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8, 2015

“내 수고한 것이 헛되냐?” (갈 4:8-11)


“내 수고한 것이 헛되냐?” (갈 4:8-11)

           
 
  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
한국에서 평신도로서 20년 신앙생활하고 미국에서 평신도로서 10년, 목회자로서 20여년 신앙생활하면서 한국과 미국에서의 신자들의 교회생활을 비교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데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예외조항이 인정되듯이 직분자라도 저렇게 신앙생활을 하여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짐을 보면서 이것 역시 집단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잘못되게) 신앙생활을 해도 이민교회에서는 괜찮다는 생각이 교회에 누룩이 됩니다.

저에게 가끔 전도사님들이나 신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주어집니다. 주로 성경해석이나 성서신학을 가르치는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른지 잘 모를 때에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책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도 모르면서 ‘이것은 2,000년 혹은 4,000년 전에 기록된 것이니까 지금은 이대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성경을 임의적으로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목회자나 교인이 있다면 이는 매우 위험스런 생각이며 이런 사람은 자기의 얕은 지식과 판단에 넘어가 망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40일을 정탐케 한 다음에 이들의 보고를 종합하여 회중에게 들려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는 것이 가한지 아니면 불가한지’에 관하여 투표하였다면, 적어도 십 분의 십이(10/12)는 불가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정탐꾼(10/12)의 불신앙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고 결국에 애굽을 떠난 20세 이상의 장정 60만여 명 가운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사십 년 후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집단의 불신앙의 오류가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판단에서는 불신앙의 다수결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수결의 결정을 따라가다가는 망하는 길로 갈 수도 있음을 말씀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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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떠난 후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적은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또한 성령도 받았습니다(“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은 성숙한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옆에서 누가(=유대인 크리스천들) 뭐라고 함에 미혹되기 쉬웠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온전히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외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리는 유대인의 식사 규례를 본받아야 할 것이며, 또한 기본적인 율법의 사항들을 지켜 행하되 유대인들이 하는 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꼭 지켜야 한다고 선동했는데, 그들의 말이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교보다 현재 더 영향력을 행사하여 대다수의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들을 지켜 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집단의 잘못된 신앙의 이해와 그 행위가 문제입니다.

   8절: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그 때에는”(τότε)이라고 함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때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로서 이스라엘 밖에 있었으며, 약속의 언약을 들은 적도 없었고, 따라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이 없는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12 참고).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τοίς φύσει μὴ οὖσιν θεοίς)라고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숭배한 신들이 다만 허구적인 존재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게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태양이나 달을 숭배한다든지, 불을 숭배한다든지, 산이나 나무를 숭배하든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신들(man-made gods)을 숭배하여왔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은 인격적(Personal)인 존재가 아니고 허구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강요한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 그 존재들을 믿고자 한 것이며, 그 존재 아래 자신을 두기를 원하였을 따름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이러한 우상들의 종노릇 하기를 자청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들도 갈라디아인들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이들과 같이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삶을 어떤 운명적인 것--사주팔자, 토정비결 등 점궤에 의지하는가 하면, 원시종교적 절대자에 의존하는가 하면, 자신을 한 번도 하나님이나 신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 고다마 싯달타를 신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의 모습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요 아직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염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본질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9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이제는”(νύν)--바울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된 때를 가리킵니다. “이제는”이라고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이 온 후”요(3:25),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때”(4:4-6)를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초점은 “이제는”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성인군자와 같은 윤리적인 삶의 선(善) 때문이 아니고, 고상한 것처럼 보이는 삶의 철학(哲學)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아신 바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라고 안타깝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τὰ ἀσθενή καὶ πτωχὰ στοιχεία)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섬기던 그런 우상 숭배는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데서 떠난 모든 비본질적인 것에 관한 추구는 바울에게 있어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신 바가 없고, 유대인들의 식사규례를 요구하신 적이 없고, 또한 10절에 열거된 유대인들을 위해 정하여 주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라고 명하신 바가 없는 데도 이방인들은 스스로 이러한 율법적 의무 아래 그들을 둠으로써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여기서 “날”(ἡμέρας)이라고 함은 안식일과 금식일 등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의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욱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는 쓸 데 없는 다툼이 이방 교회들에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롬 14:5; 골 2:16 참고). 로마서 14장 5절에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말씀하고,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달”(μήνας)은 월삭(new moon, 사 66: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내신 아빕월(출 13:4, 1월--현재로는 3, 4월), 에다님월(티즈리월이라고도 함: 왕상 8:2, 7월--현재의 10월) 등 거의 매월을 중요하게 지켰습니다.
“절기”(καιροὺς)는 유대인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레 23:4; 대하 8:13)과 또한 무교절(출 12:15-20), 나팔절(레 23:24), 부림절(에 9:24-32) 등이 있었습니다.
“해”(ἐνιαυτοὺς)는 매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출 23:11; 레 25:2-7)과 매 50년마다 맞이하는 희년(레 25:8-55; 27:17-24)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주시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를 기념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늘 기억하며 그를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의 지킴은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들이 왜 의미(significance)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지키고자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다만 불필요한 일일 따름입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러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지킴을 통하여서 유대인들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따라서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부득이함을 가져다 주고 열심이 있는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고 이 믿음과 함께 성령을 받는다(3:2)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 이외의 의식적(儀式的), 윤리적(倫理的), 율법적(律法的) 또는 규례적(規例的) 행위가 더 고상하며 우위에 있는 것처럼 판단되고 느껴질 때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서 떠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지 못하고 믿음이 깊어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도로 또한 심장(σπλάγχνον)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또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아는 것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더욱 앞서는 일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머리로 판단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받아들임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나 제삼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들의 가난한 삶이나 그들의 수고하고 땀흘린 노력이나 시간보다 적은 보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외치고 나름대로 말씀의 꼴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공급하는데,  막상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시큰둥하며 전혀 삶의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들을 안타깝게 하며 그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목회자나 선교사를 만족하는 행동을 할까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요, 다른 형태로 몽학선생 아래,  초등 학문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늘 생각하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성경은 율법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아신 바 된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성경이 수면제(睡眠劑)가 아니라 송이 꿀보다도 더 달고 오묘한 말씀으로 내 귀에 들릴 때,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하신 바가 되고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시는 역사가 내게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
갈라디아서를 포함한 그의 서신들에서 바울의 관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아직 가르침의 대상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이왕에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이라면 바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가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이 전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인정함과 구원함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사람으로서 그의 인정함이 삶 가운데 나타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사로잡히며 그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아닙니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의 타락이 바로 믿음 이외에 비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한 강조와 강요에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슬로건들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이, 우리의 율법 지킴이, 주일이나 부활절,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을 지킴이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신앙의 삶이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결과로 나온 자발적인 즐거움과 헌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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