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갈 3:10-14)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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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주문(呪文)이나 마력(魔力), 또는 저주(咀呪) 아래 놓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관상(觀相)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 등 점을 보러 다니고 또 이를 믿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점집에 가서 점을 봤는데, 점술가가 이르기를 “올해 당신에게는 액운(厄運)이 끼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적(符籍)을 한 장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해서, 부적을 몸에 지니지 않고 생활하는데 왠지 찜찜하고 어느 때인가 예고 없이 화(禍)를 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 이 사람에게 바로 점술가의 점괘가 저주꺼리이며, 그는 점괘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입니다.
야구선수의 아내가 남편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하며 말합니다. “운동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 목걸이를 착용하세요. 이 목걸이가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꺼예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남편이 어느 날인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시합에 나갔는데, 그날 따라 수비도 잘 되고 타격에서도 4타수 3안타의 좋은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 다움 경기에도 역시 십자가 목걸이를 했는데, 그날도 좋은 수비를 하고 4타수 2안타에 홈런도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 시합 때에는 어떻게 잊어버리고 그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고 경기장으로 향하였습니다. 경기가 시작된 다음에야 비로소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수는 불안해하고 갑자기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날 따라 수비도 잘 안되는 것 같고 타석에 들어서서도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에게 아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선물한 십자가 목걸이는 이제 저주꺼리가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 목걸이의 있고 없음이 자신의 행·불행을 좌우한다는 맹신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 목걸이의 저주 아래 놓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주일날 예배는 될 수 있는 대로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구분하고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 한 번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아니하고 다른 일을 하였더니 차 사고가 나서 커다란 손실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고가 주일을 빠진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아니라,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 주일예배에 참석합니다. 이 사람이 이러한 잘못된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일예배가 이 사람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1997년 6월 출간)는 책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어떤 목사(이윤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년 2월 출간)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인기 있는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그들의 마음들을 그 책들로 향하게 합니다. 교회를 꼬박꼬박 출석하고 신앙을 붙잡고자 하는데도, 여전히 사업에 실패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병이 항상 그 사람과 가정을 따라 다니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에 대대로 흐르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계에 조상대대로부터 흐르고 있는 저주를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놓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며, 이를 끊어버려야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그 독자들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며(nullify),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갈 3:9 참고)을 부정(否定)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을 살 때에는 병듦 가운데, 가난한 가운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한 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물론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라면, 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길지 않은 생은 하나님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각각 달리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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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잘못 알고 믿는 우리의 잘못된 지식과 종교행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하신 것들을 저주꺼리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한 말씀을 보며 율법이 저주를 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저주의 원인을 제공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불완전하시고 잔인하고 포악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왜 “저주 아래 놓인다”고 말씀하는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저주(κατάρα)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9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가 받을 복에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에게 임할 가장 큰 축복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는 것인데, 저주를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생명이 끊어집니다.
바울이 10절에 인용한 율법책의 기록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27장 26절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27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 것, 근친상간의 일을 하지 말 것, 변태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짐승과 교합하는 일을 하지 말 것, 무고한 자를 억울케 하거나 죽이는 일을 하지 말 것 등 당연한 금령이며 이를 어기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태여 그런 계명들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당연히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계명들을 지킴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을 때 그들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저주가 두려워 지키는 것이라면 그들은 이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자가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부담스럽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는 자란 것입니다. 율법 그 자체는 저주가 아닙니다. 다만 율법 지킴에 대한 부담이 저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12절에서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고,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반복하여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여기에 어긋나는 삶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롬 3:20)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얻는 바울의 가르침에 결정적으로 공헌하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구절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 인용한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요, 또다른 하나는 본절(11절)에서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 “그러나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의 두 말씀을 결합하여 신약시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믿음의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즉,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얻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이 그의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사람은 이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바울의 답은 명쾌합니다. 의로와짐에 필요한 요건으로 율법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의 요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논지를 따르면, 부담으로 여기며 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그 직분의 일이 부담이 되고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까? 대답은 “예”입니다. 그 이전에, 직분 감당함이 기쁨이 아니고 부담만 주며 그로 인하여서 적은 믿음마저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직분을 맡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믿음으로 사람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쁨으로 이루는 삶을 살게 합니다.
12절: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레위기 18장 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는 그 행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없으며 따라서 율법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없습니다.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더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앞에서(갈 2:16) 바울은 이미 “울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율법은 생명을 주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하라’(Do), '하지 마라‘(Don't do)로 표현되는 외적 규범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어떤 생명을 주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21장 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사람들 앞에 경계를 삼기 위하여 죽인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흉악한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은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저주는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사망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고, 그들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사망이 인간 세상에 왔으나, 율법이 불순종이 죄인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롬 7:7).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라고 말씀함은, 율법 아래에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인 사망이 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를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저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죄를 죄 되게 하는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셨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놓여있던 바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 아니라 저주를 변하여 축복되게 하십니다. 전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였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와 사망의 저주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2장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를 때 그의 후손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복이 이들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시고(갈 3:2, 5 참고), 그 성령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구원의 보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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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시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를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이나 기타 부담에 우리를 맡기는 삶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 아니라 의를 얻지 못하게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여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며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을 얻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그것을 끊을 수 있는 비법을 발견하고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 등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축복과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것이 더욱 유익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 등의 책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두려움과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모든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이를 믿으십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나 가정이나 모든 일상의 삶이 자유자로서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들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한없이 끼쳐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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