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성도” (빌레몬 1:21-22)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성도” (빌레몬 1:21-22)


                                                                          1
하나를 듣고 열을 행하는 사람들
공자님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라고 말씀했습니다. ‘배운 것을 반복하여 복습하면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뜻입니다. 배운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복하여)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배운 것은 한갓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나의 삶에 원동력이 됩니다.
맹자님은 군자에게 세 가지 기쁨이 있는데 첫째는,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며(父母俱存), 형제들에게 별 탈이 없는 것이요(兄弟無故),”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며(仰不愧於天), 아래로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俯不怍於人),” 그리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得天下英才) 그를 가르쳐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而敎育之)”고 말씀했습니다. 천하의 영재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실천할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가 하나를 듣고 열을 알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자 할 때 그는 자신뿐 아니라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 속에서 참으로 유익을 주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가르친 것 이상의 것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아서 더욱 그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선생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곧,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말씀에 따라 행하고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친구’로 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라야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씨가 싹을 내고 잘 자라서 곡물이나 과실을 생산하게 될 때 평균적으로 예상되는 결실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깨달음(깨닫다: συνίημι)”은 ‘행함을 동반하는 깨달음’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음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되 들은 것보다 더 행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가 들은 것보다 더 행합니까?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부터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내가 있어 남편이 ‘이것 좀 해줘요’라고 말해야 겨우 하는 척하거나 그 부탁한 것도 들은 척하지 않는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남편입니다. 연애할 때야 ‘만나자’고 할 때 ‘시간이 없다’고 빼고, ‘이것 하자’ 할 때, 나는 ‘이것은 안하고 저것 한다’라고 조금 퉁기는 상대방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또는 아내가) 제안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상대방이 사랑스러울 리가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피곤하며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아내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남편은 남편이, 아내가 부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해주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힘씁니다. 그리할 때 그러한 아내를, 그러한 남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바울은 빌레몬이 그가 오네시모를 위하여 요청한 것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되, 요청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말씀함으로써,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꼭 들어줘야 하게끔 만듭니다. 어찌 보면, 빌레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빌레몬에게 대한 바울의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요청을 자의(自意)로 받아들이되 기쁨으로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1절: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의 순종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Confident of your obedience)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요청하고 제안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을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부탁하고 제안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하되 나 바울을 영접하듯 하라’(17절)는 것이며,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16절)이며, 또 가능하다면, ‘오네시모로 나 바울을 돕게 하라’(13절)는 것이며, ‘만일 오네시모에게 금전적, 법적인 계산에서 엄청난 빚의 변제가 남아 있으면, 그 빚을 바울의 계정으로 돌리라’(18절)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바울의 부탁을 빌레몬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들은 것보다 더 행하는 빌레몬
바울이 요청한 것보다 더 행하는 빌레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빌레몬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을 때(4절), 그는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용서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였지만, 오네시모가 그에게 끼친 해(害)를 항상 마음에 담아두는 ‘용서 아닌 용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회개한)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되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것 같이 그렇게 온전한 용서를 베풀 것입니다. 하기에, 이제 오네시모를 향한 미움과 불편한 마음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를 향하여 긍휼이 마음이 샘솟아서 그에게 돌아오는 오네시모를 보는 순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맨발로 달려나가 그를 얼싸안고 뺨을 비비며 그의 돌아옴을 기뻐하며 영접할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16절)고 했는데, 빌레몬은 바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외견상으로는 그를 형제처럼 대하지만 실제는 거리를 두는 그런 외식(外飾)을 행하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를 종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빌레몬은 이제는 오네시모를 결코 종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뜻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같이 의논하고 협력하는 형제요 친구로 여길 것입니다. 아마 또한 그의 법률적인 종(노예) 신분도 풀어주어서 실질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온전한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바울이 은근하게 요청한 것은 “오네시모로 나를 섬기게 해주면 좋겠다”(13절)는 것이었는데, 빌레몬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알게 한 바울을 위해서라면, 오네시모를 기꺼이 돌려보내어 그의 복음증거에 도움을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함에 부득이함으로 하지 않고, 첫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둘째는 바울을 위하여 기쁨과 감사함으로 할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의 빚이 있거나 금전적인 빚이 있으면 내게 청구하라”(18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항상 복음의 빚진 자로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온 빌레몬은 바울에게 오네시모의 빚을 청구하는 대신에 바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것이며 그에서 나아가 바울의 필요와 원함을 미리 알고 공급해주기를 힘 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렇게 부모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려거든 차라리 나가서 네 멋대로 살아.”라고 홧김에 책망하였더니, 아들은 아무 말도 않고 제 방으로 올라가서 꾸역꾸역 짐을 꾸리더니 가방 둘을 들고 내려오더니 현관문을 나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리치십니다. “너 지금 뭐하는거냐?”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속이 터집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신 말에 강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집을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 말 좀 잘 들으라”는 것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교인들은 닫혀진 마음으로 그 말씀의 뜻을 오해하며, 말씀의 진의(眞意)와는 전혀 반대의 일을 행하면서 그 말씀대로 행하고 있다고 우기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의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라”(갈 3:10-14)고 권고함을 듣고, ‘나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될래’라고 마음 속으로 작정한 사람은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부득이함으로 행함은 행하지 아니한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서요.’라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행할 수 없으니 차라리 내 나름대로 살래요’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말씀의 참뜻’을 오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말씀할 때, 혼동을 느낄 것입니다. ‘어디에서는(갈라디아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그러더니, 이건 또 뭐야?’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부득이함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법적(法的) 구속적(拘束的) 조항으로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들은 것을 잘 깨달아 지키되, 각 성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기에 들은 것 이상으로 지켜 행하는 삶입니다.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2년 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석방의 때가 거의 다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면 그에게 할 일이 많습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그 당시에 땅끝으로 여기던 서바나(Spain)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여행하는 것(롬 15:28)이 그 하나요, 그가 개척하고 사역했던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요(빌 2:24), 그 일 중에 하나로서 빌레몬이 지도자로 있는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는 것입니다(22절). 그 때 그곳에 바울이 머물 처소를 예비하라고 빌레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또한 빌레몬이 과연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영접하고 형제로 대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기도로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그의 서신들 여러 곳에서 성도들에게 그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렇게 함은 석방을 위한 그 자신의 기도가 약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한 가지 목적을 두고 많은 성도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기도 응답의 힘이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금 천천히 응답을 주고자 하셨는데, 성도들이 큰 기도의 소리로 강청하매, 응답의 시기를 앞당기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는 기도의 놀라운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을 주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할 것인데,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는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Yes"로 응답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3
성도의 결단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들으실 때에, 여러분의 낮추고 비운 마음 속이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아니 들은 말씀보다 더 행함으로써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논리와 한계를 초월하기에 믿음이 없이는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말씀을 듣지만 교회를 떠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는, 말씀하고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일으키심이, 죽은 소녀를 향해 ‘달리다쿰’ 하시면서 일으키심이 성경 속에는 가능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음이 아닌 세상의 판단으로 제한하기에, ‘나의 종교행위’에서 그런 기적들은 결코 나타나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판단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너무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오합지졸 60만과 잘 훈련된 군사 몇 백만이 싸우면 오합지졸이 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합리적인 것을 불합리하게 만드시며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적인 판단으로 볼 때는 참으로 무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제대로 싸울 무기도 없는데,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이 몇 백만의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현실 속의 자신들을 바라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무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들은 말씀보다 더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고사하고, 들은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도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10년 했다, 20년 했다는 결코 자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십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의 교인이다,’ ‘삼만 명 모이는 교회의 교인이다,’ ‘이천 명 모이는 교회의 교인이다’라고 하는 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지금도 능력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다’라고 담대히 외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있음으로써 들은 것보다 더 행하기를 즐겨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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