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3, 2013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6:4-11)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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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 다닐 때 아담과 이브 이후 세상이 더욱 더 악해지고 있나 아니면 선해지고 있나에 대해서 다른 신학생들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점점 악해진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점점 선해진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윤리관의 변화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더욱 악해지고 어떤 부분은 선해진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면에서 볼 때, 한 사회(社會)가, 한 인간(人間)이 선하다-악하다 하는 판정의 기준은 그 사회와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나로 알 수 있습니다.
이로서 보건대, 세상은 선과 악 사이를 진폭(振幅)하고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으로 접근(接近)해가고 있는가 하면 하향하여 악으로 치닫곤 합니다.
악으로 치닫다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참으시는 한계(限界)의 악(惡)을 벗어날라 치면, 하나님께서 간섭(干涉)하셔서 바로잡아 놓으십니다. 노아의 홍수(洪水), 바벨탑 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滅亡)은 바로 하나님의 간섭(干涉)하심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방향은 개선(改善) 쪽보다는 개악(改惡)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AIDS로 인하여 동성연애가 줄어드는가 했더니, AIDS를 예방하여 동성연애를 즐기는 방법을 모색(摸索)하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한번 더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인데,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실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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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는 요나, 아모스와 함께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서의 첫째 부분은 1-3장으로 신실한 호세아와 부정하고 음란(淫亂)한 고멜의 결혼이야기이고, 두 번째 부분은 4-14장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과 부정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은 호세아의 결혼비유를 통하여 호세아-고멜의 관계가 하나님-이스라엘의 관계와 유사함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합니다. 말씀하실 때, 음란하고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란 축복의 이름인 반면,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시다’란 저주의 이름입니다.
두 번째로 딸을 낳는데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곧,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멜과도 같이 음란하고 부정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데리고 오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면서도 두고온 옛 연인인 바알--곧 세상에서의 우상--을 마음 속에 섬기고 있으매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흩으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않으시겠다고 주신 이름들입니다.
고멜은 결국 음란(淫亂)이란 옛 연인을 잊지 못하여 호세아를 떠납니다. 그의 생활은 더욱 부정하고 음란하여 세상에서 버려지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다시 임하실 때,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淫婦)된 그 여인--고멜--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고멜이 다른 남자들의 사랑이 그리워 호세아를 버리고 간 것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헛된 신을 좇아 섬기려 갔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돌이키려 하십니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곧, 총 30 세겔에 해당하는 돈으로 타인의 품에 안긴 바된 고멜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옵니다. 은 30에 해당하는 30 세겔은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몸값인데 예수님도 인류의 구원 사역을 위해서 은 30에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리심을 당함을 봅니다. 아라비아 상인에게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린 요셉의 경우는(창 37:28) 소년의 몸값으로 넘겨진 경우라고 할 것입니다.

고멜을 데리고 올 때 호세아는 그에게 말합니다: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고 다른 남자도 좇지 말라. 나도 그리하리라” 합니다(3:3).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신을 따라 갔었지만, 그들을 데려오매 ‘행음치 않고 다른 신들을 좇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다른 신은 없으며, 그들은 단지 인간의 상상(想像) 속에만 있고 인간을 혼미(昏迷)하게 만들 뿐입니다. 4-14장에서 호세아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4-8장), 의로우시며(9-10장), 긍휼하신 분(11-14장)임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게서는 아직도 세상의 죄 가운데 방황(彷徨)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물으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셔서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에브라임--곧 이스라엘이, 유다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4절과 6절에 나오는 “인애(仁愛)”는 히브리어 '헷세드'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지속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고있는 사랑은 일시적(一時的)이고 변덕(變德)스러우며 쉬없어지는, 모양(模樣)만이 있는 아침구름이나 이슬과도 같이 쉬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것인데,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침과 저녁 때가 다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생활에서, 혹은 남녀의 연애에서 한편이 이와 같을 때,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戀愛)는 곧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입으로 반복하나,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이는 모양(模樣)만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 작은 자를 긍휼(矜恤)로 대함으로서 확증(確證)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제사는 인애와 긍휼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의미는 잊어버린 채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열납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첫 소산(所産)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드렸기에 이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와 번제의 제사를 그리지만, 그 안에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회개가 없고, 하나님과 화목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獻身)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 자신이 물질이 궁하셔서 그것으로 생계(生計)를 유지하셔야 하기에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사에 앞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형제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삼상 15: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24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머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전부를--인격과 자랑까지도 다 바치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禮拜)니라” 합니다.
“몸을 산 제사(祭祀)로 드리라” 함은 어떤 사교(邪敎) 집단에서와 같이 사람의 몸을 산 채로 불에 던져 제사지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라 함은 우리의 인격과 품성을 포함한 우리의 전부(全部)입니다. 곧, 우리의 인격과 자랑과 마음과 모두를 다 주님께 내어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예와 같이 낮아져서 우리의 사는 삶을 통하여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로마서 12:2에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은 목사에게만 요구되어지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모두에게 요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6절 후반에서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그분에게 번제를 드리느 것은 누구의 결혼식인지도 몰고 참석하여 덩달아 기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며, 누구의 초상(初喪)인지도 모르면서 참석하여 밤새도록 우는 우리의 모양이며,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부처님을 찾고 잇는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을 체험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그려놓은 하나님의 허상을 바라봄이며 이를 위하여 제사드림입니다.

(8-9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부지중에 어쩔 수 없이 살인한 자들을 위해서 도피성읍을 마련하여두시고 살인자들이 이곳으로 피할 때 그들을 보호하게 하셨는데 후에 사람들은 이를 악용합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하고, 도피성을 관할하고있는 제사장들이 이를 구실로 세상의 이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까지도 보호하시어 가인을 해하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더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후에 라멕은 살인을 자행(恣行)하면서 터무니없게도 가인의 까닭으로 하나님의 보호(保護)를 요구합니다. 중세 카톨릭교회에서 발부하던 면죄부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恩惠)를 인간의 이로 바꾼 경우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예로는 우리 자신들의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고 도피성되시는 주님께 피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근신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는 대신에 주님의 용서를 악용(惡用)하여 매일매일 생활 가운데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를 반복(反復)하면서 주님의 죄사함을 당연시(當然視)하며 이를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10절) 아론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같이 우리도 세상의 명예를, 부를 여호와라 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북방왕국인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민심(民心)이 그에게서 떠날까봐 하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난씩 두고, 벧엘에서 보통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산당을 짓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로 인해, 여로보암은 그 자신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하는 죄를 범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오도(誤導)하여 행음(行淫)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금송아지에게 절함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하는 사람들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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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淫亂)하고 부정(不貞)한 이스라엘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변챦고 한결같은 신실한 인애-긍휼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제사만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사는 우리 속에 거짓된 마음이 없이 겸허하고 낮아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상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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