 단수의 의미로 쓰인다 하더라도 “자손”은 원래 아브라함에게는 창세기 24장 7절에서 보는 바대로 “이삭”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삭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람의 언약이라도 한번 정한 후에는 폐하거나 변경할 수가 없는데(15절), 하물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일방적인 축복의 약속과도 같은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서 반복적으로 약속하신 땅과 민족과 복이 그와 그 자손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 언약의 결정체(結晶體)가 창세기 17장 7-8절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주신(창 15:6) 약속을 율법이라고 엄한 기준을 적용하여 폐하거나 변경하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 후손의 경우에도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을 보시며 하나님 편의 약속을 여전히 이행하여 가십니다.
율법은 하나님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을 변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혹은 약속)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고 못지킴은 언약 혹은 약속을 결코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그들에게 주어집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언약이란 의미에서 이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의무 사항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네,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에게서도 믿음을 보기를 원하시며, 갈라디아서 3장 9절에서 보는 바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하십니다.

로마서 4장 13-14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 영적 가나안 땅과 그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얻은 것도 그의 믿음을 통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축복의 말씀을 바라보고 붙잡는 것이 또한 믿음입니다.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 “사백삼십 년”의 기간을 ‘언약을 처음 받은 때로부터 율법을 받은 때까지’ 경과한 기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정경(正經)은 이 “사백삼십 년”을 이스라엘의 ‘애굽 땅에서의 종살이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0-4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창 15:13과 행전 7:6에는 이 기간을 사백 년으로 기록).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으로 이주(移住)한 것은 요셉이 애굽 국무총리로 있던 당시 그의 아버지 야곱의 나이 130세 때(창 47:9, 48:28) 도합 70명이었습니다(창 46:27). 따라서 현재의 성경대로라면, 아브라함이 처음 언약을 받은 것이 기록된 하란을 떠날 때부터(창 12:4)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모세의 나이 80세) 한달이 지난 다음에 도착한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기까지 경과한 기간은 총 645년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사백삼십 년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바울은 아마도 다른 전승을 이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1세기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연대계산표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난 때로부터 모세가 80세에 출애굽할 때까지의 기간’을 430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요세푸스가 이용한 전승과 같은 전승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이 처음 언약을 받은 하란을 떠날 때로부터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질 때까지’를 430년이라고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기로 정하신 축복의 약속이 믿음 이외에 그 어떠한 규정으로도 폐하거나 변경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그의 삶이 좀 부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꺼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내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로 온 사람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하나님과 교회를 영영히 떠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내치시거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믿음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못되고 불효한 자식이라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의 부족한 자녀일지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변경하지 않으십니다.

   18절: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최소한의 의무--믿음--만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훨씬 후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율법으로 유업의 유무, 다과를 정한다면, 이것은 처음 계약이나 유언장을 변경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업”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이로노미아”(κληρονομία)는 유업이라기보다는 “기업”--“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 세상에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믿는 사람에게 허락되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3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럭을 운전하고 가던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고 가는 그 사람이 안되 보여서 차를 멈추고 그에게 뒤에 타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트럭 뒤에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트럭 운전사가 돌아보니 그 사람은 여전히 짐을 등에 지고 서서 달리는 트럭 뒤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트럭 운전사는 차를 멈추고 그 사람에게 ‘짐을 내려놓고 앉아서 평안히 가지 왜 그렇게 짐을 짊어진 채 서서 힘들어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차에 태워준 것만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와 허물의 짐을 지고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거운 죄와 허물의 짐을 내려놓고 축복과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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