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내가 갚으리라” (빌레몬 1:18-20)

                                                   “내가 갚으리라” (빌레몬 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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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청산
신용카드의 엄청난 빚으로 인하여 신용불량자가 되고 급기야는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경우가 한국과 미국 등 많은 신용카드의 편리를 누리는 나라들에서 발생합니다. 얼마 뒤에는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급한 대로 우선 카드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해서, 요즘은 빚 청산(‘Debt disappears')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의 에이전트(agent)까지 등장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지고 있는 신용기관과 빚 협상을 하여 얼마정도 할인해주거나 변제기일을 연장해주고 일정의 수수료를 챙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빚 청산이 되지 못하고 그 채무자를 찜찜하게 하고 결국은 신용불량자의 불명예를 항상 지니고 다니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채권자가 모든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주거나, 다른 사람이 빚 전체를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대신 갚아준다면, 이는 참으로 그 채무자로 하여금 홀가분한 마음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로마노프조의 황제 니콜라이(Nikolai I, 1796-1855)는 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긴 황제입니다. 그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였는데, 종종 평복으로 갈아입고 진영을 살펴 직분을 태만히 하고 자리를 비운 자는 엄히 징계하고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 자에게는 크게 포상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군대의 어떤 장교가 처소에 앉아 자기의 빚진 것을 종이에 적어 계산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 빚이 너무 많아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안 그 장교는 탄식하며 빚의 명세를 적은 종이 밑에 “이 산 같은 빚을 갚아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을 적어 그대로 책상에 놔두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가 자는 사이에 황제가 장교의 처소를 순찰하다가 들어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고는 “이 산 같은 빚을 갚아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 밑에 “니콜라이”라고 적어놓고 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장교가 종이 위에 쓰여있는 황제의 필체를 보고서는 놀라 이상히 여깁니다. 그날 밤 황제는 또 평복으로 순찰하면서 장교의 처소에 들어와 봉투에 돈을 넣어 장교의 책상에 놓고는 조용히 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돈이 든 봉투를 발견한 장교는 너무 감격하였고, 그의 모든 빚을 다 갚은 다음에 사력을 다해 황제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8장(23-35절)에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는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평균 노동자 1인의 하루 일당이 50-60 달러라고 할 때) 30억 달러(3조  원)에 해당합니다. 연봉이 10만 달러인 사람의 30,000년 봉급에 해당하며, 연봉이 1,000만 달러인 일류 프로스포츠 선수의 경우는 300년 동안 뛰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여 이런 큰 빚을 지었는지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은 죽었다 몇 백 번을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결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으로는 임금에게 ‘다 갚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결코 갚을 수 없음은 그 자신과 임금 모두 잘 압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10,000 달란트(30억 달러)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줍니다.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몇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전을 물러 나와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빨리 갚으라고 쥐고 흔듭니다. 100 데나리온은 평균 노동자의 100일치의 품삯으로 5,000 달러(50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물론, 평균 생활인에게 적잖은 금액이지만, 그가 탕감 받은 30억 달러에 비하면 6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금액입니다. 임금이 그의 빚 30억 달러를 탕감해주었는데, 그는 5,000 달러를 갚지 못하는 그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다시 그에게 빚졌던 사람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태 18:32-33)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비유는 무슨 의미인가 하면, 임금이신 하나님께서는 갚을 길 없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의 빚 (“죄의 삯은 사망”: 롬 6:23)을 다 사하여 주셨는데, 형제의 작은 잘못, 적은 빚을 용서하여 주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 18:34)고 말씀하십니다.

주기도문(마태 6:9-13)을 외울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지나갑니다. 영어성경(RSV, NIV 등)에서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our debtors'(우리에게 빚진 자)라고 번역하고, ’우리 죄‘를 ’our debts'(우리의 빚)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4-1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사하여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진 빚을 사함 받는 것이 서로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특별히 용서에 관하여 다시 한번 말씀하심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지만 어려운 일인지 알게 하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또한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는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 빚이 금전적인 빚, 죄와 허물의 빚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복음의 빚과 사랑의 빚이 있음을 지적함입니다.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해준 사람에게 복음의 빚이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빚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줌으로 탕감되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맛본 사람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이 사랑의 빚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눠줌으로 탕감되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되 끝없이 전하여야 하며, 사랑을 나눠주되 끝없이 나눠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의 은혜가 한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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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어떤 금전적인 빚이 있거나 불의를 저지른 허물의 빚이 있을 때 그것을 그 자신이 갚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오네시모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빌레몬에게 그도 ‘빚진 자’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또한 하나님께 빚진 자이듯이, 그에게 빚진 자인 오네시모의 빚도 온전히 탕감하여 용서의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의 불의와 빚에 대한 바울의 회계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이었던 자인데, 주인의 물건을 훔친 것도 큰 죄인데, 훔친 후 도망친 것은 참으로 큰 죄라고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후에 훔친 것을 변제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전의 권한은 종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절도와 ‘불의의 빚’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압니다. 오네시모가 아무리 빌레몬에게 사죄를 한다고 하더라도 빌레몬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잘 압니다. 하기에, 바울은 오네시모 자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그 자신이 회계(계산)하겠다고 나섭니다. 종에 지나지 않는 오네시모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서, 오네시모의 빚이 온전하게 탕감받을 때, 오네시모는 바울을 위하여 그의 동역자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19절: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갚으리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심한 안질로 글을 쓸 수 없는 처지라 통상적으로 대필하는데, ‘오네시모의 빚을 갚겠다’는 약속은 친필로 쓴다고 했습니다. 곧,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 청산을 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갚으리라(I will pay it back)“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금전적인 빚이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위에 오네시모가 행한 불의--훔쳐서 도망한 행위--를 금전으로 환산할 때 그 금액이 얼마가 될지도 바울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자신있게 “내가 갚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갚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큰돈이 있었을까요? 그가 로마에서 옥중생활을 한지 2년이 가까워옵니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삼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큰 돈을 모금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돈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한푼도 남겨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옥중(혹은 로마에 셋집, 행전 28:30)에 있으면서 연명했던 것은 빌립보 교회를 위시한 몇몇 교회가 그를 도운 까닭입니다. 바울에게 모아둔 돈이 없습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제와 선교에 사용하지 (자신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빚 갚는 일에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내가 갚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울의 허세(虛勢)입니까? 여기에 바울의 지혜가 있습니다.

빌레몬의 빚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말한 다음에 ‘(바울에 대한) 빌레몬의 빚’을 상기시켜 줍니다. 빌레몬에 대한 오네시모의 빚이 엄청난 것 이상으로 바울에 대한 빌레몬의 빚은 더 크다는 것을 빌레몬으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보듯이, 바울은 신령한 빚이 육신의 빚, 금전적인 빚보다 더 큼을 강조합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이 그의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자인데, 바울이 전하여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이 복음의 빚은 얼마나 큰지 모든 금전적인 빚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별로 없다고 여긴다면, 그가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진 빚이 얼마나 큰지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이를 말하지 않음은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그가 바울에게 진 빚이 무엇이며 그 크기가 어떠한지 알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가 바울에게 진 (복음의) 빚이 있음을 상기시킴은 그것을 갚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레몬의 빚을 주장하지 않듯이, 빌레몬도 오네시모의 빚을 주장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20절: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기쁨을 얻고 마음이 평안함
바울이 빌레몬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과 사랑에 빚진 자로서 그에게 돌아가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되 두 손을 벌려 그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의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여 온전히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 빌레몬으로 인하여 바울은 큰 기쁨을 얻을 것이며, 조금은 불안한 가운데 오네시모를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복음 전했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은 바울을 위함이라기보다는, 또 오네시모를 위함이라기보다는 사실은 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함과 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빌레몬을 용서하고 영접하실 것이며, 바울 이상으로 빌레몬을 인하여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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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어떤 교회를 방문하였더니, 그 교회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갈등이 심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나름대로 교인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교인들은 목회자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주위의 다른 교인들과 불화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나 이웃이나 목회자로 인하여 상처받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상처가 하도 커서 도무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무지 갚을 길 없는, 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빚을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두 팔을 벌려서 받아들이시기를 원하는데, 형제의 나에 대한 빚은 얼마요 그것이 큰 것같이 느껴진들 용서 못할 빚은 아니란 걸 깨닫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했는데, 바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형제와 자매와 교우들과 이웃에 대해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을 향하여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형제와 자매와 이웃의 빚을 주장하는 여러분을 향하여 “네가 내게 진 빚을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시며, 여러분도 형제가, 자매가, 교우가, 이웃이 내게 진 빚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그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영접하신 것같이 내게 빚진 자까지 두 손을 벌려서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과 용서와 영접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귀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네 형제와 자매와 교우들과 이웃들의 빚을)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늘 생각하시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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