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내 심복 오네시모” (빌레몬 1:8-14)

                                                   “내 심복 오네시모” (빌레몬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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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와 조교
제가 경험한 미국대학의 교수들은 개인적으로 책이나 저널(journal)에 게재하기 위한 논문을 쓰는 일로 대학원생들인 조교(RA나 TA)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응분의 감사를 표시하거나 대우를 해줍니다. 그 도움의 정도 여하에 따라서 머리말에 감사를 언급하거나 도움이 감사 정도의 것 이상일 때는 책의 공동저자(co-author)로 이름을 올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이것이 웬만한 미국대학의 상식 있는 교수들의 경향입니다.
요즘 한국대학의 교수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인터넷 상에 보도되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이지만), 10년-20년 전의 교수들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자기 밑에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은 공적인 일 뿐 아니라 사적인 일을 시켜도 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조교에게 담배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몰상식한 교수도 있었습니다. 조교의 입장에서 별로 심부름 해주고 싶지 않지만, 교수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손해를 볼까봐 마지못해 억지로 시키는 일을 감당합니다. 책을 쓸 때 그의 조교인 대학원생으로부터 상당부분 도움을 받거나 책의 한 두 장(chapters)은 실질적으로 조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사실인데도 그 조교의 이름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교에게 그의 연구논문이나 저서를 위해서 일을 의뢰할 때도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만일 조교가 교수의 연구나 저작에 비협조적일 때는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오래된 얘기입니다만, 한국 경제학계의 어느 유명교수가 유명원서를 번역하는데, 자신이 번역한 부분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상당부분은 조교들에게 명령하여 공짜 아니면 거의 헐값으로 번역된 것이고 또한 일부분은 경제연구소의 연구원들에게 번역비를 제공하면서 의뢰를 하여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번역서(飜譯書)는 전적으로 타인에 의하여 번역된 500여 페이지 원서의 번역원고를 대충 훑어보고 출판사에 넘긴 그 유명교수의 이름으로(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번역한 것처럼) 출간됩니다. 번역에 실질적인 공이 있는 조교는 교수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논문통과가 수월하리라는 기대감에서) 감지덕지(感之德之)해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타입의 교수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공로를 가로채어 자기의 것인 냥 하는 경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서신에 대필자의 이름(소스데네, 더디오 등), 서신 첫 머리에 동역자 혹은 공동저자의 이름들(소스데네, 디모데, 실루아노)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누구의 도움을 받고 누구와 함께 편지들을 쓰고 있음을 명백히 밝혀 놓고 있습니다. 해서, 바울의 조교들과 협력자들의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바울은 그의 조교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감당함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원함이나 기쁨이 없는 사람에게 마지못함에서 일을 수행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전능자시요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강요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명하심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즉각적인 징계나 불이익을 주리라고 위협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징계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마지못하여 그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부터 보시기를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기쁜 마음으로 충성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성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3장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일로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사시고 세우신 교회의 일이지만)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할 때, 교인들이 자원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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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4-7절)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믿음의 교제를 칭찬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집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평안함을 누리고 신앙의 선배인 바울은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8-14절)에서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바울의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마땅한 일로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는 바울(Paul)
빌레몬에게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소문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오기에, 그로써 많은 성도들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하기에, 만일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오네시모의 일로 그에게 명하는 일도 그가 들어줌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소문만큼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과 믿음의 교제가 대단한 것은 아니며 성도들이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은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빌레몬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해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만큼 신앙의 부모요 선배인 바울이 명하는 것은 그가 들어야 할 것입니다. 빌레몬이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명령을 듣지 않을 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리스천에게 용서는 당연한 것이기에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일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라고 함은 노예는 그 상전의 소유물이요 그 노예를 어떻게 처리하든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일임에도 바울이 이 일로 노예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말하는 일이 지나친 간섭이요 자칫하면 의를 상하게 하는 일이기에 이 일에 관하여 말함이 바울에게는 담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므로”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빌레몬이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베풂이 마땅한 도리이기에, 그에게 신앙의 부모요 선배로서 명령할 권한이 바울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강요에 의하여 마지못함에서 나오는 행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할 때 이와 같이 마지못함이나 억지로 그 일을 감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크리스천의 도리라고 하더라도 빌레몬에게 자원함과 기쁨과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의 오네시모에 대한 감정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랑을 인하여 간구함
지금 바울이 오네시모의 일로서 빌레몬에게 말함은 고압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사랑에 호소하는 간청입니다. 우리의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우리들을 대하시되 우리의 죄와 허물로 원수되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으셨음을 빌레몬이 알 것입니다. 무익하고 보잘 것 없던 종이었던 우리에 대한 상전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큰 데, 너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받아줌이 좋겠다는 바울의 바람의 표시입니다.

나이 많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된 바울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라고 간청하는 것이 자기는 그런 일을 전혀 감당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부탁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현재의 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현재(62년경) 그의 나이가 60세를 전후한 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나이가 60세가 되도록 20-30 년의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데 모든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또한 바울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 드리기로 작정한 까닭입니다.
빌레몬에게 이를 말함은 바울의 현주소를 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이 신앙선배의 고압적인 지시가 아닌 한 영혼을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부탁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노예로 있었을 때에도 그는 먼저 믿은 상전 빌레몬을 따라서 종교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여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었기에 오네시모에게 그것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행위였을 분입니다.
그러한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주인 빌레몬의 재물 중에 일부를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그 재물을 다 탕진한 후에는 또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그는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그가 범한 지난 잘못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한 때는 교회도 다니던 사람인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기서도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바울이 현재 갇혀 있는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거나, 아니면 바울의 소문을 듣고 그를 한 번 만나기 위해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을 방문하여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오네시모가 자유의 몸으로 골로새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을 보면 2년의 옥중생활을 한 바울보다 죄의 중량이 가벼웠던지 아니면 바울을 단순히 옥으로 방문한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전에 빌레몬과 함께 있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바울로 말미암아 그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전도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를 본 바울의 기쁨도 참으로 컸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빌레몬에 대한 빚진 자의 부담에서 벗어나 (여전히 종이나) 그리스도의 참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였고, 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2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전에는 무익하였던 오네시모
오네시모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무익했던 자입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서 종교행위를 하였더라도 그것 역시 무익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유익한가 무익한가는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지위가 높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 그의 뛰어난 학문과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전혀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하고 다만 무익할 뿐입니다.

오네시모가 “이제는 나(=바울)와 네(=빌레몬)게 유익한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인하여 바울과 빌레몬의 주님을 위한 사역에 동역자요 협력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상전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크리스천 오네시모’가 ‘크리스천 빌레몬’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고 또 그의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의 교제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평안함을 얻은 것이 사실이지만, 오네시모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이 여전히 있을 것 같아 바울은 적지 아니 염려가 됩니다. 사실, 바울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가 중간에 육체의 피곤함을 못 이기기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었습니다(행전 13:13). 그 일로 바울은 마가에 대하여 심히 실망하고 그를 다시는 상종 못 할 사람으로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카를 두둔하는 바나바와도 심히 다투고 (주를 위한 전도의 여행이긴 하지만)각각 다른 길로 떠났던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안 했어도 좋았을 것을, 바나바의 말대로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바나바와도 다시 좋은 관계가 되고, 마가는 그가 가까이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목회자의 동역자요 협력자가 되었지만, 그에 대한 한동안의 불쾌하고 괘씸한 감정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빌레몬이 자기의 과거의 적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음을 본받아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쭈워볼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느데, 믿는 사람들의 삶에 용서가 너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다툼 한 번 하고, 섭섭한 일을 한 번 당하고 서로 안 보고 지내는 교인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저(=오네시모)는 내 심복(=my very heart or bowels)이라”고 했습니다. 깡패들의 용어(用語)에 “심복 부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복 부하”란 자기의 비밀과 소유까지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부하를 의미합니다. 곧 자기의 대리인이요 분신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심복”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α)는 ‘사람의 가장 속에 있는 내장 혹은 심장 혹은 감정’을 의미하는데, 영어성경은 ‘heart(심장: RSV/NIV)’ 또는 'bowels(창자: KJ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이 그의 속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내 심복”이라고 말한 것은 오네시모를 대할 때 나를 대하듯 대해 달라는 당부입니다.

    13절: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빌레몬 대신 오네시모로 주의 일을 감당케 하기를 원하는 바울
바울은 옥에 갇혀 있는 몸이지만 끊임없이 주님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를 원합니다.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되 “(더 넓게)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십시오”(골 4:2)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유한 몸이거나 매인 몸이거나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해 힘썼기에 그는 유언적인 서신인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강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현재 갇혀 있는 상태이기에 비교적 자유로 활동할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곁에 현재 디모데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는 더욱 더 많은 일꾼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복음 증거 사역을 거들어줄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빌레몬은 현재 골로새 교회의 사역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복음을 깨닫고 전도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오네시모가 그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도망친 종인 것을 아는 입장에서 이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요 크리스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바울은 먼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도리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바울의 뜻과 바램을 헤아려 오네시모를 다시 그에게 보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4절: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自意)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억지(抑止)가 아닌 자의(自意)를 원하는 바울
바울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오네시모는 바울의 곁에 머물면서 바울의 복음증거 사역을 돕고 싶은 원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상전인 빌레몬의 (그의 죄에 대한) 용서와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이기에 찜찜하고 무거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돌아가서 용서를 구하자니 그가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해서 오네시모의 마음을 헤아린 바울이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되 이와 같이 간절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도 바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알기에,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대신에 인편에 그가 오네시모를 원하기에 돌려보내지 않고 가까이에 두고 그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고 하면, 빌레몬이 굳이 ‘절대로 안 된다’고, ‘당장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라’고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억지처럼 될 것이기에 오네시모에 관한 모든 처분을 빌레몬에게 맡기되, 다만 빌레몬과 오네시모 둘 모두를 사랑하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과 그가 현재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그의 다른 서신들과 빌레몬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함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억지(抑止)나 마지못하여 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삶이거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나의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데 억지로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내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되, 기쁨과 감사와 자원함으로 그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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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바울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의(自意)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무엇을 드렸습니까? 무엇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마음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니 할 수 없이 드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에 마지못해 주일출석하고, 마지못해 헌물하고, 마지못해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복음적 삶의 모습이 아니요, 율법의 구속(拘束) 하에 있는 것이요, 여전히 가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어떠한지 먼저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명령에 가까운 강청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이기에 주님께 헌신하고 헌물하고 생명까지 드리기를 원하고, 나가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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