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4-21)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랴?
|
1
서당에서 훈장님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자, 너희들 나를 따라 해봐라.”
그리고, 천자문을 읽어 나갑니다. ‘바람 풍(風)’ 자를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자신을 따라서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훈장님이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바담 풍風).“ 아이들도 큰 소리로 따라서 합니다: “바담 풍(風).” 훈장님은 “바람 풍(風)”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향하여 화가 납니다.
한 아이, 한 아이 시켜보지만, 하나 같이 “바담 풍(風)” 합니다.
회초리를 들고 “바람 풍(風)” 자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립니다.
몇몇 아이들이 참다 못하여 훈장님께 말합니다: “훈장님이 바담 풍(風), 바담 풍(風) 하셨잖아요?”
훈장님은 비로소 자신의 혀가 짧아서 “바람 풍(風)” 자를 “바담 풍(風)”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향하여 야단을 칠 때, “이 녀석들아, 나는 ‘바담 풍(風)’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실은 바람) 풍(風)’ 해야지”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잘못 발음하더라도, 아이들은 제대로 발음하기를 원하는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는 훈장님의 마음입니다.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에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빛(靑)은 쪽빛(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입니다.
이를 줄여서 흔히 “청출어람(靑出於藍)” 또는 출람(出藍)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쓰는 말입니다. 고사(古史) 가운데, ‘공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밀’의 스승이었으나, 몇 해 후에는 ‘이밀’의 학문이 ‘공번’을 앞질렀기에 공번은 자진하여 이밀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이 진보를 이루는 기본이요,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항상 그 모양으로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제자를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승은 ‘제자가 학문적으로 자기를 추월하여 앞질러 가는 것을 시기(猜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지만, 교인들 중에 그보다 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더 기도 많이 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신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교인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교인들이 그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듣고, 크리스천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도리에 대해서 배우지만, 그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그러한 교인들은 그의 참 자랑꺼리가 됩니다.
2
오늘 본문은 1장 10절로부터 시작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한 문제의 결론 부분입니다.
14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내에서 갈림을 조장하고 분쟁을 일삼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지적한 것과,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 ‘젖을 먹는 어린아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풍자적으로 그들을 향해 ‘그래, 너희는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요하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는 자라’ ‘너희는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되, 우리는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하다’고 말한 그 모든 것이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로 그리 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모두에게 영적인 아비의 심정으로 때로는 심한 말로 야단도 치고 권면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심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말을 함은, 사랑 없이 단지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함에 대한 화풀이가 아닙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지식을 전달하여주는 많은 선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아비는 아닙니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가정에서는 부모로부터, 학교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이 사회를 사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데, 부모와 스승--“월급쟁이 스승”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스승은 부모와 같은 마음이요 입장입니다.
부모와 진정한 스승은 그 아이가 잘못을 할 때 지적해주고, 때로는 야단도 치며, 심하면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 아이를 지적하고, 야단치고, 때림이 그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음을 압니다.
오히려, 그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심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미운 아이에게는 떡 하나를 더 주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매를 한 대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월급쟁이 스승이나 삯군 목자는 세상의 학문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는 학생이, 교인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오면 따라오는 것이고, 말아도 그만입니다.
세상의 학문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지식의 전달자로서 가르쳤으니 그만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들이 듣고 따라오면 그들이 잘 되는 것이고, 안 듣고 안 따라오면 그들이 망하는 것이니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궂이 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육신의 아비는 아니지만 그들을 때로는 얼르고 때로는 야단을 침은 그가 그들의 영의 아비가 되기를 원한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처음 가르친 것이 바울이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 모두가 상급이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무엇을 본 받는 자 되라는 것입니까?
-그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가 이제까지 그의 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겼었던 모든 세상 것들을 분토(糞土)만도 못한 것으로 여겨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 밭에 받아 열매를 맺되 풍성한 것으로 남기고, 영에 속한 자로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사모하는 그 마음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청하여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 됨을 본 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는 그 생활모습을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누지 않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바울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17절에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my ways)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사도행전 16장 1-3절에 기록된 대로, 바울의 2차 전도여행때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인데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그에게 보내는 개인서신인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서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딤전 1:2)라, 또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후 1:2)라고 부릅니다.
오늘 17절에서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고 바울의 가르침과 생각과 행사를 잘 알기에 디모데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어 바울을 본받는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18-19절에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驕慢)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바울을 비방하는 자가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육체의 약함을 지적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사도이면 왜 자기 육신의 병은 못 고치나?
그의 언변이 서툼을 비판합니다.
그의 편지는 제법 힘이 있는데, 말하는 것이 어찌 저 모양인가?
그의 사도권을 놓고 뒤에서 시비를 겁니다. 사도의 요건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따라 다니던 자이어야 하는데(행전 1:22 참고), 바울이 언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따라 다녔냐? 그는 사도가 아니라.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처음에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증거받은 자들이요, 바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은 사람이요, 바울이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일부입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바울을 적대시하고, 교만하여 그를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은 믿음이 조금 자라매 교만의 영이 그들을 주장한 것이며, 어떤 자들은 거짓 선생이 그들을 꾀이매 바울을 비방하고 그의 가르침과 행사를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바울의 마음이 아픕니다.
전에는 그들이 바울을 따르던 자들이었는데, 이제 드러내놓고 그를 비방함이 ‘바울이 어떻게 이곳에 다시 오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가서, ‘너희가 무슨 능력을 가졌기에 그리 말하는가?’ 알아보겠다고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치고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말을 앞세우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남의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서 음식을 열심히 준비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사람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없네’, ‘솜씨가 없네’ 말합니다.
남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달란트로 최선을 다하여 교회 일을 감당하였는데, ‘뒷짐을 지고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어째 일을 그 모양으로 하였냐?’고 핀잔을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말로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잎사귀는 무성치 않더라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의 것입니다.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질문합니다.
“매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도,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아비된 바울이 바라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되고 교만한 언행에서 돌이켜서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분쟁과 분열보다는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을 말로 야단치고 매를 가하기 보다는 그들의 힘쓰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온유함과 위로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3
요즈음 크리스천들 가운데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도 나 때문이요, 교우가 필요한 것도 나 때문이요, 목회자가 필요한 것도 다만 나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기적이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자기의 의견과 주장을 접어두고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헤아려 알고자 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의 생명까지도 드려서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과 철학은 잊고,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그 결심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무성한 말들은 접어두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바울의 노력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주장으로 교회를 나누고 분쟁을 초래하는 일은 접어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원하는 바울의 희생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에는 초라하고 비방거리의 삶을 살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대한 사도로 기억되고 인정받고 있는 바울의 주님 사랑의 참 마음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