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5, 2015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7-20)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7-20)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1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떤 집사님의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재물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바빠지면서 본의 아니게 주일예배를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늘어났습니다. 처음에 몇 번은 주일날에도 중요한 약속으로 사람을 만나야 하므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에는 죄짓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얼마간 빠지니까 이제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에 무감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매 주일날 예배드리는 사람만 기뻐하시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믿고 마음으로 섬기면 되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생각에서도 벗어나 그저 사업만 계속 번창하면 족할 것 같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목사님이 그 집사님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말 없이 벽난로(fire place) 가에 앉고 집사님도 맞은편에 앉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벽난로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서 장작 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곤 합니다. 목사님은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벽난로 옆에 있는 부젓가락을 집어 불 속의 석탄을 이리저리 헤쳐 놓고는, 붉은 빛을 띄며 잘 타고 있는 석탄 덩어리들 중에 하나를 끄집어내어 난로 밖에 끄집어 내놓습니다. 붉은 빛을 간직하던 그 석탄 덩이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붉은 빛을 잃어가더니 결국은 꺼지고 맙니다. 벽난로 안의 다른 석탄 덩어리들은 여전히 붉은 빛을 띄면서 활발하게 타고 있는데 말입니다. 목사님과 집사님은 난로 밖의 석탄 한 덩어리가 꺼져 가는 것을 침묵 속에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직도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는데, 집사님이 이윽고 입을 엽니다. “목사님이 제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나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저의 신앙의 삶을 되찾겠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세 가지로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너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너는 너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너는 너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실 권리가 있으신데,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것인 양 여기는 시간과 재물과 자녀의 실질적인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 소유를 경영하도록 위임받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경영할 때 우리의 일을 하듯이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할 수 있으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자녀가 선하고 유익한 일에 열심인 것을 보는 것만큼 흐뭇한 일을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가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을 보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성심으로 행합니다. 이 때 부모는 자식을 낳고 기른 모든 수고와 고생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그의 사랑스런 자녀가 잘못된 일에 빠져 있음을 볼 때, 부모는 그 자식을 위하여 또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하라고 해도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가 바른 행실과 진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불편과 수고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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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갈 4:19)라고 부를 정도로 그들을 자신의 영적인 자녀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고 좋은 일에 열심을 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율법의 부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7절: 저희가 너희를 내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바울은 그들의 열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심은 잘못된 복음--즉,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헷갈리게 하고 송두리째 뒤흔드는 열심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잘못된 열심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복음으로 맺어진 좋은 관계를 이간질하여 소원(疏遠)한 관계가 되게 하고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하고 이에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신문의 사회면에 실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선행이 내게 감동을 주고 좋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만일 나와 가까운 사람이 또는 나의 자녀가 선행의 주인공이라면 이는 나를 더욱 기분 좋고 신나게 만들 것입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자녀의 잘됨이 자신의 잘됨보다 더욱 기쁨으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나의 자녀가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봄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을 믿음의 자녀로 여기는 바울에게 그들이 믿음에 정진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전하는 일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열심히 감당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영적 부모로서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기쁘고 좋을 것입니다.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렇게 부름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매우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이나 책망도 받아들이게 하고자 함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서 형상화되기까지”(until Christ be formed in you, RSV)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이 나타나기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는데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는데,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은 그리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께서 그들 안에 역사하심을 그들로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어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날 때 이것이 그를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증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간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지나갈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탐닉하여 사는 모습들을 종종 우리 안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삶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바울이 편지에서 지적하는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세상의 것들에 지나치게 탐닉하여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믿음 이외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의로와질 수 있고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그들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왜 이것이 그들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을 수 없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합니까?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롬 8:4)를 이루지 못하여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불쌍히 여기시사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는데, 이를 떠나서 (부담을 느끼면서도)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아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때가 찬 경륜--인간 구원계획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잘 믿고 아는 것 같은데 기실은 잘 믿지 않고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시와 선하신 뜻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경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믿음과 경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 판단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로 믿고 예배드리려고 하여 왔습니다. 첫 수확의 일부분을 구분 없이 드린 가인의 제사가 그랬고, 물을 달라고 떼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을 세 번 치며 화를 내며 물을 공급한 모세가 그랬고,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집전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그랬고, 새 수레를 준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기고자 했던 다윗이 그랬고, 죽으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한다는 예수님을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만류하던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할례와 식사규례와 절기규례를 포함하여 율법을 더하고자 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이 아니요, 하나님을 위하지 않음이 아니요, 잘못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 받으심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모양으로 부득이함으로 되어지는 찬양과 경배는 원치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반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요구대로 경배 받으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이 믿음으로 인한 칭의와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음이외의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함으로 할례와 율법을 지킴이 잘못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례와 율법지킴을 자원함과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부득이함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그들 안에 갖기 시작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우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자로서 일생을 살면서 당하는 수고와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해산의 고통과 수고도 어렵지 않게 그 가운데 하나로 꼽힐 것입니다. 옛날에는 해산의 수고를 신이 주신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여섯 일곱의 자녀는 보통으로 생각하며 고통 중에 낳았는데 요즘 여인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고통당함을 거부하고 하나나 둘 이상을 낳지 않고자 합니다. 만일 해산하는 고통과 수고가 없다면, 아이를 네 다섯은 갖고 싶어하는 분들도 꽤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첫여인 하와의 범죄함이 없었다면 여인에게 해산하는 수고와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창 3:16 참조),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자녀를 하나님께 구하여서 갖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남자인데 “다시 너희(=갈라디아 교인들)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인간의 모든 수고 가운데 해산하는 수고가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는 그 번거로움과 고통이 큰 반면에 이 일이 이루어질 때 그 기쁨도 큽니다.
또한, 이방 전도자로서 바울이 감당하는 모든 수고가 해산하는 수고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즉,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함은 자기의 자녀를 생산하기 위한 것인데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함은 그 결과로 ‘믿음의 자녀’를 낳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전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믿음의 자녀를 생산하였었는데 그들이 믿음을 떠나서(믿음이외에 다른 것을 더함은 믿음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좇음으로 바울은 믿음의 자녀를 만들기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감당하여야 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은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부모로서 자녀를 야단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단을 칠 때 평상시의 표정과 목소리로 그리하면 보통의 자녀들은 지금 야단맞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자녀를 야단치는 부모는 표정을 바꾸고 음성도 부드러운 음성 대신에 엄한 음성으로 바꿉니다. 이렇게 함은 정말 원치는 않지만, 야단을 쳐서라도 바른 자녀로 양육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지금 떠나 있는 입장이지만 그가 믿음으로 해산하는 수고를 통하여 그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바른 믿음의 자녀가 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스럽고 번거로운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 번 더 감당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 안에 이루는 하나님의 축복 받는 자녀로 키우기 위하여는 때로는 짐짓 음성을 변하여서 그들을 야단치고 권고할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고자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복음을 무효화시키는 부득이한 할례와 율법지킴이 그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들린 까닭입니다. 또한 이러한 소식이 그의 마음을 상당히 아프게 하고 따라서 그들 가운데 행하여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를 줍니다.

3
바울에게서 참된 목회자상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녀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지금 갈라디아를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참된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려고 함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이 바른 진리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들을 위한 수고와 땀을 지금도 아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 참 목자의 가르침과 타이름을 들을 귀와 가슴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그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목회자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되고 선한 목자는 양 하나 하나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각 양의 사정과 형편, 장점과 단점을 알 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두를 아시는 것같이 안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양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사랑하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합니다.
바울 또한 예수님의 선하시고 참되신 목자상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하기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이 과연 그 (선한) 목자에게 속하였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음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6-2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참되고 선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목자를 알아보며, 그가 인도하는 길이 바른 길임을 믿고 항상 따라갑니다.
그리스도와 여러분 사이에 선하고 아름다운 목자와 성도의 관계가 항상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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