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6, 2013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빌레몬 1:15-17)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빌레몬 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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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의 미학
어떤 분이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한 5가지 제안”을 해놓았습니다.
첫째, 영접(환영)하라. 영접(환영)의 말을 하는 것만큼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은 없다.
둘째, 웃음으로 대하라. 찡그리는데는 74개의 근육이 필요하지만 웃는데는 14개의 근육만 있으면 된다.
셋째,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하려고만 하면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
넷째, 다른 이들의 감정을 고려하라. 그리하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견해에 신중하라. 논쟁에는 나의 것, 다른 사람의 것, 올바른 것이 있음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 집 주인이 보는 둥 마는 둥 하면 기분이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별 것 없다고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저러나’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집 주인이 두 팔을 벌려서 나를 영접하면, 그에게 나의 마음이 열려짐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 속에서는 누구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대접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 초대되어 처음 그 교회를 방문하고 설교를 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을 본척만척하거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여도 건성 손을 내밀면 목사님은 마음 속으로 실망을 느낍니다. ‘내 설교가 부족해서 그런가?’, ‘이 교회 성도님들은 냉랭하구나’. 그러나, 예배 후에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교인들이 목사님께 반가이 웃으면서 인사하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은혜스런 말씀 감사합니다’ 등등 약간 아부성 발언을 하면, 목사님은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그 교회 성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 목사님을 초청한 분은 그 교회의 목사님 혹은 장로님이지만, 교인들 전체는 ‘우리’가 그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초청했다는 기분으로 그분을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교회에 처음 출석하거나 방문하는 분이 있는데, 기존 교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함이 참으로 그 교회의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중요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분을 멋쩍게 서있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거나 요구를 하는 것은 그분에게 부담을 주고 실례가 되는 일이지만, 적당한 관심을 보이고 열린 마음으로 그를 (예수님을 영접하듯) 영접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그 교회에 호감을 갖게 하고 다음 주일에도 그의 발걸음을 그 교회로 향하게 만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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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15-1절)에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한동안 떠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둘로 더욱 신실하고 새로운 관계 (종과 상전으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오네시모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게 됐던 이유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한 동안 방황하다가 이제 다시 그에게 돌아감을 하나님의 (예정적) 섭리로 보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 있었던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이제 바울을 떠나 빌레몬에게 가는 것을 말하는지 불분명한데, 헬라어 원문을 더 정확하게 번역한 영어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Perhaps this is why he was par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might have him back for ever" (그[=오네시모]가 너[=빌레몬]를 잠깐동안 떠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갖게 하기 위함일 것이리라, RSV).

누가복음 15장(11-32절)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겉보기에 효자였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긴 하지만 부자관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아버지가 있는 이유를 그는 몰랐습니다. 그는 다만 아버지의 재산을 얻어 자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의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그의 몫을 떼어줍니다. 현금도 있었고 밭과 가축 등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다 처분하여 현금을 모아 먼 타향으로 떠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얻을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였기에 아버지의 존재가치는 더 이상 그에게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면서 그의 몫의 재산을 다 허비해버립니다. 그 후에 그는 타인의 일꾼으로서 돼지 치우는 일까지 하게 되었는데 기근이 심하여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맺고 생활합니다. 고향에서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 아래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안 하고 평안하게 살 때에는 아버지의 고마움과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살았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과 존재의 의미가 어떠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품꾼의 하나로 여김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가까이에 있음으로 인하여서 그는 안전함을 느끼고 보호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과는 달리 ‘항상’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금방 아들인 줄 알아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더욱 새로워지고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잠깐동안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은 아버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그로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이 비유에서는 아버지 자신)의 섭리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네시모(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 역)가 빌레몬(아버지 역)의 재물을 훔쳐서 일정기간 떨어져 있었던 것은 그들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탕자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더욱 상대의 필요와 의미를 발견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여기서는 빌레몬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섭리였습니다. 즉,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새롭고 더욱 견실하게 하기 위한 떨어짐이었습니다. 빌레몬이 이제 오네시모를 얻되 과거에서처럼 노예로서가 아니라 동료 크리스천으로서 그리고 사랑받는 형제로 영원히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네시모로 어떤 모양(재산을 훔쳐서 도망하는 모양)으로라도 떠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15절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16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개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종과 같이 아니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갈 때 형식적인 신분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오네시모를 맞이하여 그 밑에 두면 그들은 예전의 상전과 종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관계를 변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관계를 새롭고 견실하게 하라는 당부입니다. 빌레몬, 네가 전에는 오네시모를 다만 종들 중에 하나로 대하였지만, 이제는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하여주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의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종일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은 자유자요 빌레몬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이므로 그를 형제로 대하여 줌이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사랑받는 형제 (ἀδελφός ἀγαπητός: beloved brother)”라는 표현을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골 4:7, 9; 몬 1:16). 빌레몬의 집 교회에 속한 골로새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에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잘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요,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형제와 자매”인 것입니다.

불가(佛家)에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因)과 연(緣),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관계와 사물의 관계가 이 인연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어져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이 불가의 ‘인연(因緣)’과도 같은 ‘관계(關係)’의 특별함을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계획(計劃)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엡 5:22-33; 골 3:18-19), 부모와 자녀의 관계(엡 6:1-4; 골 3:20-21), 상전과 종의 관계(엡 6:5-9; 골 3:22-4:1), 성도와 성도의 관계,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 등 이 모두 다 특별한 관계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형성되어진 관계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오네시모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형제요 협력자가 된 것이 특별한 관계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처음부터 상전과 종으로 만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더욱 특별하고 깊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네시모가 바울의 사랑을 받은 것 이상으로, “육신과 주 안에서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상관(相關)된” 빌레몬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바울에게 협력자가 된 것 이상으로 빌레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요 사랑을 받을 자요, 유익한 사람입니다. 이 오네시모를 바울은 그 자신과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위하여 지금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라고 했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의 사람이 된 빌레몬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동무로 여긴다면 바울의 당부를 들어줄 것입니다. 여기, “동무”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는 ‘협력자, 동역자 (partner, sharer)'란 뜻입니다. 바울을 협력자요 동역자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영접하되 바울을 영접하듯이 그리하라는 당부를 빌레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역시 ‘영접’의 아름다움과 달란트를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영접하되, 그리스도를 대함같이, 바울을 대함같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과 환한 얼굴로 영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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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향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였어도, 혹은 귀한 것을 상실하는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향하여 긍정적이요 열린 마음일 때 우리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축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앎이 필요함은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참고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일꾼으로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여러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 감사하되 이 관계들을 최대로 선용할 것이며, 이 관계성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힘쓰시되,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 주위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열린 마음으로 영접할 것이며,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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