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3, 2014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전 1:1-9)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전 1:1-9)    

                                                                             1
교회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배우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기쁘게 하며 사람에게 영광 돌리는 장소가 아니라, 회개함과 예배드리는 행위와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때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은 하나님 앞에 쏟아내어지지 않고 여전한데, 목사님의 세상적인 위로 몇 마디는 잠시 잠간의 위안은 될지언정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 나의 죄짐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고 하셨는데, 우리의 참 평안과 안식은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아직, 마음 속에는 음울하고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여전히 있는데 찬송을 부른들 기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들 은혜가 되지 못함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외식(外飾)을 보시며 마태복음 15장 7-9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깨달음이 오직 그 입술에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백도 입술과 머리에만 있기 때문에 마음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평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로는 ‘그렇지, 맞는 말씀이야’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기에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여기에 고린도 교회와 현대 교회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말씀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과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교회로 남아있었던 원인은 그들이 입술과 머리로만 믿고 마음과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뜨거움이 없으며 삶은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한 식민지였던 고린도는 그 당시 인구 50만명 내외의 대도시로 로마인, 헬라인, 동양계 인종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고린도는 상업, 무역의 중심지로 선원과 상인, 각종 직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이곳에는 아프로디테([그] 미의 여신=비너스[롬]) 신전이 상당수 있었으며 신전에는 창기들이 여사제로 일하면서 몸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의 도시명에서 파생된 단어인 ‘코린티아조마이(Κορινθιάζομαι: 고린도인처럼 행하다)’가 ‘음란을 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될 정도로 이 도시는 성적(性的)으로 문란(紊亂)하고, 불륜(不倫)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18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이 지방에 들르면서부터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과 행동의 성장(成長)은 더디기만 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라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이 교회의 사역을 이어갔지만 항상 문제가 있는 교회로 남아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그의 3차 전도여행 말기인 55년경에 에베소에서(고전 16:8)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바울은 그가 전해 듣거나 문의하여 알게된 고린도 교회의 기본 문제들을 인지하고, 교리와 예들로써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리들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권면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기에 앞서서 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함으로써 편지를 시작합니다. 또 그들 가운데 있는 좋은 것들--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은사에 부족함이 없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을 칭찬하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그들 가운데 있는 문제들에 관해서 지적합니다. 곧, 고린도 교회 내에 분당(分黨)이 있고, 그로 인한 분열(分裂)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들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나 이러한 갈림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2
1-3절에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문안인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습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에는 ‘명령을 전하는 자(messenger)’이외에 '제자(disciple)'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도로서 바울이 전하는 명령이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일--복음증거의 사명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로 사는 것, 부자로 사는 것을 자랑하는 교인은 많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교인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이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이를 귀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문안인사하는 ‘소스데네(Σωσθένης)’란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보면 ‘소스데네’란 이름의 사람이 고린도 지방에 있던 공회의 회당장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일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에베소에 와서 바울과 함께 이 편지를 쓰고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절에 소스데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람이 바울의 편지를 대서(代書)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를 더디오가 대서하였듯이(롬 16:22), 심한 안질로 글을 쓸 수 없던 바울을 대신하여 소스데네가 고린도전서를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변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무엇이 어떠해서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고, 무엇이 어떠해서 저 일을 할 수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정작 자기가 그 일 감당하지 못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바울보다 더 나쁜 형편과 여건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심한 안질로 고생한 것이 본래부터인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 후유증이요 그리스도를 만난 한 증거를 몸에 새겨두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몸의 장애요인과 그당시의 열악(劣惡)한 환경이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증거의 열정을 빼앗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신체적 장애 때문이 아니요, 환경이 나쁜 탓도 아니요, 시간이 없는 탓도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4-7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는 세상을 골고루 비추이는 햇빛과 같아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뿐아니라 분열과 변론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풍성하게 임하여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이미 임하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비추이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은혜를 거부한 까닭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선물이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줄 알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ἐν παντὶ λόγῳ καὶ πάσῃ γνώσει) 풍족함”이 있었습니다 구변이란 진리의 말씀 혹은 이를 위한 언변이란 뜻으로 고린도 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또 이에 대한 깨달음이 풍성하게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증거꺼리인 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과 방언 통역함--이 그들 가운데 부족함이 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믿는 맘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8절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기대(期待)요 소망(所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함은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사람들과 회계하실 것인데, 바울이 바라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셔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어둠 가운데 머물러있던 우리를 부르시어 은혜의 햇빛이 있는 밝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뿐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를 갖게 하십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를 갖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교제 갖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자로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다시 돌이켜 나의 세상 욕심에 이끌리어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온전히 교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것 보다는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성령의 값없는 선물도 세상의 자랑꺼리로 격하시켜서 교회의 다툼을 자초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미쁘신 분’이십니다.
‘미쁘시다’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ός)는 ‘믿음이 많다’(faithful)는 뜻으로 ‘신실하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미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이 항상 지키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믿을진데 그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고루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 그리고 이를 바로 전달할 수 있는 언변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여 성령의 많은 은사들이 부족함 없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다툼과 분열이 있고, 모범적인 교회이기 보다는 말썽이 많은 교회로 존재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에 서로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의 가진 바 세상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성령의 값없는 선물인 은사까지도 자랑꺼리로 여김이 문제입니다.
하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어진 것--방언도, 예언도, 지혜와 지식의 말씀도, 믿음도, 어떠한 구제나 희생도 주님 안에서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믿음과 성령의 은사가 아무리 많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는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에 오히려 부족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받은 은사도 많으나 이 세상 가운데서 자랑하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책망꺼리가 없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 또한 교린도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사랑은 없고, 무관심만 팽배합니다. 옆사람이 어떤 형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옆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면, 이는 그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험담(gossip)을 늘어놓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빛이 이제까지 함께 하여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고백한 사람이 모인 교회이기에 여러분 가운데 지속적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값없는 선물인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나타납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형제·자매의 연약함을 돌아보고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있는 교우와 함께 고통받고, 기쁨 중에 있는 교우와 함께 진정으로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의 바른 표현인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머리말

                                                              고린도전서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올리우신지도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2,000년 가까이 외쳐졌는데 세상은 지금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과연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지구 상의 10억이상의 인구가 크리스천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흐른 세월만큼이나, 늘어난 크리스천의 숫자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느껴지지 않음은 웬일인가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당(分黨)·분쟁(分爭)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4장).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은 게바에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목사파다 장로파다, 원로목사파다 담임목사파다 분파(分派)가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와 그리스도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도 장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직분인데 이로써 교회가 나뉘어야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 부자(富者)와 빈자(貧者)가 섞이지 못하고, 노인층과 청년층이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지식층과 비지식층의 관심이 다릅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그들의 관심과 화제는 온통 세상에 쏠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했다면, 대화의 단절이 없을 것이고, 관심이 다를 리 없을 터이요, 교회 안에 섞이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요, 허물지 못할 벽이 없을 터인데, 우리가 알기로 작정한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음행(淫行)과 송사(訟事)의 문제가 있었습니다(5-7장). 요즘 크리스천의 삶이 고린도 교인의 삶에서 더 나아졌습니까?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 보다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내세울 근거와 건덕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의 비윤리적인 사건의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을 강조하였기에 크리스천의 도덕과 윤리는 타락하여도 좋습니까? 오해(誤解)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자의 삶이 어떠할 것을 그의 서신마다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화(聖化)의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고(10:23-24 참조),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8-10장). 헬라 문화권에 살던 이방인들에게는 제우스상이, 아프로디테상이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와 북방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과 그의 후예들에게는 비록 ‘여호와’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금송아지가 우상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거민들의 신들--바알과 아세라, 그모스와 밀곰과 몰록 등이 우상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여전히 우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가 재물과 권력을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학문과 명예를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명 또는 두명의 ‘귀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을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 6:24).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7-38). 자본주의(資本主義) 경제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재물에 대한 추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지식 추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   
에게 자식 사랑함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물이나 학문이나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서 떠나 있다면 이는 우상숭배(偶像崇拜)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예배(公衆禮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1-14장).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 교회에 엄연히 존재하여야 할 질서의 무시(無視) 혹은 경시(輕視)가 교회를 소란케 합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은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개인의 전유물(專有物)인양 오용(誤用) 또는 남용(濫用)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신데 부릴 수 있는 영쯤으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전히 잘 사용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13장). 우리에게 제대로 된 하나님 사랑함과 이를 위한 이웃 사랑함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삶으로 주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예배의 형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사이버 교회와 사이버 예배가 유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이버 교인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리얼플레이어(real player) 혹은 다른 오디오-비디오(audio-video) 매체를 사용하여 사이버 목회자의 설교를 청취하며 인터넷으로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교제하고 친교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배와 찬양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며,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며 감동케 하시는 역사(役事)는 계속될 것입니다.

   부활(復活)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15장).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부활과 영생의 문제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축복받고 마음이 평안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몸으로 부활될 것은 어쩐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우리 믿음의 본질(本質)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장 14절(또한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말씀합니다. 몸으로의 부활이 없이 영혼만 영생함을 믿는다고 하면 이 또한 잘못된 부활-영생 신앙입니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 이단(異端)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몸으로의 부활을 믿지 않아서였습니다. 지금도 뉴에이지(New Age)라든가 그럴사한 가면을 쓰고 믿음을 말하지만 유사품(類似品)인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本質)을 오도(誤導) 또는 호도(糊塗)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募金)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6장).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을 구제하고, 영접하고, 돌아보고, 방문함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마태 25:34-40).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막상 주위 사람들을 대함에는 인색(吝嗇)함과 이기심(利己心)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구제(救濟)하고 희생(犧牲)은 하지만 사랑이 없이 행해서도 안될 일입니다(고전 13:3).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2,000년전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살펴봄이 21세기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은 동일한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교회들을 향하신 주님의 축복과 칭찬을 기대해 봅니다.

Sunday, February 9, 2014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서 16:21-27)

                                         “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서 16:21-27)


                                                                             1
1996년 8월 중국선교를 위한 모임에 참석차 영국에 갔을 때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영국의 교회건물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교인의 수는 20-30명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50-60명이 모이면 제법 큰 교회축에 듭니다.
자연, 교회에서 지급하는 목사님들의 월생활비도 적어 보통 700-800 파운드(미화로는 1150-1250불)에 불과하여 집세와 자동차세를 내고 나면 전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해서, 국가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보조를 주는데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사모님들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부러워하고 어떤 목사님들은 될 수 있으면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미국에 와서  미국교회를 목회하고 싶어합니다.

영국신학자들은 독일, 미국과 영국의 신학의 차이를 3C로 표현하였는데, 즉, 독일이 신학을 타락시키고(corrupting), 이를 이어받은 미국이 무너뜨리고(collapsing), 영국이 이를 고치고있다(correcting)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바로잡고있다는 나라의 교회가 여전히 침체의 늪을 헤매고있는 것은 그들이 말과 생각으로만 바로 잡고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교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끊임없는 변혁(reforming)을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잘못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말로는 바로잡고(correcting) 변혁한다(reforming)고 하면서 자신은 변화가 없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로마서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로마서의 전부가 믿음으로 인한 구원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교리부분을 설명함입니다. 로마서의 또 다른 중요한 나머지 부분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되어지는 과정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모습은 역동적(dynamic)인--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이 있으면서도 점진적(漸進的)으로 진보(進步)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제 늙어서, 나는 죽을병이 들어서, 나는 하나님께 갈 날이 가까워서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가겠노라 말하는 사람은 잘못된 믿음의 삶을 살고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면 이를수록, 주님 만날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모습은 더욱 더 변혁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씀합니다.

                                                                             2
본문 21-23절에서 바울은 현재 그와 함께 있는 동역자들의 안부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합니다.
21절에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Timothy)는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며 사랑한 그의 동역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것은 2차 전도여행 초기에 소아시아의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그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줄곧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디모데전·후서에서 알 수 있듯이 후에 디모데는 소아시아 에베소지방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바울은 이 디모데에게 선배 목회자로서 또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목회에 관한 소견과 비전을 권고합니다.
누기오(Lucius)는 바울이 아직 선교활동을 하기 전 안디옥교회에 머물 때 알던 사람인데(행전 13:1) 현재 바울과 같이 있습니다.
야손(Jason)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 지방의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만난 사람으로 바울에 대신하여 매까지 맞은 사람입니다.(행전 17:5-9)

22절에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바울을 위해 편지를 써주고 있는 더디오(Tertius)도 자신의 문안을 전합니다.
바울이 세 차례의 전도여행을 감당한 것은 그의 나이 50에서 62-3세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요즘은 한창 활동하는 나이이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인중에 노인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의 반에 해당하는 바울의 저서들은 그의 나이 60-70에 쓰여진 편지들입니다.
평안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쓰여진 편지들이 아니라 6편은 전도여행을 하는 도중에, 4편은 가택연금이나 구금의 상태에서, 나머지 3편 목회서신은 지하의 감옥에 쇠사슬로 묶인 상황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하나같이 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 써준 편지들입니다. 몸이 묶여있는 상태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바울의 눈이 시원치 않아서 거의 글을 쓸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바울은 몸에 여러 가지 불치의 병이 있어서 몸이 참으로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몸의 불편함과 노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함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스트로크(stroke)로 다리가 마비된 어느 미국인이 휠체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였습니다. 그가 동경에 이르렀을 때, 어느 목사님이 그에게 어떻게 그런 몸으로 세계일주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내가 비록 몸은 이와 같이 중풍병에 걸렸지만 내 마음은 중풍병자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멀쩡한 몸으로 중풍병자와 같이 마비된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감사를 감사로 여기지 않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맛보고도 감격함이 없을 때 이 사람은 마음에 중풍병을 앓는 사람이며 이런 마비된 마음으로는 주님의 선(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 날로 낡아지고 병듦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의 본향(本鄕)인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보일수록 더욱 더 새로와져야 할 것입니다.

23절에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Gaius)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Erastus)와 형제 구아도(Quartus)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서 보는 바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오직 두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가이오가 그 둘중 한 사람입니다.
가이오는 고린도 가정교회(House Church)의 주인으로서 바울과 자기 집에서 모이는 성도들을 위해서 음식으로 잘 대접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도,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도, 헌물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감당하든지 부득이함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것이며,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함으로 할 것입니다.

25-26절에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傳播)함은 영세(永世)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라.”
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Gospel)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입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good news)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될 수 없고 의로와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한 방법을 마련하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오래 전부터 때가 찬 경륜의 날이 이를 때까지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쉬임 없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약속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망 중에 이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 비밀은 다름아니라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민족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로와지고 하나님나라의 약속을 보증으로 얻은 시민들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또 1장 13-14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26절 후반부터 27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고 축복기도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시는 그 복음의 진리로 우리를 견고케 하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견고한 반석 위에 우리의 성화의 삶을 이루어나갈 때 이로서 우리는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말미암아’(διὰ)는 영어로는 ‘through(통하여)’로 번역되었는데 곧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나아갈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D. L. Moody)는, “회개(Repentance)는 마음의 변화로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마음이고, 회심(Conversion)은 삶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이고, 거듭남(Regeneration)은 성품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가슴이고, 의로와짐(Justification)은 상태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입장이고, 양자 됨(Adoption)은 가정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관계이고, 성화(Sanctification)는 봉사의 변화로서 하나님에로의 구분(區分)이고, 영화(Sanctification)는 장소의 변화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조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고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가슴으로, 새로운 입장으로, 새로운 관계로, 새로운 구분으로, 새로운 조건으로 발전적으로 변화하며 매 순간 하나님께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내에서 경계할 사람들” (로마서 16:17-20)

                                     “교회내에서 경계할 사람들” (로마서 16:17-20)


                                                                              1
우스개 소리입니다. 옛날에 공자님과 부처님과 예수님이 함께 소풍을 갔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연못에 어떤 청년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공자님은 그 장면을 보고서, “군자는 대로행인데 어찌하여 큰 길로 가지 않다가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라고 혀를 차고 책망하며 그냥 지나갑니다.
부처님은 “허허,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물에 빠져 고난당하는고? 업보로다” 하며 그냥 지나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윗저고리를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구해냈습니다. 이것이 생색내지않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신학적인 논쟁꺼리로서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믿음과 신본주의(神本主義)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높이에까지 우리 인간이 이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형편과 한계로까지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 인간의 성정(性情)을 닮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비슷한 그러나 우리 모다 약간 나은 존재를 마음 속에 그리고 그를 믿고 그에게 나의 문제 해결을 부탁합니다.
신본주의적인 믿음은 우리 인간과는 확연히 구분되어 홀로 존재하시는, 그 절대적이고 높이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신앙(信仰)이란 말 자체가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은 성경도 나의 편의(便宜)대로 나를 위해서 해석합니다.
신본주의적인 믿음은 성경을 해석하되 나를 합리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서 나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의식(罪意識)과 회개(悔改)가 약화되기 쉽습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연약한 존재인데 해서, 죄를 짓고 실수를 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구주로서의 예수님’의 의미는 그저 내가 약할 때에 어려울 때에 수퍼-맨(Superman)과 같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도와주고 구해주신 다음 사라지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나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인--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에 속한 세상사람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다음에는 나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헛맹세를 하고, 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의(信義)·성실(誠實)을 저버리고,  부당(不當)한 방법으로 이(利)를 취하고, 믿음없는 말을 계속한다면,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로마서 16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6절까지는 로마 교인들에게 로마에 있는 바울의 지난 날의 동역자들에게 문안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고, 오늘 본문 17-20절에서는 교회 내에 있는 거짓교사들--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무리들을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 21-27절에서는 편지를 쓸 때 바울과 같이 있는 현재의 동역자들의 문안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그의 편지의 취지(趣旨)를 요약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17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교훈(敎訓)’이란 바울이 이제까지 로마서에서 줄곧 말하여온 하나님의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났는데, 곧,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구원은 율법으로서도, 할례로서도, 또한 우리의 행함으로서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로 시작하여,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는 지체로서 교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땅끝을 향하여 복음증거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7절에서 바울이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그 교훈을 거스리는 거짓교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8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경고합니다.

또, 디모데전서 6장 3-5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敬虔)에 관한 교훈(敎訓)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辯論)과 언쟁(言爭)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妬忌)와 분쟁(分爭)과 훼방(毁謗)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腐敗)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敬虔)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장을 하지 않고, 세상사람의 변론(辯論)을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特徵)은 교회가 요동(搖動)하든 깨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믿음 없는 주장을 관철하여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 사람은 또 교회 내에서 ‘거치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거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의 원뜻은 ‘죄짓게 하다’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다’ ‘죄 가운데 빠지게 하다’입니다. 그밖에, ‘넘어지게 하다’ ‘마음을 상하게 하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즉, 이 거짓교사들은 자기만 믿음이 없고 죄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의 사람들도 믿음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고 해서 죄 가운데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9절 과 고린도전서 5장 6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있는 선한 행동은 본받기가 어려운데, 믿음없는 죄의 행동은 전파하는 힘이 매우 강합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단의 세력에 놓여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짓교사가 특정한 인물일 수도 있지만, 우리중 누구나가 어느 때에 이와같은 거짓교사의 역할을 하고있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인간의 정리(情理)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대신에 불신앙의 마음으로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회내에서 다른 교우들을 넘어지게하고 거치게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내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때, 바울은 이들과 대항하지 말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20-21절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말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辯論)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없는 말로 변론하고 분쟁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와 맞설 것이 아니라, 피하고 떠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와 맞서서 같이 변론하고 분쟁(分爭)하는 것이 어리석고 무익(無益)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迷惑)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로 기억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적으로 곤경을 치렀습니다.
그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에서 전도할 때,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의 무리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의 전도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뿐아니라, 그가 개척한 교회들에서도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그가 가르친 복음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주장을 가르침으로서 곤욕과 비방과 어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인간적으로 괴롭힌 사람들도 적지아니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20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破船)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고,
이중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다시 디모데후서 4:14-15에서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자기의 배만 섬기고”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입장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절에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순종함’이란 말은 15장 18, 31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순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파쿠오(ὺπακούω)는 아래(under)란 뜻의 훞(ὺπ)과 듣다(hear)란 뜻의 아쿠오(ἀκούω)의 합성어입니다. 해서, ‘순종하다’란 ‘아래에서 듣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즉, 겸손한 마음으로 듣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고 풀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안내자의 인도로 알프스산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꼭대기에 우뚝 서서 주변(周邊)을 돌아보려고 할 때에 안내자가 소리쳤습니다. “무릎을 꿇으세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갑니다.” 정상에 올랐다고 우쭐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려고 하다가 자신의 교만 때문에 떨어지기 쉽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30년 이상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노라 하는 사람은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선한 데 지혜롭다’는 뜻은 선한 일은 잘 분별하여서 이를 행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악한 데 미련하다’는 뜻은 악한 일에 관해서는 미련하고 약삭바르지 못하여서 이를 행하지 못함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남을 속이고 악을 행하는 데는 이력(履歷)이 나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에는 참으로 둔감합니다.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교회 내에서 분쟁을 피하고 여러분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자를 살피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를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이 분쟁을 일으키고 성도를 거치게 하는 일을 하고있지나 않는가 살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대신에 부지부식중에 나의 배만 섬기고 있는지, 공교하고 세상적인 말로 순진하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미혹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역설적(paradoxical)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부요한 자요, 세상에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는 자요, 세상에서 섬기는 자는 섬김을 받는 자요, 세상에서 잃는 자는 얻는 자요, 세상 일에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일에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우리가 힘 쓸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혹 손해가 있더라도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괴롭힌 사단을 여러분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經驗)할 것입니다.

“신실한 집주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로마서 16:3-5상)

                                 “신실한 집주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로마서 16:3-5상)

                                                                             1
예루살렘의 교회는 몇 천명이 모이던 대형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불리는 마리아의 집에서 120명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해진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 삼천 명이 (행전 2:41), 또한 오천 명이(행전 4:4) 더하여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교회사적으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2세기 말 이후에나 찾아볼 수 있으므로 아마도 큰 유대인 공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대형화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사도행전 8장과 12장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성도들을 흩으시어 각 곳으로 퍼져서 전도하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가정교회(House Church)들은 핍박이 심하던 시절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모임의 형태였는데, 한 지역에 모이는 성도들 중에 비교적 유여(裕餘)하거나 커다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의 집을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의 집을 예배나 기타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기에 마음이 넓고 손님대접을 잘 하는 성격의 사람이라야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가 커지기 전에 모였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전 12:12)도 가정교회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가정교회의 처음 시작은 자주(紫紬) 장사 루디아의 집(행전 16:40)에 있었고, 로마에서의 가정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롬 16:5; 고전 16:19)에 있었고, 라오디게아에서의 가정교회는 눔바의 집(골 4:15)에 있었고, 골로새에서의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집(몬 1:2)에 있었습니다. 지역이 비교적 넓은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갈 1:2) 이들 또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집들을 예배의 장소--가정교회--로 제공한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들도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와 동일한 것으로서 이들은 살벌한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 중에도 모이기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모여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에 교회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혁명 전보다 몇 십 배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거처를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집과 사역을 축복하셔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놀랍게 증가시키셨습니다.
현재 중국에 있는 교회의 형태 중에 삼자교회와 처소교회와 지하교회가 있는데, 삼자교회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로서 보통 몇 천명씩 모입니다. 전에는 어용적인 성격을 띈 것도 사실이지만 요즘은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한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이 삼자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변질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도 지하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북한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어서 그곳에서 예배도 드리는 것 같지만, 그곳은 참된 의미에서 교회라고 불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이순옥씨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간증집회도 하는데 2002년도 미의회 증언에서 ‘많은 북한주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나 환경의 제약 때문에 단지 마음속으로만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는 지하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그러한 지하활동을 단속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북한의 교회들을 지하교회라고 부른다면 그에 대한 정의는 바뀌어야 될 것입니다. 교회는 3명 또는 그 이상의 신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단 한 명만으로도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나 폐쇄된 국가에서의 가정교회의 역할은 순수한 복음의 고수였습니다.
현대교회에서의 가정교회에 해당하는 구역의 역할은 우리의 믿음과 말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진솔하게 다지고 확인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 주위에 있는 부부 중에 대표적으로 신앙의 본을 보인 부부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그들은 원래 로마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킬 때 고린도로 이주해왔습니다.
그들이 처음 바울을 만나게 된 일이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도 바울과 같이 장막을 깁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쉽게 친하여지게 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 로마에 있을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후에 로마서를 쓰게 된 것도 아마도 이들과의 인연과 이들을 통하여 로마에 있던 성도들의 사정을 들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동역하면서 바울을 위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에베소로 옮겨가 그곳에서 아볼로를 만나고 아볼로를 데려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가르치고 믿음의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제 이대 목회자가 되게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로마에서의 유대인 추방령이 해제되었을 때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자기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였고, 그 뒤에 바울의 말년에는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기록된 대로 에베소에 머물면서 디모데의 목회를 돕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6장 3-5절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할 때는 로마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고 있을 때입니다.

3절: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는 개인적으로 ‘동역자’(co-worker)란 말을 좋아합니다. 교회의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는 여럿이 협력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목회자와 교우들의 동역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4절: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저 바울의 형식적인 ‘동역자’(co-worker)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바울을 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맞기도 많이 하고, 갇히기도 많이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위험 가운데 바울과 함께 하기를 원하며 바울은 위험에서 구하고 그들 자신을 위험에 놓기를 자처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에게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다른 교회들에게도 그들의 긍휼과 관용의 마음으로 은혜를 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서 이방인의 교회들이 그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5절상: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전문 목회자도 아니었고 어느 교회가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주님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형편 가운데 전도하고 자기들에게 허락된 공간을 가정교회로 내어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 이들 말고 또 압비아와 빌레몬의 부부가 골로새의 자기의 집을 성도들을 위하여 내놓은 것이 언급되는데,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부부가 함께 협력하고 봉사하고 주님을 위할 때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으로 전도의 상당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희생과 헌신이 현대교회들의 구역, 속, 목장, 셀(cell) 또는 가정교회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는 모든 소그룹의 모델입니다.
구역은 사실 가정에서 모일 수만 있다면 가정에서 모이는 것이 더 열린 마음의 장소와 시간이 되기 때문에 좋지만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제약상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모이든지 교회에서 모이든지 구역은 구역원들에게 한 주간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한 공동체의 지체임이 느껴지는 곳. 가슴 답답했던 쓰라린 일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모두가 내 아픔처럼 함께 손잡고 기도함으로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고 함께 나누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 곳. 주님의 살아 계심과 환난 중에 역사하심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확인되고 생활 가운데 체험되어 서로의 입술을 통해 간증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이 가장 큰 행복이요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장이나 속장이 말씀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말씀을 인도하는 일은 구역인도자가 하고, 구역장은 구역의 행정적 문제와 영적인 관리의 일을 감당합니다.
구역장은 구역의 행정적-영적인 관리자요, 파수군이요, 또한 신앙적 지도자입니다.

구역장은 보통 한 구역에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 구역원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이나 질문들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구역원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즐기는 사람, 전화로 심방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역장은 구역을 열린 대화의 광장으로, 신앙의 초보에 있는 사람에게 배움을 제공하는 장소로, 자칫 냉랭할 수 있는 교회를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장소로 만드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구역은 교회를 성장케 하며 지탱시키는 작은 교회입니다. 이 구역들이 건강하여야지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역이 부흥되어야지만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역부흥의 일차적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구역장들과 구역인도자들인데 각 구역장은 구역을 위해서 특별히 더욱 헌신되어진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역 성장과 교회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서 더욱 믿음의 좋은 본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동역자들” (로마서 16:1-16)

                                            “바울의 동역자들” (로마서 16:1-16)


                                                                           1
아직 한국 신학교는 그렇지 않지만 미국 신학교에 들어서면 금방 느낄 수 있는 것은 여학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프린스턴신학교를 다닐 때에도 여학생 수가 반 가까이 되었는데 지금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치 않는 극보수(極保守)의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학교의 여학생 수가 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남자들 가운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수가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미국 교계지도자는, ‘남자 목사님들이 떠난 자리를 여자 목사님들로 채울 수밖에 없는 실정인데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가는 남자 목사님들의 품귀현상까지 생길 것’이라고 심각한 우려(憂慮)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남자 목사님이 절대적 다수를 이루고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의 뜻이 쉽게 공감되지 않지만, 최근들어 여러 미국교회를 방문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미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자목 사님들은 거의 전부 부목사이거나 음악목사였는데 요즈음은 상당수의 담임목회를 하고있는 여자 목사님들을 발견합니다. 남자 목사님들이 목회현장을 떠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이 목회사역에서 목사로서 느끼는 보람은 줄어들고 대신에 평신도들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불화, 또 이로 인한 압박감등으로 목회를 중도포기하는 목사님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브루스 모힌리 목사님의 소설 “목사님 설교가 아주 신선해졌어요”(원제: Preaching with Freshness)에 등장하는 폴 앤드루스(Paul Andrews)목사는 한 교회에서 10년을 목회한 목사인데 최근 들어 여러 가지로 압박감(pressure)을 느낍니다. 그가 교회에서 하는 일들 하나 하나가 반대에 부딪히고 그위에 가장 그를 짖누르는 것은 그의 설교가 ‘시원치 않다’는 불평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를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청빙에 앞장섰던 사람까지 자기가 실수를 하였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폴목사는 ‘지난 10년동안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남이 알게 모르게 구석구석의 작은 일까지 감당했는데’ 하며 교인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던 중 폴목사는 그동안 찾지않던 신학교에 들를 기회를 얻게 되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의 설교학 스승 비커슨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후 비커슨교수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폴목사는 목회자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에 대해서 설명을 듣습니다.
폴목사는 그의 은사에게 교인들이 목사로서 그에게 바라는 일--곧, 그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이야기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제가 시내를 지나서 병원 심방을 해주기를 원하고, 집으로 심방해 주기를 원하고, 운영위원회를 주관하고, 교회행정 사무를 작은 일까지 처리하고, 지역사회 일들에 봉사하는 일 등등 그 모든 일들을 다 제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커슨교수는 그에게 권면할 때, 사도행전 6장 2절과 4절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우리는 기도(祈禱)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에서 낙담(落膽)하고 기진(氣盡)하는 까닭은 혼자서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감당하기 때문에 정작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은 등한시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일을 분담하기 위해서 직분자를 세운 것처럼 이러한 일들을 과감히 교인들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생각에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대로 놔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할 일이란 기도와 말씀 전함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비커슨교수는 폴목사에게 “설교는 목사의 고귀한(high) 부르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적인(whole) 부르심이라네. 설교는 목사의 전체 일이라네” 말씀합니다.
그는 이후 교회의 행정과 봉사의 일은 놔두고 기도와 설교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작정합니다. 그가 생각할 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던 것이 현실화되어 더많은 교인들이 봉사와 구제의 일에 참여하고, 그는 더 능력있고 신선한 설교를 하게 됨으로서 목회자의 위기를 넘깁니다.
교회의 발전과 성장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갈등하고 반목할 때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큰 일--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말씀의 꼴을 준비하기에 전념하고,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자신들을 목회자의 동역자(co-workers)로 여기고 목회자를 도와 목회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목사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구제와 봉사의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2
바울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목회와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위에 그를 돕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예와 같이 그의 목회가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낙담과 좌절가운데 빠지지 않았던 것은 실패할 때에도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돋우워줄 목회의 말없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꾼을 부르심에는 각각 그 받은 은사대로 다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권면의 일로, 어떤 사람은 구제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자상하게 현재 로마에 거주하고있는 그와 고난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던 복음의 동역자들과 말없이 그의 선교사역을 지원했던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게중에는 바울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도운 것은 그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기에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돕고자 함이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먼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갖고 갈 뵈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한 돈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가므로 그의 편지는 뵈뵈 편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하고자 함입니다. 뵈뵈가 “겐그레아(Cenchreae) 교회의 일꾼”으로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 겐그레아(Cenchreae)라는 지명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에 들러 서원함이 있어 머리를 깎았던 곳으로 아가야지방 고린도의 옆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바울이 현재 3차여행의 말기에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쓰고있다고 추정되므로 아마 고린도와 겐그레아를 통털어 뵈뵈가 가장 편지 전달하기에 적격자라고 판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가 이 일을 자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서로 이웃한 나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여자의 몸으로서 이와같은 여행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바울이 그에게 편지전달의 일을 맡긴 것은 그만큼 뵈뵈가 책임감이 있고 믿을만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우리에게까지 읽혀지는 것으로 보아 뵈뵈는 이 일을 잘 감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천거할 때에 2절에 보니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칭찬입니까?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뵈뵈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과 다른 크리스찬들을 숨겨주고 보호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3절이하에서 바울은 현재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지난 날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3-4절에서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이 처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 것은 6-7년전 2차 전도여행중 그가 현재 머물고있는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원래부터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로마황제 글라우디우스(Claudius)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고린도로 왔고 바울처럼 그들도 장막을 만드는 직종을 가진 까닭에 가까운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 후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도 교회를 위해서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26에 있는 바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또한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볼로라는 청년을 보고는 그를 데려다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침으로서 장차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뒤를 잇는 훌륭한 목회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합니다.
이제 로마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잠잠해짐에 그들은 로마로 돌아갔지만, 바울은 그들과의 사귐과 동역함이 늘 감사하던 터에 그 마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놓을만큼 그를 위해서 헌신·봉사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5절에 바울은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네도의 이름은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해서, 그가 어떻게 바울의 사역을 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절을 통하여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10년여전 소아시아에서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에베네도를 만나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는 이를 받아드렸습니다. 이제 그가 로마에 거주하고있는 것을 바울이 알고있는 것으로 보아 에베네도가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인 이후에 줄곧 바울을 도아왔고 그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한 것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이제까지 좋은 신앙의 삶을 살고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6절에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말씀합니다.
성경에 마리아란 이름이 많이 등장하여 이 마리아가 누구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짐작컨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일 것입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곳에 널찍한 집을 한 채 갖고있었는데 이곳은 초대교인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었습니다.
                                                   
그집이 넓어서 사도행전 1장에 보는 대로 그 다락방에서 120명의 문도(門徒)가 모여서 기도에 전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이후로도 계속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바울도 마가와 사귐이 있어 이곳에 종종 들렸을터인데, 이 마리아가 지금은 로마에 머물고 있습니다.

7절에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안드로니고는 남자이고 유니아는 여자인데 이들은 육체로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그들은 다른 사도들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바울보다 먼저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로서 그들 뒤에 그리스도를 믿은 바울을 열심히 도운 사람들입니다.

8절이하에서 15절까지 계속하여 바울은 크고 작은 일에 그를 도운 사람들을 일일히 소개하고 열거합니다.
“주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8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9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10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버시(12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12절)”라 함으로 길고 짧은 수식어와 함께 그들에게 문안을 전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름과 함께 자신의 행적이 들어남이 좋은 일인 듯 합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와 후세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과 치적이 들어나야 세상을 산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가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했던 사도보다 전도자보다 목회자보다 하나님의 칭찬이 더 큰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감사하는 생을 살고 갔더니 주님께서는 그를 어떤 유명한 목사보다도 더 큰 상급으로 칭찬하시고 가까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이 세상에서 나의 한 일에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칭찬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특별한 달란트가 없어서 교회와 목회자를 도울 수 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를 위한 기도, 전등 불을 끄는 것, 의자를 하나 접는 것, 말씀을 깨달아 이웃에게 전도하는 것, 이 모두가 동역자로서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천 신문에 어떤 목사님이 그분의 교회의 한 권사님에 대한 글을 실음으로서 성도에 대한 자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소개함에 “물 권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권사님이 목사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성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매주일 물컵을 준비함으로써 목사님의 설교를 돕는 일을 하셨는데, 목사님이 식상할까봐 한 주일은 보리차로 또 다른 주일은 옥수수차로, 또 다른 주일은 무슨 차로 메뉴를 바꾸어가며 준비하였는데 그 권사님의 정성이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고 해서 목사님은 매 주일 신명나게 설교한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모양으로 교회와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고 계십니까?
생색이 안나고 궂은 일일지라도 열심과 정성으로 목회자와 함께 협력 목회를 하시는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의 바람” (로마서 15:22-29)

                                           “선교사로서 바울의 바람” (로마서 15:22-29)

                                                                              1
1990년대 초에 구(舊) 소련연방(the Soviet Union: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무너져 내리고 한국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 많은 러시아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러시아에 러시아정교(Russian Orthodox)가 있었지만, 그곳에는 말씀을 증거하는 예배가 없었기에 새로운 형태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찬송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의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해서, 천 명이상 모이는 교회들이 이곳저곳에 생겨났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러시아인들이 빵을 구하기 힘들었을 때 교회를 찾으면 빵을 얻을 수 있었기에 찾았던 것이며,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와 찬송에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빵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한 가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러시아인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하여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들’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까레이스키’-‘고려인’이란 이름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에 극심한 가난을 피하여 구 러시아의 연해주로 한인(韓人) 13가구가 이주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국의 동포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구 소련지역의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처음에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에 몰려 살았는데, 스탈린(Joseph V. Stalin, 1879-1953)이 정권을 잡고 있던 1937년 9월, 러시아 극동지방의 한인들이 일본과 내통하고 일본을 지지할 것이라는 이유로 강제 이주를 결정한 지 단 두 달 만에 18만여 명을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 중간 중간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강제 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 천신만고 끝에 자리를 잡았는가 했는데 이 지역에 새로 현지 민족에 의한 이슬람공화국들이 들어서면서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강요당하는 바람에 다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해서, 그들은 구(舊) 소련연방이 무너져 내린 다음에 다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히 많은 수가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도시들로 옮겨와 살고자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그들에게 쉽사리 시민권을 주지 않고 있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 20만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 명, 타지키스탄에 1만 5천 명 정도가 살고 있고, 우크라이나에 1만여 명, 그리고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에 11만여 명 등 45-50만 명가량이 구소련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고달프고 불안정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얼마를 그들을 무시하는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구소련 공화국들-지금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공화국들에 한인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200-300개 교회들에서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을 위한 예배가 러시아어로 드려지는데, 90-95% 가량의 교회들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고려인들을 사용한 통역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5년 러시아를 방문하는 동안 두 차례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을 위한 예배에서 설교를 할 기회를 가졌었는데, 한 번은 빼쩨르부르그에서 다른 한 번은 블라디보스톡 공항 근처의 도시인 아르쫌에서였는데 두 번 모두 교인들 가운데 고려인이 통역을 맡았습니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교회들에서 고려인들에 의한 통역예배가 전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의 구소련에서의 삶은 참으로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의 도구로 또한 한인선교사들과 러시아인들 또는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공화국인들을 연결하는 다리로 축복하고 계십니다.      

                                                                                 2
22-24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한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22-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로마방문의 원함과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자 여러 번 원했지만 다른 사정으로 말미암아 갈 수 없었습니다. 현재 삼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지방인 아가야의 한 도시 고린도에 머물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모금이 완수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이곳 아가야에 있을 필요가 없음(23절)을 말합니다.
그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한 다음에는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서바나(=Spain)로 가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19절에서 보는 바대로 그리-스 반도의 북서쪽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땅끝보다 더 먼 땅끝인 서바나까지 갈 계획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을 맡은 자의 나아갈 곳이 어디까지인가 우리에게 가르쳐줌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는 평안함 가운데 현재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얻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25-26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예루살렘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년씩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데다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주는 구제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어있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박해가 심하여 숨어 다니다가 보니까 자연 굶주림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지역에서 그의 대부분의 날을 보내지만 그 마음 속에 늘 그의 동포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별로 반기지 않지만 그는 자기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가슴속이 사무치도록 그들을 사랑합니다.
자신은 장막 만드는 일을 감당하며 때로는 배를 곯으며 살아가면서도 교회들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지만 예루살렘의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모금 캠페인을 벌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전도여행의 삶입니다. 제 일차 전도여행은 소아시아를 다니며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제 이차 전도여행은 그리-스 반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제 삼차 전도여행은 전도목적과 함께 일 이차 전도여행지였던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두루 다니면서 그가 이삼년에 걸쳐서 몇 차례의 편지를 띄우면서 당부해왔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금을 부탁한 돈을 수금하러 다녔습니다. 그가 직접 돈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신뢰성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수금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을 불우이웃인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그의 주요 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 돕는 일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9-10절에서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여 실천합니다.
해서, 고린도전서 16장 1-4절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어떤 방안을 마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매주 이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한 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신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서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이 말씀한 대로 매주 구제헌금을 떼어놓았는데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바울은 다른 편지인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이 구제헌금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2-14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케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고린도후서 9장 7-8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에게 백만 불이 생긴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질문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흔히 그중에 10-20만 불쯤은 교회를 위해서, 또 다른 10-20만 불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60-70만 불쯤 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수중에 갖고 있는 여유 돈 5만 불 중에 5천 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냐고 하면, 이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그걸 나눠줘?”

27절: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7절에 ‘저희’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고 ‘그들’이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진 빚이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이 유대인들로 말미암고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사실을 말합니다.
‘그들의 신령한 것’이란 좋은 소식-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복음을 나눠받아 이제 영생을 얻은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물질로 그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그의 주요서신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經濟原理)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평균의 적당한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로서 내려주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출애굽기 16:18)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의 삶도 평균의 경제원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 입을 것과 다른 쓸 것들을 서로 통용하였다(행전 2:44-47)고 했는데, 그들이 나눈 물건들은 그들의 창고를 일단 꽉꽉 채우고도 남은, 더 이상 두면 썩을 것을 나눈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외하고 모두 나누어주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는 바울에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병 2어의 기적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따라온 아이가 자기의 점심으로 준비한 어른 한 사람의 식사로도 오히려 부족한 양이었지만 이를 떼어 나눌 때 커다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기적은 우리의 계산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할 때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업을 감당한다고 하는 어떤 교회나 어떤 기관은 모으기는 잘하지만 나누어줄 줄은 전혀 모릅니다. 해서, 매년 은행에 몇 만 불, 몇 십만 불을 잔고로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업을 잘 감당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나 교회에 속한 기관의 일 년 예산은 거두어들인 만큼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평균의 경제원리를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전건축 목적이외에 달리 비축할 이유가 없는데도 교회나 기관이 무용(無用)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돈을 비축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을 바라봄에서 안전함을 찾고자함입니다.
마음을 든든히 하기 위하여 몇 십 만 불씩 은행에 채워두고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면서도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 저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찌 여기시겠습니까?
                                                   
29절: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9절에서 “충만한 축복”을 갖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갈 것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1절에서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한다”고 표현했는데, “무슨 신령한 은사”나 “충만한 축복”이라 말씀한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꺼리일 것입니다. 이를 로마의 성도들과 함께 나눔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바울은 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마음은 비장(悲壯)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가 모금한 돈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는 있을 것인가?
이러한 그의 심정을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이하를 읽을 때에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소아시아의 한 곳 에베소에 들른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할 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結縛)과 환난(患難)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3
선교사로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의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성도의 삶은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유여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함이 물질적인 것을 나누고자 함이며 그의 동포인 유대인들에게 복음 증거할 기회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면, 그가 로마에 가기를 원함은 무슨 충만한 축복이나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어떻게 그를 견고케 하시며 위로하셨으며,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를 보호하시고 피하게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약한 그를 사용하셔서 어떻게 복음증거의 사명을 해나가게 하셨는지 증거하고 나누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은 서바나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서바나에 가기를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명하신 바와 같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의 감옥에서 놓임을 받은 바울은 그가 소원한 대로 서바나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고 다시 로마에 돌아온 후에 붙잡혀 콜로세움에서 처형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기도하고 소망한 대로 하나님의 귀히 쓰임을 받은 복음전도의 일꾼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여러분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 가운데 얼마를 예배통역자로 구소련 복음화를 위한 다리로 사용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와 선교, 복음 증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하여 자원함과 기도함과 소망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 (로마서 15:14-21)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 (로마서 15:14-21)


                                                                           1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의 세계는 신의성실(信義誠實)의 윤리가 참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가정과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다 마땅히 지키면서 살아나가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알 것인데,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다른 사람보다 잘 되기 위하여 이 모든 도리를 저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욱 개탄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이를 전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나야할 기독교 윤리가 무시된채 행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교회 교인들을 가만히 빼앗아 가고, 자기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는 다른 교회를 무시하고 비방하는 일을 서슴없이 감행합니다.

                                                                           2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가, 선교에 대한 그의 생각이 무엇인가 말씀합니다. 1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믿음 안에서 격려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마땅히 이러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인데, 곧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선함이 가득한 자가 될 것이며,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서 서로 돌아보아 권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감당하고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운데 이런 일들이 유대인들뿐아니라 이방인들사이에서도 넘쳐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6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취하여서 피는 단 사면에 뿌리고 짐승의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을 불살라서 화제(火祭)로 드렸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화목제물이었습니다.(레위기 3장)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의 직무를 이에 비교하여 “이방인과 하나님 간의 화목을 이루게 하는 제사장”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화목제물이 소나 양이나 염소였는데 신약시대에는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제물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이미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림”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했습니다. 곧, 우리의 전 인격을, 삶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드릴 때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질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며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후반에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한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고 하나님의 기뻐받으시는 삶이란 뜻입니다.

17-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자랑꺼리를 말씀하는데,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설교와 가르침이요 “일”이란 그가 이 복음증거를 위해 드린 고난과 수고의 행적입니다.

바울은 그의 나이 36-7세쯤 다메색으로 가는 길에서 빛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래 70세쯤에 콜로새움에서 처형되기까지 30여년동안 그의 발을 아끼지 않고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로 다니면서 복음증거의 수고를 잘 감당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말씀한 대로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30여년 고되지만 즐거운 행보로 복음을 증거할 때, 많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나타났는데 바울은 이를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서 자신의 능력많음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이방 가운데 퍼짐을 기뻐하고 그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 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랑은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며,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바울에게 남들이 따라오지 못 할 철학이 있고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바울이 알고 자랑하기를 원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만”(고전 2:2) 이었습니다.

19절에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가운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이방의 세계에 퍼져나갑니다.
일루리곤은 그리-스 반도 북서쪽의 지명인데 그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으로서는 땅 끝에 해당되리마치 예루살렘에서 먼 곳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임하시고 그를 도우실 때, 그는 이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20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기존 교회들 가운데, 특히 한인교회들에서 잘못된 모습은 “교인 빼앗아 가기-빼앗아 오기”입니다.
이를 위하여서 서로 교회를 비방합니다.
‘그 교회는 무엇이 나쁘고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으니 우리 교회로 나오시라’고.
그러다가 더 심하면, “우리 교회에만 구원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생겨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전도와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해야 할 것인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렇게 함이 남이 닦아 놓은 터위에 집을 건축하려는 세상적인 약삭바름을 피하는 자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誤謬)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윤리(倫理)가 따로 있는데 세상을 살면서 이 윤리를 망각하고는 세상에서 최대의 이익을 볼 수 있는 꾀를 내어 남을 속이고 비방도 가리지 않고 하면서도 이를 당연시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하나님의 교회들에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작다고 해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가운데 안주(安住)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도행전 8장에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들 안에서만 평안한 생활을 하고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교회로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의 종국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도 죽어가는 심령들에게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13)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로마서 15:1-13)


                                                                               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재물을 움켜진채 이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지위를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는 사람의 삶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는데 모처럼 한 선행에 대해서 동네방네 나팔을 불며 생색을 냅니다.

태종 이방원이 자기를 도와 난(反亂)을 평정한 공신들과 그들의 사병들을 혁파하는데 이는 그들 공신들의 공로주의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안에서도 공로주의가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나 제직들은 자신의 교회내에서 중함을 드러내놓고 말합니다. “이 교회가 누구 때문에 이만큼 성장하고있는지 알기나 해?! 한데, 교인들은 그걸 몰라 준단 말이야!”
“우리 교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내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야. 교회 구석구석에서 내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나 보아.” 그런데 목사님이나 다른 교인들이 자기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으면 은근히 속으로 “내가 교회를 안나오면 이 교회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보라지!” 합니다.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태양없는 세상일줄 알았는데 여호수아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누군가 하면 모세의 수종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높이 드셨습니다. 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하셨습니다.
교회의 바른 성장은 학벌이 좋은 목사님이 있기 때문도 아니요 교인들의 눈에 보이는 열심히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그 교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어달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소돔성에서 의인 열명을 찾을 수 있으면 의인 열명으로 인하여서 죄악이 관영한 도시 소돔을 멸망치 않으시겠다고(창 18:32)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하여 전심으로 의인의 기도를 올리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믿음의 용사 열명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쇠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속에 성장할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크고 공로주의가 팽배한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뜻이 발견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또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모인 장소입니다.

                                                                               2
1-2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덮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 중에 약한 자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리 이웃을 도와서 그들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지상에서 생을 사실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사셨는데 그럼에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꺼리가 되시고 종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나 자신이 아니라 옆사람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나에게 비방이 미칠 때가 있지만 조롱을 감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5-6절에 “이제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영어성경은 인내(perseverance) 대신에 “steadfastness"(RSV)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한결같으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한결같으심으로 오래 참으시고 연약한 우리를 책망하시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하고 불완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 앞에 막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삶의 본을 보이셨기에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요즘 공부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서 반복하여서 말씀하실 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나를 증거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증거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지상의 전 생애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증거하는 삶을 살되, 예수님께서 그리 하신 것처럼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삶--곧, 예수님께서 사신대로 사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 옆 교인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한 삶을 사는 믿음이 강한 나는 나를 드러내는 대신에 옆 교인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 수 있도록 그를 돕는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도우시고 감당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의인이요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6, 8, 10절에 이른 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옆 성도를 받아야 할 것은 그가 믿음이 강하고 온전하고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 옆 사람을 받고자 함입니다.

8-9절에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을 살되 죽으시기까지 그리하신 것은 할례자--곧 이스라엘에게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요, 더 나아가서 이방족속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14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표현할 때 “그때에 너희 (이방인)은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머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위하는 삶이었는데 이는 결국 그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9-12절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예언의 약속들입니다.

12절에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에서)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곧, 이새와 다윗의 반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을 다스리기 위한 이가 나올 것인데 그가 오시매 온 땅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메시야되신 예수님께 온 세상이 소망을 둡니다.

6, 7,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란 표현을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다”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고 증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시며 소망을 넘치게 하십니다.

13절에 “소망(所望)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함으로 14장 1절에서 시작한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약함을 담당하고 받으라”는 권면의 말씀을 마감합니다.

                                                                              3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나와 생각과 주장이 다른 사람이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나는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고자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음을 발견하고는 분이 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 15장에서 이러한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약함까지도 담당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담당하실 때, 우리는 아직 연약한 자요, 죄인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고 형제와 이웃의 약함을 담당하고 그들을 받는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입니다.
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신 것 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 갑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와 소망(所望)의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시고 또 소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우리의 삶가운데 더욱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