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8, 2015

“내가 원수가 되었느냐?” (갈 4:12-16)


“내가 원수가 되었느냐?” (갈 4:12-16)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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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81장):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信言不美, 美言不信)
   선한 사람은 말을 잘 못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善者不辨, 辨者不善)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知者不博, 博者不知)
   (Truthful words are not beautiful; beautiful words are not truthful.
    Good words are not persuasive; persuasive words are not good.
    He who knows has no wide learning; he who has wide learning does not know.)

바르고 참된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귀를 즐겁게 해주고 듣기 편한 말이지만 사람을 망하게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귀는 따갑고 듣기는 불편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들어 있고 약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간신의 아부의 말이 가장 듣기 좋을 것이지만, 이는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충신의 직설적인 말이 가장 듣기 거북한 것이지만, 이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좋은 약은 입에 쓰고(良藥苦口),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린다(忠言逆耳)”라고 했습니다(《공자가어(孔子家語)》「육본(六本)」편). 즉,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는 이롭다.”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의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어서 번창했고,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굽신거리는 신하만 있어서 망했다고 합니다. 임금에게 직간(直諫)하는 신하가 없고, 어버이에게 간하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간하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간하는 친구가 없다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알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바로잡아야 하고, 어버이가 잘못하면 자식이 바로잡아야 하고, 형이 잘못하면 동생이 바로잡아야 하며, 선비가 잘못하면 친구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자식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골라서 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잘못을 바르게 지적하고 고치도록 타이르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부모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식은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갖기를 싫어하는 목회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예외 없이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어합니다. 교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고 있을 때는 이러한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바른 말을 하면 원만한 관계가 깨어질 위험이 있을 때 목회자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원만하고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그저 잠잠하고 있든지 아니면 ‘괜찮습니다’,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은 듣기에 거북하고 쓴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권면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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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잠잠할 수 없음에 바울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바울이 표정을 바꾸면서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기 전에 그들이 알아서 그들의 잘못된 데서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으련만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원래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의 문화에 자신이 동화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1-23절에서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율법 있는 유대인으로서는 금기사항처럼 되어있는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식사 자리에 함께 하며 유대인외적인 요소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것같이, 갈라디아 교인들도 크리스천으로서 바울의 자유함의 자리에 나아오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의 권고하는 말씀이 그가 떠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갈라디아 교인들을 찾아온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기에 그들은 한번 받아들인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가르침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가르침이란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들의 식사규례를 따르고 또한 온전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고, 그위에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즉 믿음은 있으되 이러한 유대인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면 의로와질 수 없고 구원함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뇌리에 두려움으로 박혔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몇 년이 되었을 때 “행운의 편지”란 것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도 두세 번 더 받아보고, 최근에는 한국 방송사의 인터넷 게시판(message board)에도 이런 종류(種類)의 편지가 게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내용인즉, 이 편지를 똑같이 복사하여 다른 열 명에게 전달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르는데 누가 얼마를 얻게 되고, 또 누가 얼마를 얻게 되었다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나열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끝은 만일 이 편지를 읽은 후에 열 사람에게 동일한 편지를 전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임하는 화에 대하여 열거해놓고 있습니다. 누구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죽음을 당하고, 또 누구는 어떻게 되고 등등으로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들게 합니다.
첫 부분을 읽을 때에는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이 일을 해볼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시켜준 이 편지가 끝내는 두려움과 저주의 주문(呪文)이 되어 마음이 약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지 않고는 두려워서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행운을 바라고 편지를 다른 열 명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두려워서 그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두려움과 저주의 편지”가 됩니다.
이 편지를 처음 작성한 사람은 아마도 심심풀이 혹은 그냥 막연한 재미로 그리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후에 읽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그런 두려움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사람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마음의 할례뿐 아니라 육적인 할례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말씀도 지켜 행할 수 있고, 또 지금 그의 식사문화와는 동떨어진 일이지만 레위기 11장을 읽으면서 이왕이면 정결(淨潔)한 음식을 먹기로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함은 칭의나 구원과는 무관한 그의 엑스트라 하나님 사랑함의 한 표현방식일뿐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함은 그들이 이러한 엑스트라의 하나님 사랑을 행하고 있음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러한 일을 행하되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서 칭의와 구원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억압의 마음으로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할례나 식사규례를 포함한 율법지킴, 날과 달의 지킴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복하고 강조하며 외쳐 말씀함은 그들을 위하는 심정에서 하는 것이지 유대주의 크리스천들과 경쟁하여 또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외침은 그들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기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지난 좋았던 관계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복음과 사랑을 들고 다가간 것같이 너희도 나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나오지 않았었느냐? 너희가 전에는 나의 약한 모습 가운데서도 나에게 해롭게 한 적이 없지 않았느냐? ‘내가 지금 강력하게 너희가 또 다른 복음(갈 1:6, 8, 9)인 줄 알고 믿고 있는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되고 거짓된 복음에서 떠나라고 함은 너희에게 불이익을 주어 너희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이게 하려고 함이 아니라 너희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아래 놓이게 하려는 사랑함에서 하는 권고이다. 너희가 전에 나에게 해롭게 한 적이 없었던 것같이 지금도 나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내게 해롭게 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즉, 나의 전도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갈 4:11, 또한 2:2)’고 간원(懇願)하는 것입니다.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바울에게 치명적인 “육체의 약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고 다만 짐작만 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씀함도 성경학자들은 그의 내면의 상태 뿐 아니라 그의 육체의 약함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그는 전도의 방해거리인 “육체의 가시”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약함” 또는 “육체의 가시”는 첫 번째로는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롯된 눈병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아나니아의 안수함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에도 시력의 상당부분을 잃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를 쓸 때에 직접 쓰지 못하고 대필자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하게 합니다.
이 눈병 이외에도 두세 가지 더 고질적이며 불치의 육체의 약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말라리아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심히 떨었노라”고 함은 전도자의 사명감 당함을 위함이기도 할 것이지만 그가 전도하던 중에 얻게된 말라리아로 인하여 심히 떨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에게 간질병이 있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학자들은 두통 또는 루케미아(leukemia: 백혈병)라고도 주장합니다. 어떤 육체의 약함을 갖고 있었든지 이것이 그의 전도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외적인 육체의 약함을 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도하다가 돌에 맞고 헐벗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 외적인 초라함과 만신창이의 모습도 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남)갈라디아 지방 여행 때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사가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사와 이적과 그 소문이 갈라디아 사람들로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며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외모와 육체의 약함은 보지 않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영접하되, 구약의 아브라함과 롯이 하나님의 천사를 영접함같이, 또한 복음서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그러한 기쁨으로 그리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영혼과 입술을 통하여 증거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로 말미암아 믿음과 성령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던 사람입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전하는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한 것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었던 복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순전함과 자원함이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칭의와 구원함에 이르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평안과 기쁨의 축복을 주었는데, 이제 율법지킴의 부담이 그들로부터 복음의 즐거움과 축복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들에게 기쁨과 축복의 복음을 전한 바울까지도 이제는 소원한 사람으로만 여겨지고 그의 사랑의 권고가 거부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율법의 주문과 저주 아래 놓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서 기쁨과 축복의 복음 아래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육체의 약함을 보지 않고 다만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예수님의 대리자로 영접하고 받아들일 때에는 바울이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눈이 필요하니 달라’고 하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서 줄 정도로 바울을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에게 눈은커녕 식사 한끼도 대접하지 않을 것이며 문전 박대할 것입니다. 더 이상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그를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길 뿐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악의 있는 선동(煽動)이 바울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근본적으로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미명아래 저주의 세력 아래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끌어들이는 사단의 미혹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 저주로부터 탈출하여서 그들이 처음 기쁨으로 시작하였던 믿음과 성령의 축복된 삶으로 나아오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참된 말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함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을 칭의와 구원의 요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저주거리를 만드는 것이며, 이런 것을 첨가하는 자는 그가 천사일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갈 1:8, 9).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좋은 관계의 방해꾼인 유대주의 크리스천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바울이 그들에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는 사람으로까지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에 바울을 통하여 받아들인 복음은 잘못된 것이요 진정한 구원은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유대주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복음은 어쩐지 잘못된 가르침 같습니다. 그위에,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머리에 새긴 그 저주의 주문(呪文)--즉, 할례를 받지 않고, 식사규례를 따르지 아니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들의 구원이 무효화되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아무리 그들에게 권고하고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다만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며 원수가 되는 일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이 참된 말을 하여서 그들과 원수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의 참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바울과 원수되게 함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취하였을 때 선지자 나단은 사무엘하 12장에서 보는바 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다윗 앞에 나아가고 그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합니다. 만일 다윗이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면 나단은 다윗의 원수가 되는 것이며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성은 나단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그뿐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통회함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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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격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이 가장 위대한 선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그들의 잘못을 거울삼아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들이 다만 믿는 사람의 평안과 기쁨에 대해서만 교회들에 편지한 것이라면 현대의 교회들에 주는 유익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역설적(逆說的)으로 주장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현대의 교회들은 그들의 문제와 잘못을 생각하고 고치기 위하여 엄청난 고민을 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들과 교인들의 문제와 고민들이 이미 바울 시대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미 해결방안을 그의 서신들에서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들과 교인들의 고민들과 문제점들에 당면하여서, 바울 서신들은 2,000년 전 고문서(古文書) 취급을 하고 그의 권고는 낡고 구시대적인(out-of-date)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는 권고를 들으시는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바라보되 여러분의 생각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들이 믿음의 기쁨과 자원함에서 나오신 것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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