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빌레몬 1:23-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빌레몬 1:23-25)

     
                                                                              1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사람들
찬송가들이 다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들 중에 하나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일 것입니다. 이 찬송은 아프리카 노예상선 선장으로서 타락한 삶을 살아가다가 15세기 독일의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의 저서,『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를 읽고 감동을 받고 회심하였다는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의 자전적(自傳的) 고백입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중증 뇌성마비로 깊은 절망과 고독, 그리고 번뇌와 고통 속을 끊임없이 헤맨 경험이 있는 송명희 시인의「아니!」라는 시(詩)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사람 되셨네
            이런 일 누가 할 수 있나

            아니
            말씀이 육신 되셨네
            이런 비밀 누가 알 수 있나

            아니
            그가 십자가 지시려
            그가 죽으시려고 오셨네
            이런 은혜 누가 감당할 수 있나

            찬양하세
            오
            찬양하세
            예수
            그 놀라운
            은혜 받은 우리여
            찬양하세

            (「아니!」, 『그때가 오리라』중에서)
                                                   
하나님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양의 따사로움과 밝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오신 태양의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되, 1장 9-14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하여 영광의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 그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은혜의 빛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며(행전 9:3-9), 바울의 동역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하였기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은혜를 받음으로 돌 같은 마음이 녹아 내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빌레몬서를 마치는 문안인사에서 그의 동역자들, 즉, 에바브라(23절)와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그리고 누가(24절)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Epaphras)
바울은 본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에바브라디도에게도 이 자랑스런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본래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요 사역자인데, 그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 다른 교리와 주장을 갖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매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와서 그의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사역해왔기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항상 애써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뜨겁습니다. 그가 지금 몸으로는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더욱 완전하고 믿음에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뿐 아니라 바울의 사역과 고통에도 동참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현재 로마에서 가택연금의 상태(행전 28:30) 혹은 감옥에 갇힌 상태(빌 1:7, 13-14)에 있을 때 바울의 매임 가운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함께 하고 나누는 삶입니다.

    24절: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의 동역자들
에바브라 이외에 바울은 마가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의 이름을 들어 그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가지 환난과 곤고 가운데도 바울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기꺼이, 희생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으며, 옥에 갇힘과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가(Mark)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는 육신의 피곤 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전 13:13). 1차 전도여행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이때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나, 바울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탐탁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밤빌리아에서 먼저 돌아간 것을 들어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합니다. 결국 마가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되고 각각 다른 전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가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이 덜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가는 깊은 회개를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바탕으로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되고, 베드로는 그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한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결국에 바울도 마가의 변모된 모습을 보고 그를 기쁨으로 다시 영접하고 그를 동역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몬 1:24). 한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에 두 번째의 동역은 마가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었으며 다시는 넘어지거나 거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 “네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에는 하나님의 일에 무익한 자였는데, 이제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다고(Aristarchus)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행전 20:4, 27:2)의 유대인으로서 에베소 지방에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 에베소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행전 19:29). 그가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아시아까지 동행하고, 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할 때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행전 27:2).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 감당하기를 좋아하기에 그를 따라 감옥(가택연금)에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갇히지 않아도 되는데, 바울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하여 함께 갇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골 4:10).

데마(Demas)
데마와 마가는 그들의 행적에서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가의 처음은 실패였으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안 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열심을 내었고 따라서 바울의 인정함을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끝은 좋지 못하였습니다. 데마는 바울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갑니다. 디도데후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 데마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를 향한 바울의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이 한 구절에 온통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단의 유혹에 매우 약합니다(롬 7:18-24).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삶 가운데 죽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은 활동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2:20). 이로써, 데마와 같이 곁길로 빠지는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히 3:14)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Luke)
누가는 의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직업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만나매 그의 3차 전도여행부터 자청하여 바울을 따라다녔습니다. 죄수로서 로마로 이송되는 바울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자원함으로 바울의 고생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현재에도 바울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바울과 함께 더욱 넓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에서 놓임을 받았다가 그의 왕성한 전도활동으로 다시 체포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누가는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χάρις)와 관련하여 바울의 서신들은 한 특징이 있습니다. 서신의 첫머리에는 예외 없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문안인사를 적고(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서신의 끝에는 또한 예외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롬 16:20; 고전 16:23; 고후 13:13; 갈 6:18; 엡 6:24; 빌 4:23; 골 4:18;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몬 1:25)라고 맺고 있습니다(에베소서, 골로새,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가 생략됨).

은혜는 본래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여 있는 것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또한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삶 속에 전달되어지고 나타납니다. 해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달되어지고 나타나는 은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양과도 같은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너희 심령에”(cf. 갈 6:18)는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영과 함께”(μετὰ τού πνεύματος ὑμών: with your spirit)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생각하고 사모할 때 그의 은혜의 깊고 넓음을 맛볼 수 있고 또한 증거하고 나누어주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온전히 빌레몬의 심령(the spirit of Philemon)에 전달되고 느껴질 때, 빌레몬은 비로소 바울이 왜 한갓 종에 불과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바울의 그러한 부탁이 없었더라도 그를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용서로 그를 용서하고, 영접하고, 진정 한 형제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어려움 중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전령(messengers)들이 될 수 있습니다.

                                                                      3
성도의 결단
여러분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함께 함을 느낍니까? 우리의 심령은 원래(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완악(頑惡)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요청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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