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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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덕대일(Richard Dugdale)이라고 하는 사람이 1877년에 18세기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5대에 걸친 가계를
조사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라고 하는 유명한
목회자요 신학자의 가계와 맥스 쥬크스(Max Jukes)라고 하는 무신론자의 가계를 비교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신실한 믿음의 가정의 여인과 결혼하여 많은 자손들을 두었는데, 5대에 걸친 그의
1,394명의 자손들 가운데 13명은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65명은 교수, 3명은 상원의원, 30명은 판사, 100명은
변호사, 60명은 의사, 75명은 육군과 해군의 장성들, 100명은 목회자와 선교사, 60명은 유명한 저자,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는 등 대부분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의 자손들은 주 정부에 단 한푼의 신세도 진 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맥스 쥬크스(Max Jukes)는 불신의 여인과 결혼하여 그도 5대에 걸쳐서 1,292명의 자손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310명은 빈민으로 죽었고, 150명은 범죄자였으며, 7명은 살인자였으며, 100명은 술주정뱅이요, 여인들의
절반 가량은 매춘부였습니다. 그의 자손 중 540명이 주 정부에 125만불 가량의 신세를 끼쳤습니다.
창세기 4장 16절로부터 24절에까지 아담에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가인의 자손들이 기록되어있고, 이어서 4장 25-26절과 5장에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셋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요 아벨을 대신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셋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에게 가인을 통하여 이어지는 7대 손의 이름은 라멕이요 셋을 통하여 이어지는 7대 손의 이름은 에녹인데 그들의 삶은 극과 극입니다.
라멕은 그의 조상 가인보다 더 악랄한 살인자였는데 그뿐 아니라 그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악인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 24절을 보면,
“가인을 위하여서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즉, 가인이 한 사람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만일 가인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그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가인보다 더 살인을 많이 한 나를 죽이는
자는 칠십칠 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입니다.
반면에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7대 손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 뿐만
아니라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4장 26절에 보면, 셋이 자녀들을 낳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예배하였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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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에녹에 관한 기사의 시작은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로 시작합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는 그도 다른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그의 인생에 한 전환기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죽음’(무트, death)과 ‘보내다’(샬라크, send)란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가인의 족보에 있는 라멕이 아님)을 낳았고(창 5:25)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았고(창 5:28)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에 홍수가 시작되었는데(창 7:11), 그 때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969세가 되는 해로 그의 수명이 다한 때입니다.
즉, 하나님은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세상에 홍수를 보내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아마도 에녹에게 이 사실을 ‘므두셀라’란 이름을 짓게 하심으로 알려주셨던 것 같습니다.
유다서 1장 14절에 그 흔적이 있는데,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위경서인 에녹1서 1장 9절을 인용한 말씀이라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통하여 그의 세대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예로는 또한 노아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의 때나 노아의 때나 평안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어서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세대는 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고자 했으며,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매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노아와는 달리, 또 다른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록에 의하면, 아들들과 딸들을 낳으며 산 것 외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특별하고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 줄 압니다.
해서, 교회에서 가만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은 시시하게 생각하고 분주하게 이것저것 벌리면 굉장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녹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평범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 일 저 일로 바쁘지 아니하면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해서, 목회자의 일이 아닌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습니다. 목회자는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해 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도 세상 일로 또는 교회 일로 너무 분주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에서 점심식사 준비로 너무 분주하여 예배시간에도 들어오지 못하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일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예배할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3절: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이 지상에서 삼백육십오 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흔히 900세 이상을 산 것에 비하면 에녹의 지상의 삶은 매우 짧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300년의 삶은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보다 축복된 삶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가장 축복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은 우리가 믿고 체험할진 데 우리의 삶은 40년이어도, 50년이어도 축복인 것입니다.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년수는 300년입니다. 그저 1년을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기까지 300년을 한결같이 동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5-6절에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입술의 믿음이 아닙니다.
내게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있는 그 믿음이 나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또는 형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한결같으심과 선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믿음,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변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믿음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는 천국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천국에서 제게 주시는 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나 도를 열심히 닦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믿음은 이 세상 살 동안에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자, 이 세상 살 동안에 부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장차 하나님께서 내게 상 주실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과에 대한 동기가 없는 삶에는 의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나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저 세상 살 동안 평안하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살 동안에는 비록 외적 평안이
아니라 핍박이 내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믿음은 또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이 변할 때 그것이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의 삶은 므두셀라를 낳는 계기로 바뀌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30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과 한결같으심을 따라 변화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순종함인데 에녹은 하나님께 순종하되 300년 동안 한결같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언기자는 21장 19절에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도 동행하기를 원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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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과 같이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까?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것입니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올 때 믿음으로 나아오므로, 삶의 변화가 있으므로, 또한 매일 매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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