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9, 2014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4-21)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4-21)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랴?
 

1
서당에서 훈장님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자, 너희들 나를 따라 해봐라.”
그리고, 천자문을 읽어 나갑니다. ‘바람 풍(風)’ 자를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자신을 따라서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훈장님이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바담 풍風).“ 아이들도 큰 소리로 따라서 합니다: “바담 풍(風).” 훈장님은 “바람 풍(風)”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향하여 화가 납니다.
한 아이, 한 아이 시켜보지만, 하나 같이 “바담 풍(風)” 합니다.
회초리를 들고 “바람 풍(風)” 자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립니다.
몇몇 아이들이 참다 못하여 훈장님께 말합니다: “훈장님이 바담 풍(風), 바담 풍(風) 하셨잖아요?”
훈장님은 비로소 자신의 혀가 짧아서 “바람 풍(風)” 자를 “바담 풍(風)”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향하여 야단을 칠 때, “이 녀석들아, 나는 ‘바담 풍(風)’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실은 바람) 풍(風)’ 해야지”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잘못 발음하더라도, 아이들은 제대로 발음하기를 원하는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는 훈장님의 마음입니다.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에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빛(靑)은 쪽빛(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입니다.
이를 줄여서 흔히 “청출어람(靑出於藍)” 또는 출람(出藍)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쓰는 말입니다. 고사(古史) 가운데, ‘공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밀’의 스승이었으나, 몇 해 후에는 ‘이밀’의 학문이 ‘공번’을 앞질렀기에 공번은 자진하여 이밀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이 진보를 이루는 기본이요,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항상 그 모양으로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제자를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승은 ‘제자가 학문적으로 자기를 추월하여 앞질러 가는 것을 시기(猜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지만, 교인들 중에 그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더 기도 많이 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교인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교인들이 그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듣고, 크리스천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도리에 대해서 배우지만, 그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그러한 교인들은 그의 참 자랑꺼리가 됩니다.

2
오늘 본문은 1장 10절로부터 시작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한 문제의 결론 부분입니다.
14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내에서 갈림을 조장하고 분쟁을 일삼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지적한 것과,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  ‘젖을 먹는 어린아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풍자적으로 그들을 향해 ‘그래,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요하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는 자라’ ‘너희는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되, 우리는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하다’고 말한 그 모든 것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로 그리 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모두에게 영적인 아비의 심정으로 때로는 심한 말로 야단도 치고 권면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심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말을 함은, 사랑 없이 단지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함에 대한 화풀이가 아닙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지식을 전달하여주는 많은 선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아비는 아닙니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가정에서는 부모로부터, 학교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이 사회를 사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부모와 스승--“월급쟁이 스승”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스승은 부모와 같은 마음이요 입장입니다.
부모와 진정한 스승은 그 아이가 잘못을 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야단도 치며, 심하면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 아이를 지적하고, 야단치고, 때림이 그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음을 압니다.
오히려, 그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심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미운 아이에게는 떡 하나를 더 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한 대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월급쟁이 스승이나 삯군 목자는 세상의 학문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는 학생이, 교인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오면 따라오는 것이고, 말아도 그만입니다.
세상의 학문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지식의 전달자로서 가르쳤으니 그만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들이 듣고 따라오면 그들이 잘 되는 것이고, 안 듣고 안 따라오면 그들이 망하는 것이니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궂이 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육신의 아비는 아니지만 그들을 때로는 얼르고 때로는 야단을 침은 그가 그들의 영의 아비가 되기를 원한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처음 가르친 것이 바울이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 모두가 상급이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무엇을 본 받는 자 되라는 것입니까?
-그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가 이제까지 그의 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겼었던 모든 세상 것들을 분토(糞土)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 밭에 받아 열매를 맺되 풍성한 것으로 남기고,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청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 됨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그 생활모습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누지 않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울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17절에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my ways)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사도행전 16장 1-3절에 기록된 대로, 바울의 2차 전도여행때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인데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그에게 보내는 개인서신인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서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딤전 1:2)라, 또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 1:2)라고 부릅니다.

오늘 17절에서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고 바울의 가르침과 생각과 행사를 잘 알기에 디모데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어 바울을 본받는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18-19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驕慢)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바울을 비방하는 자가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육체의 약함을 지적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사도이면 왜 자기 육신의 병은 못 고치나?
그의 언변이 서툼을 비판합니다.
그의 편지는 제법 힘이 있는데, 말하는 것이 어찌 저 모양인가?
그의 사도권을 놓고 뒤에서 시비를 겁니다. 사도의 요건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따라 다니던 자이어야 하는데(행전 1:22 참고), 바울이 언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따라 다녔냐? 그는 사도가 아니라.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처음에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증거받은 자들이요, 바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은 사람이요, 바울이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일부입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바울을 적대시하고, 교만하여 그를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은 믿음이 조금 자라매 교만의 영이 그들을 주장한 것이며, 어떤 자들은 거짓 선생이 그들을 꾀이매 바울을 비방하고 그의 가르침과 행사를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바울의 마음이 아픕니다.

전에는 그들이 바울을 따르던 자들이었는데, 이제 드러내놓고 그를 비방함이 ‘바울이 어떻게 이곳에 다시 오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가서, ‘너희가 무슨 능력을 가졌기에 그리 말하는가?’ 알아보겠다고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치고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말을 앞세우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남의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서 음식을 열심히 준비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없네’, ‘솜씨가 없네’ 말합니다.
남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달란트로 최선을 다하여 교회 일을 감당하였는데, ‘뒷짐을 지고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어째 일을 그 모양으로 하였냐?’고 핀잔을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말로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잎사귀는 무성치 않더라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의 것입니다.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질문합니다.
“매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도,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아비된 바울이 바라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되고 교만한 언행에서 돌이켜서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분쟁과 분열보다는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을 말로 야단치고 매를 가하기 보다는 그들의 힘쓰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온유함과 위로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3
요즈음 크리스천들 가운데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도 나 때문이요, 교우가 필요한 것도 나 때문이요, 목회자가 필요한 것도 다만 나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이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접어두고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헤아려 알고자 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의 생명까지도 드려서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과 철학은 잊고,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그 결심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무성한 말들은 접어두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바울의 노력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주장으로 교회를 나누고 분쟁을 초래하는 일은 접어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원하는 바울의 희생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에는 초라하고 비방거리의 삶을 살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대한 사도로 기억되고 인정받고 있는 바울의 주님 사랑의 참 마음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풍자(諷刺)” (고전 4:6-13)


                   “바울의 풍자(諷刺)” (고전 4:6-13)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區別)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勸勉)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1
그리-스의 철학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큐니코스학파(Cynics=Cynic School)가 있습니다. 주전 5세기에서 4세기를 산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444?-371 BC)란 사람이 창시한 것인데, 영어로는 '시닉스(Cynics)'라 번역하고 한국말로는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데 냉소주의(冷笑主義) 철학자 그룹입니다. ‘큐니코스’란 이름은 원시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을 사는 그들을 두고 ‘개’(큐논=κυνόν, 혹은 κυνάριον)라고 경멸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견유학파’란 번역도 아마 ‘개똥철학을 논하는 사람들’ 정도로 경멸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 큐니코스학파(Cynics)에 속한 사람들 중에 디오게네스(Diogenes: 412-323 BC)란 사람이 유명합니다.
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과의 일화(逸話)가 또한 유명합니다.
디오게네스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통 속에서 거지같이 사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들어주리라.”고 대왕의 위엄을 갖추고 통 속의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때마침 햇볕을 쬐고있던 디오게네스는 그의 왕관과 화려한 의복과 위엄에 찬 알렉산더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귀찮다는 듯이 그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조금만 비켜 서주겠소?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이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들으며 경이감까지 듭니다: ‘이 자가 과연 내가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후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술회하였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알렉산더보다 56살이 더 많은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는 같은 해인 주전 323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선생들과 비교합니다.
사람들이 알기에, 목수의 아들이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당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독설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이 그들에게 견줄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심한 말씀을 합니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 16:23)하고 꾸짖으시며, 돈궤를 맡았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나를 어찌 팔 수가 있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대신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 13:27)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인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때로는 독설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권위가 있고, 상대방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약하고 넘어지기 쉬움을 그 앞에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학문이 없는 자요 비천한 자요 약한 자처럼 보이지만, 교만한 자를 꼼짝못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과 지혜가 하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에서 교만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특유의 풍자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개(=큐논)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호강 받는) 개보다 훨씬 못한 삶 가운데 있었습니다(“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3절]).

                                                                                       2
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란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본을 보였다”고 함은 자신을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처럼 낮추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 일을 감당함에 겸손한 자세로서 충성으로(=신뢰 받을만한 자로) 잘 감당해왔다는 뜻입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not to go beyond what is written [everything is to be weighed by what God has revealed in His Word], Berkeley Version)”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악에 빠지기 쉽고, 불순종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말씀의 판단자가 되어서 말씀의 경중(輕重)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어떤 것은 지켜야 하며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새깁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도 스스로 말씀 밖으로 넘어감으로써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는데,
이브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중함을 무시하고 스스로 그 말씀의 판단자가 됩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그 가운데 얼마간은 먹고 싶은 실과를 먹지 못하게 금하신 것에 대한 원망이 있고, 또 얼마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판단하고자 하는 교만이 들어있습니다.
이리할 때, 이브와 그 다음에 아담은 옛 뱀의 꾀임에 넘어갑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배워” 한 것은 바울과 아볼로의 주님을 위한 삶이 말씀에 따른 것이지 그 말씀을 벗어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마다 스스로 잘 난 사람이 많아 자신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잣대로 옆 사람을 판단하고,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하고,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나의 반대편에 있는 적(敵)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가는, 살고자 힘쓰는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한 모습을 배우라고 합니다. 그리하여서, 교회에 다툼이 없고 분열이 없고, 충성된 일군의 모습만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 말씀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What are you so puffed up about?, TLB)라고 함은 쉬운 표현으로 하면, "왜 그렇게 잘난 채 하느냐?“ ”네가 무엇이 그리 잘났느냐?“입니다.
“네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난 체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냐?”는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한 질문입니다. 너희들이 현재 갖고있는 것--구원(救援)이나 성령의 은사는 물론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꼐로부터 받지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갖고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스스로 만들어내어 소유한 것이 없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일이 꼬여 하는 일마다 실패(失敗)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더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은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이 그 사람의 행함이 옳고 완전하기 때문에 얻어집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은 또한 무엇입니까?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3장 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의 신앙적 상태는 아직도 젖먹이 어린아이, “육신에 속한 자”인데, 그 스스로는 이미 믿음의 높은 경지에 이른 자처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미 영의 양식을 포만(飽滿)할 정도로 먹어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미 성령의 은사를 다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더 이상 소유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임하실 때 그와 함께 판단하고, 다스리고, 영광 중에 존귀한 삶을 살 것인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고계신데, 따라서 5절에 말씀하는 “때가 이르기 전”인데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이것이 이러하고, 저것이 저러하다’고 판단하고 정죄하고자 합니다.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는 말씀을 자주 읽고 그 말씀을 갖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해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전혀 읽지 않거나 슬쩍 지나치는 눈으로 읽고 귀로 들은 사람은 말씀은 들은 것같지만, 오해하여 전혀 그 말씀과 부합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와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풍자(諷刺)의 시작입니다.
이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 왕노릇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너희가 참으로 왕노릇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바울과 아볼로--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왕노릇하고 있겠으니 그것이 사실이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왕노릇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충성된 일을 하면서도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니 아직은 그 때가 아니란 것입니다.

9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바울의 형편은 왕노릇 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어찌 보면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자의 모양같습니다.
사도(使徒)--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인 바울과 기타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높음 가운데 두셨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죽이기로 정하신 자같이, 높이심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가장 낮은 자의 말석에 두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인 바울 등을, 왕노릇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하는 일을 구경하고 판단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극장의 무대에 서서 관객들의 웃음꺼리가 되는 어릿광대나 콜로새움에서 맹수와 싸우다가 처참히 죽어가는 노예와 같이 뭇사람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그리스도의 때가 아니며, 성도들이 왕노릇 할 때가 이르지 아니한 것이 분명합니다.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연고(緣故)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모습은 미련하고--약하고--비천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지혜롭고--강하고--존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믿음이 없는 자나 적은 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침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바울 자신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함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이 감당하여야 할 일--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낮고 겸손한 자의 삶은 살지 않고, 바울이 이렇고 아볼로가 저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는 식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친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판단하여,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게바 에게라 나는 그리스도에게라 편가름이나 하고, 아직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지 않아 아직 성도들이 영광을 얻을 때가 아니며 존귀히 여김을 받을 때가 아닌데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기에 이렇게 말씀함입니다.

사람들 앞에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의 삶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만드시고, 사람들 앞에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의 모습이 되게 하십니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는 바울의 삶을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셔서 그리스도가 아직 이 세상에 임하지 아니하셨지만,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데, 바울이 사는 모양이 참으로 딱하고 때로는 한심하기까지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11-13절에서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서 둘째 가라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을 바울의 현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사람들 눈에)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이기에,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 증거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죽도록 충성하였는데도 이 세상에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귀와 영화와 권세자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손으로 일하며, 후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고, 마침내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버림받은 자같은 형편 속에서도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12절-13절에 “후욕(詬辱)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逼迫)을 당한즉 참고, 비방(誹謗)을 당한즉 권면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바울을 사로잡으실 때 이것도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부러 궁상맞고 비참한 삶을 자청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되시며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3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역(終着驛)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의 끝장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복음--좋은 소식(Good News)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세상의 기업에 충실하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소망 중에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지 않은 지금은 우리가 왕노릇 할 때가 아직 아닙니다.
스스로 높은 자가 되어서, 자고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남의 하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을 낮추며 ‘과연 내가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된 삶을 사는가?’ 살피고 그 일에 정진할 것입니다.
나의 모습이 부족하다고 하여서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지혜의 주님께 간구할 때, ‘그 일을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