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오기 전과 후” (갈 3:23-29)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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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黃昏期)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예비문답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이 사람도 예비문답을 받기 위하여 목사님께 갔습니다. 목사님이 질문합니다. “누가 성도님을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글을 몰라 예비문답을 대비하여 충분히 준비할 수 없었기에 목사님의 첫 번째 질문에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첫 번째 질문은 그가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악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악의 이름’을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에 대한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질문은 잘 준비되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잘못 대답하면 세례 받을 기회가 무산될까 봐 그는 목소리까지 떨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 ‘악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가 가끔 저를 찾아왔었으나 이제는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예비문답에 통과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세례를 받고 그 교회의 활동교인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를 위한 것으로 재정정책(fiscal policy)과 금융정책(monetary policy)이 있습니다. 재정정책이라고 함은 세금(tax)이나 정부지출(government spending)을 조정함으로써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성장시키고자 하는 정책이고, 금융정책은 화폐의 공급(money supply)과 이자율(interest rate)을 증감함으로써 경제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정책입니다.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재정정책주의자(fiscalists) 또는 흔히 케인지안(Keynesians, J. M. Keynes, 1883-1946)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금융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금융정책주의자 또는 화폐정책주의자(monetarists)라고 하는데 이들은 할 수만 있으면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만약에 개입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 때에는 화폐의 공급조절이나 이자율의 조정 등으로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원리와 같이 ‘자동조정장치’(autonomous stabilizer)가 경제 현상에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 유아기와 소년기의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재정정책주의자(fiscalists)의 교회와 목회자의 적극적인 지도나 권고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이후의 크리스천으로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금융정책주의자(monetarists)의 원리가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믿음이 온 이후의 크리스천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목사님의 적극적인 강요성의 권고가 없다고 하더라도 즐거움과 자원함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의 삶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강권적인 권유가 있을 때에만 움직이고자 하는 교인은 목회자를 몽학선생(蒙學先生)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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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의 신앙의 삶과 교회생활이 강요나 부득이함이나 체면으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자원함과 기쁨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으로 하는 것인가입니다.
23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라고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이 계시되기 전입니다. 뿐만아니라 한 개인으로는 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에게 생기기 전입니다.
이때까지 “우리”--바울과 다른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어 율법을 좇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율법이 그들을 매고 있었습니다.
“율법 아래”(또한 4:5)라는 표현은 앞에 나온 표현들과 또 다음에 나오는 표현들과 맥을 같이합니다.
3장 10절과 13절에서는 “저주 아래”라고 했고, 22절에는 “죄 아래”, 25절에는 “몽학선생 아래”라고 했으며, 4장 2절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3절에서는 “세상 초등 학문 아래”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라고 말할 때,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던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이며, 간접적으로는 이 유대인들의 율법 행함을 따라하고자 하는 현재의 갈라디아 교인들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율법의 의문(儀文)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의 하는 일들은 때로는 마지못한 선택이요, 때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비난받을 것 같아 또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같은 불안감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랬을 것이고 현대의 교인들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데, “율법 아래” 있는 교인들은 자신이 스스로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목사님이나 다른 사람이 ‘해주십시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고 마치 부득이하지만 강청에 의하여 못이기는 체 하는 모양으로 합니다. 이러한 것이 아직까지 “율법 아래 매인” 또는 “몽학선생 아래 있는” 사람의 종교행위 모습입니다.
흔히 “종교 행위”는 “신앙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율법 지킴에 남달리 열심이 특심하였지만, 그들의 율법 지킴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요, 타인에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요, 때로는 부득이함과 의무감으로 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3절이 율법의 부정적 측면을 말한 것이라면 24절의 “몽학선생”의 비유는 부정적이지만 소극적으로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는 모태신앙(母胎信仰)”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신앙을 갖고 있던 경우를 말합니다. 그 뱃속에 있던 아이의 그리스도 선택은 자기의사가 아니었지만 어머니로 말미암아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머니가 부르는 찬송을 들으면서 태속에서 자라고 태어납니다. 태어나서는 어린아이로서 어머니의 팔에 안기어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또 대여섯살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를 찾습니다. 십대가 되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들중에도 교회를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교회에 가기 싫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앙의 강청이 그로 마지 못해 교회로 향하게 합니다. 물론 자녀의 고집이 더욱 강하고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강청으로도 교회로 이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자식의 의사와 원함과는 상관 없이 그를 교회로 이끄는 어머니의 역할이 몽학선생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율법이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같이, 어머니는 자녀를 교회로 또한 참 신앙의 삶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형들(Types)이나 예언들(prophecies),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사람들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됨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구속자(救贖者, Redeemer)를 바라게 하는 일이 율법의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 수 없고,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몽학선생(蒙學先生)”이란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란 뜻으로 헬라어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를 번역한 것입니다.이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오는 일과 또 집에서 공부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진 사람’인데, 대개는 노예들 가운데 똑똑한 자를 몽학선생으로 삼았습니다.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면에서는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같지만 주인의 아들의 장래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몽학선생의 한계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어디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루는 일인지 알게 하지만, 우리에게 생명은 선물로 주지 못하며 자원함과 즐거움의 마음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생명과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율법의 역할’은 한정적(限定的)입니다.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까지 데려다 주고, 그 자녀의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는 그 길로 달려가는 열정이 생기게는 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교회에까지는 데려 올 수 있지만 자녀가 자발적인 믿음이 생기게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또한 한시적(限時的)입니다.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가르치고 돌봄이 그 자녀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며, 어머니가 자녀를 교회로 데리고 나옴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만입니다. 그 이후에는 결정이 그 자녀에게 있습니다. 어머니의 바람이 아무리 자녀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이 되고 되지 않음을 결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25절: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자녀가 아직 성년이 되기 전에는 부모님이 계획하고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기타의 일들을 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자녀의 원함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그래도, 부모님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일이라 마지못하여 합니다. 그들에게 부모님은 마치 몽학선생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자녀는 하루 빨리 부모님의 슬하(膝下)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 기회가 보통 대학생이 될 때 주어집니다. 대학을 선택하는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대학을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몽학선생인 부모의 곁을 떠난 것이 율법시대의 종결이요 그리스도 시대의 도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래 그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온 후”라고 함은 하나님의 경륜의 때가 이르러 “약속의 자손”(갈 3:16 참조)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오심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뿐만아니라, 우리 교회에 오셨을 뿐만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오심’을 의미합니다.
내가 교회생활을 하지만 그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내내 반복하여 말씀하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믿음”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칭의(稱義)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온 후에는 우리는 강요나 부득이함이나 체면이나 외형적인 이유로 종교행위를 하는 모습은 없어집니다.
목사님의 부탁이 이제는 강요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라 부담감이 없습니다.
‘하려고 했던 일도 멍석을 깔아주면 안한다’는 말도 있지만, 믿음이 온 후로는 다른 사람이 멍석을 깔아주건 깔아주지 않건 이제는 나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원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건 뒤에서 욕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하는 일이 나에게는 즐거움이요 하나님께는 영광돌리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고(갈 3:2, 참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서 요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血統)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나는 구원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형통하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사람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공급하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허물의 삯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함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인 까닭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 자신의 죄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물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는 율법의 한정적 효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함을 받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에게 바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목사님은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설교하시지만, 저는 그보다는 저 나름대로 세상 복주시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속으로 다짐하는 사람에게 그의 목사님은 그를 (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도 될 수 없으며(24절), 하기에 이 사람은 계속 믿음의 주변에서만 맴도는 삶을 살 뿐입니다.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고 할 때 이 세례는 ‘성령 세례’를 의미합니다.
이는 바울이 3장 2절과 5절에서 이미 말씀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우리에게 임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3장 2절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 가운데 느끼며 그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우리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함은 나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기 시작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며 세상의 정과 욕심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서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믿음이 온 후에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몽학선생 아래에서(또한 “율법 아래에서“[3:23]; ”죄 아래에서“[3:22]; ”저주 아래에서“[3:10])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더 이상 차별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 믿음의 사람이 된 사람은 누구의 간섭이나 강요나 부담이나 차별 아래 있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원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기쁨으로 섬깁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종과 자주자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같이 한 자유인입니다.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한 자가 되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앞서 3장 7절에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또 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리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믿는 자들이 받을 복을 29절에서는 “유업”(inheritance)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업은 또한 기업(엡 1:11, 14)이라고도 불리는데 곧 하나님 나라의 자유시민(빌 3:20)이 되는 것이며, 그 땅에서의 상급과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세상의 경험 법칙에 매여서 살았습니다. 나의 경험과 판단과 세상 윤리가 나를 지배하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다음에는 나의 삶의 몽학선생이던 세상의 경험법칙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법칙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이것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삶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믿음 법칙은 세상의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준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믿음 법칙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에게 임하여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러한 삶이 가능합니다.
믿음이 나의 삶에 온 후로 나의 신앙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나를 잡아매며, 구속하며, 강요하며, 강박하는 것들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자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지만, 나는 나의 자유를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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