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8, 2015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갈 3:19-22)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갈 3:19-22)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준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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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복덕방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집이나 건물의 매매의 중개와 계약이 이루어지기 위한 공적인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노인들의 모임과 대화의 장소로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대개는 사고 파는 사람들이 믿고 거래하여왔기 때문에 복덕방 할아버지가 전문적인 매매 계약과 중개의 지식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복덕방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두 건 중간에서 계약을 성사시키고 그 계약의 증인으로서 중개료를 챙깁니다.
요즘은 중개사 시험을 합격하고 자격증을 얻은 공인중개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매매 중개와 계약의 일을 맡아서 하기 때문에 보다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자격증이 있는 중개사(certified realtor)가 이 일을 맡고 또 변호사(lawyer)를 두기도 합니다. 이는 중개사로 하여금 계약의 증인--중보(mediator)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내산에서 천사로부터(구약정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 20:1; 신 5:2 참조) 율법을 전해 받은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쌍방계약인 언약의 중보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중보는 계약이 공정히 성사되었음을 양쪽에 알리고 또한 이 쌍방이 계약의 의무를 공정히 이행하고 있음을 상대방에게 보고합니다.

언약의 한편인 하나님은 그 속성상 불변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계약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까닭은, 이스라엘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계약을 파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계약을 잘 이행할 때 그들을 더욱 더 크신 축복으로 축복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의롭다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심은 모세를 중보로 세우시고 시내산 계약을 맺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예를 따라 주시기로 약속하신 까닭입니다.
약속은 언약과는 달리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변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을 향하신 일방적인 축복의 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질되거나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그들의 행위 여하에 상관없이 성취되어질 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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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3:19-22)에서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들과 모세 등 중간 전달자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어질 때 하나님의 원래의 선하신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과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로 그들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고 따라서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고자 율법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율법 지킴으로 말미암아 살고자(=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주심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무엇이냐?”라고 함은 “율법 주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범법함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범법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바시스‘(παράβασις)는 불복종, 죄, 어김 등의 뜻인데,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의 표적을 빗마추는 생각과 삶‘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을 바로 헤아리지 못하고 하는 모든 것이 ’범죄‘--마음으로 짓는 죄를 포함하여--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여호와의 사자” 혹은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다음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가라사대”나 “여호와의 천사가 가라사대”라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대체되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장 2절에 호렙산 꼭대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습을 나타내신 이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했는데, 말씀을 증거할 때는 3장 4절 이하에서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명칭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천사나 사자를 보내시는데, 그의 나타남과 말씀함이 하나님의 나타남과 말씀하심을 대신하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가라사대’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가장 좁은 의미인 “십계명”을 모세에게 주시기 위하여, 출애굽기 19장 20장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하십니다. 그리고 20장 1절로부터 십계명을 주십니다. 신명기 5장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도 율법을 주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강림하신(=나타나신) 분에 관하여 “여호와의 천사”란 표현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 그 기록도 사실은 “천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천사들”(angels)이라고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다른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율법을 인간에게 주고자 하셨는데 그 율법의 제정과 전달을 일곱 천사들(Hebdomad)에게 위임하셨다고 합니다. 이 일곱 천사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율법을 만들고, 그들 중에 대표격인 천사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이를 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제정되고 전달된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사본에 따라서는 이 ‘천사들로 말미암음’의 구절이 빠져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근원에 대하여 조심하여 하나님 자신과 구분하고자 함은 혹시라도 율법의 제한성과 열등성을 말함이 온전하시고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께 누가 될까봐서입니다.

사도행전 7장 53절에서 스데반도 “너희가 천사들의 전한(헬라어는 ”제정한“의 의미가 더 강함) 율법을(한글 성경은 ”천사의“라고 단수로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τὸν νομὸν εἰς διαταγὰς ἀγγέλων“이라고 함으로써 복수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불어 말하던 천사(μετὰ τού ἀγγέλου)”라고 할 때, 이 천사는 단수로 표현하고 있씁니다. “천사”를 복수로 표현한 53절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스데반도 유대인의 다른 전승--즉,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율법을 제정하고, 그 중에 대표 천사가 시내산에 나타나 모세에게 율법을 전하여주었다”는--을 따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간자로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이 “시내산 언약”(Sinaitic Covenant)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효력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고 했는데, 이는 ‘율법을 주신 목적’과 상관이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이스라엘에 전하여준 천사들과 모세보다 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으매 율법은 그 내용상의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가장 잘 알게 하실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제정하고 전하여준 의문(儀文)인 율법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나 현재를 사는 우리의 경우, 율법의 의문(儀文)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하시는 분이 우리 속에 계신데,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앞에 갈라디아서 3장 2절과 5절에서 말씀한 대로 “듣고 믿은 자”는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약속하신 자손”이신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이신, ‘성령의 알게 하심으로’(요한 16:8 참조)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율법의 의문(儀文)이 더이상 따로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20절: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율법으로 말미암는 언약 관계에 들어가실 때, 이 언약 관계의 공정한 이행을 위해서 (천사들과) 모세가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에 전한 이 중개자 모세는 하나님과 인간 사에서 양쪽을 위하여 이 둘 간의 이해와 관심을 조정하고 보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19-20절에서 중보의 역할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표시하는 것도 이와 같이 첫 번째 분(=하나님)의 의도가 중보를 통하여 전하여지는 과정에서 약화되었든지 오해되어 분명히 전달되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원래의 선하신 뜻이 중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온전하고 바르게 전달되어지지 않음이 또한 율법의 제한성과 열등성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약속”은 중보 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갈 3:19; 또한 3:16 참조)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실 때, 이 그리스도는 (천사들이나) 모세와 같은 중보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전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육신으로) 나타나심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 14:8)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 14:9)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라고 함은 하나님은 중재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되 사람 편의 형편과 계약 이행여부에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자의(自意)로 약속(約束)을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사람들에게 알리심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의도를 온전하게 전하심입니다.

   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라고 바울은 질문합니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μὴ γένοιτο)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즉, 율법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중보의 손을 빌지 않고 친히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갈 3:16)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그와 그의 후손에게 민족과 땅과 복을 약속하시되(창 12:1-2) ‘가나안 일경을 그들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생긴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고 죄를 죄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약속들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요, 약속들에 어떤 조건들을 더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의 효력성은 율법의 시대를 지나서 ‘약속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갈 3:16)에 의하여 확인되고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가정법의 형식을 취함은,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그들을 능히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요 따라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만일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이는 약속들을 거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인 의미 또는 소극적인 긍정의 의미로 사용하는 반면에, 성경은 긍정적인 목적과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의 3장 8절에서는 “성경”(창 12:3, 18:18, 22:18)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22절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둠”으로 인하여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율법적) 행위로는 구원함을 얻을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이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의로 여기시겠다는 것이요(갈 3:8),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요(갈 3:8-9, 14),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요(갈 3:14),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요(갈 3:26, 4:5, 7),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갈 3:29, 4: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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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여기심이 되고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돌이켜 율법 아래로 들어가고자 함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입니까? 율법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사람의 (율법적인) 행위로는 의로와질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인데,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율법 아래로 들어감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년 이상 교회생활을 한 사람이 믿음이 없는 종교행위만을 계속할 때 이 사람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여도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사람이 되고,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따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풍성한 약속들을 받는 귀한 역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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