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8, 2015

“너희가 아들인고로” (갈 4:1-7)



“너희가 아들인고로” (갈 4:1-7)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1
10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면 그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발을 쳐놓고 그 뒤에서 신하들의 알현(謁見)을 받고 왕을 대신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며 판단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를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합니다. 왕의 나이가 성년이 되면 수렴청정을 거두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을 계속하고자 하여 대신들과 마찰을 빗기도 합니다. 왕이 20세가 넘어서도 어머니나 할머니에 의존적이어서 자기가 어떤 사안을 결정하고 판단 내리고자 하지 아니한다면 이 사람은 무능한 왕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왕으로서 자기의 고유 권한(權限)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어른이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는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재량이 주어지는 반면에 다른 의무와 부담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른이 된 사람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으며 자기의 의무와 부담을 이행하기 싫어서 자기의 어른 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의 생각과는 달리 어른이 되어서의 삶이 자유와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부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삶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후견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성년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없다면, 이 사람은 금치산자(禁治産者)나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고 삶의 상당 부분을 제한 당하게 됩니다.

크리스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내게 온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의 삶 가운데는 자유함과 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율법적인 것이 아닌 복음 증거자 또는 일꾼으로서의) 부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믿음 이전의 상태로 또는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하고자 않습니다.

      2
오늘 본문(4:1-7)은 지난 주 믿음이 오기 전과 온 후 대조(3:23-29)의 후속편입니다. 3장 23-29절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린 아이가 몽학선생 아래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인의 아들이지만 그가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해야하고 때로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는 몽학선생으로부터 꾸지람도 받고 심하면 회초리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에는 그리스도로 옷입게 되고 더 이상 그가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그의 자유와 기쁨 가운데 선택합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장성하여 주인의 아들로서의 권한이 온전히 보장되는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주인의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종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그가 막대한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미성년자로서 단돈 10불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부모의 허락과 지시를 받아야 하고, 부모의 부재중에는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허락과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인의 아들이지만 어릴 때에는 자유가 제한되고 어느 한 가지 자기 원함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합니다.

   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1-2절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주인과 그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재벌의 상속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어린 동안에는 상속자의 권한을 한 가지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사람은 종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권한이 유보되고 자기 임의의 판단 내림이 허락되어지지 않습니다.

   2절: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즉, 주인인 아버지가 아들이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후견인(guardians)이나 청지기(trustees) 아래에 둡니다.

아무리 똑똑하여 모든 것을 어른보다 더 판단을 잘 내린다고 하더라도 6살 난 꼬마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맡기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이 때에는 믿을 만한 후견인이나 청지기로 하여금 실질적 재산 상속자인 아들을 위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돕도록 합니다.

   3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이와 같이 우리도”라고 함은 “하나님의 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 세상을 살고 있던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경륜(經綸)의 때, 곧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서, 후견인과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자녀로 택하신 유대인들을 인도하고 지도하고 대신 판단을 내려주었었습니다.
그뿐아니라, 갈라디아인들을 포함한 이방 사람들은 헬라 철학이나 윤리 등의 영향 아래서 삶을 살아갔습니다.

골로새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 6-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등의 세상 초등 학문은 그리스도를 잘 섬기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으로 멀게 합니다.

   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차매”란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의 때가 이르매’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는 “때가 찬 경륜”--‘때가 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특권을 상실한 다음에 즉시 인간 구원계획을 마련하셨는데, 이는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상실한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때가 차기까지 비밀에 속한 사안이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인간구원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여자에게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로 인간이 상실한 토지를 무를 자(고엘)의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법칙에 자신도 순응하시는 분이신데, 구약시대에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자신의 토지나 기업을 상실하였을 때 이를 다시 사서 되찾게 해줄(=무를) 권한이 그 사람의 가까운 친척에게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가까운 친척이 되시고 이로써 사람들이 사단에게 넘겨준 토지를 되찾아주시려고 여자에게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율법 아래” 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 나심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5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 아래” 나심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아래 놓이게 되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주 아래 놓이시고 죽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원하시고 그들에게 아들의 특권을 주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한에 있어서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종이 주인을 섬기듯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멀리 계신 분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으로만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공생애를 사실 때에도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하나님은 다정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여전히 엄하고 무서운 상전이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전히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되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바라보게 하십니다. 두려움의 대상으로서가 친밀함의 대상으로서입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의 양자로 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6절: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때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로 우리에게 “아들 곧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계시고, 그 “아들의 영”이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αββα ὁ πατήρ)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로마서 8장 14-15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로마서 8장 16-17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라고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계속적으로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 후사가 되기 위해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야 합니다.

   7절: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람의 예로 말하면, 막대한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 말썽꾸러기 아들과 충직한 종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의 마음을 아들보다도 종이 훨씬 잘 헤아려 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하려고 하지 충직한 종에게 유업으로 물려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얼마만큼의 재물을 종에게 떼어주기는 합니다만 아들을 제끼고 그 종을 우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왕에게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더라도 자기의 왕위는 그 신하가 아닌 하나 뿐인 어린 망나니 아들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메섹 출신의 충직한 종 엘리에셀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지극히 큰 상급을 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아직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자조적(自嘲的)인 어조로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리 크고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아들이 없어서 유업으로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내게 이 충직한 엘리에셀이 있지만 그는 다만 종일 따름입니다. 해서, 나에게 허락하시는 많은 상급도 내게는 그렇게 큰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란 의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충직한 종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장차 태어날 자가 후사(後嗣)--그의 기업을 약속으로 적법하게 물려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유업을 이을 자 되게 하시는데, 이는 “약속대로”(3:29), 하나님의 적법한 “아들로서”(4:1, 7) 유업을 이을 자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3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놓여있었던 것같이 그들도 또한 헬라 철학이나 윤리 등의 세상 초등 학문에 놓였던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들 삶의 판단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양자됨도 아직은 그들에게 먼 일이요 하나님의 유업도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그들의 믿음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영으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대 미성년의 아들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누릴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인고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갈라디아 교인들인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로서 하나님의 양자됨과 유업을 이을 자됨을 포기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이는 무엇인가 하면, 갈라디아인들이 율법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허락되어졌던 아들로서의 자유와 권리와 유업을 포기하고 자신을 금치산자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아들로서 유업을 이을 상속자의 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의 영을 인도함을 받는 자에게만 계속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양자됨의 권리와 유업을 얻을 자가 되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다시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우리를 주관하던 세상 법칙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이것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또한 유업을 얻을 것의 보증되시는 성령의 역사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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