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2, 2015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
언젠가 한국 신문 사회면에 난 기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절도·강도의 짓을 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심을 느꼈다며 모 신학교에 입학원서까지 제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뒤로는 얼마간 중단했던 절도와 강도의 짓을 계속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만 혼자 사는 집을 털면서 성추행까지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이 낮에는 하이드(Mr. Hyde)요 밤에는 지킬 박사(Dr. Jekyll: R. L. Stevenson의 소설 중의 인물)였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면, 계속 절도와 강도의 짓을 하는 것은 누구의 부름입니까?
그전에도 악명 높던 조직폭력배의 두목이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밝은 길을 가겠다고 하여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와 뜻으로 교회생활을 하게 되고 또 모 신학교에 등록하고 착실한 전도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돌변하여 과거의 깡패의 기질이 나오고, 사기 등으로 다시 검거되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무엇이 사람의 뜻입니까?
우리가 판단하기 힘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이 신문기사거리가 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일시적 기분이나 착각으로 일을 벌려 놓고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갖다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시적 감정에 따른 결단이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강권적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의 삶의 모습과 성질이 아주 사라졌나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과거의 나를 (계속적으로) 버릴 힘도 아울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도 다시 나의 죄 된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적으로 저버리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 (착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고 교회생활도 하고 신학도의 길도 가다가 저버린 사람은 다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을 들을 수 없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자기만족과 감정과 착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헤아리던 사람이라도 후에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순전히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이었는지는 그 사람의 삶의 열매로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의 삶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고 명성을 날렸지만, 늘 그를 괴롭히고 그로 끊임없이 빠져들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곧 음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천한 여자와 동거하고 적법하지 않은 아들까지 얻게 되었지만 그의 음욕(淫慾)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가 괴로움과 번뇌 가운데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어린아이들의 음성인 것 같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의 노래와 같이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깬 어거스틴에게서 음란의 마음이 온전히 제하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회심(conversion)하는 순간입니다. 아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이요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요 부르심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강권적으로 역사합니다. 내가 과거의 삶과 내게 속하여 있던 것을 잊지 못하여서 다시 돌아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게 나를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전에는 (겉모양의)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사역을 위하여 포기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하던 일들을 포기하고 결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산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정하신 역사하심을 체험하였을 때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과거의 행적은 때로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요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여왔던 종교전쟁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의 주장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내분과 갈림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하심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잘못 판단함과 갈림의 아픔과 상처 가운데서도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롬 8:28 참조).

2
   1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과 교인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일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일 뿐 아니라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 아니기에 바울은 사람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12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도’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무협파의 계승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 무협파의 특징적인 비기(秘技)나 도의 핵심(核心)을 전승받거나 습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어떤 인간의 스승을 통해서나 사도를 통하여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속하여 있을 때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이었지만 가말리엘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수하여 준 적이 없습니다. 가말리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어떤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의 복음의 진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메섹에서 눈이 안 보이는 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나 주위사람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 그의 공생애의 삶이 어떠하였나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주변 이야기이지 복음의 내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증거자로서 일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음이었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도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계시(啓示)’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륖시스(ἀποκάλυψις: 히브리어는 '갈라')는 “벗기다, 제거하다, 감추인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알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라고 했는데, 비밀을 알게하신 것이 “(특별) 계시”의 의미입니다.
계시(啓示)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그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시편 19:1; 롬 1:20).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일반계시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창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계시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과 방법을 밝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과 뜻과 구원계획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십니다. 특별계시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현현(Epiphany: 창 16:13, 31:11; 출 33:20-23, 33:9; 왕상 19:2), 예언(민 12:6; 히 1:1; 벧전 1:11)과 이적(마태 14:13-21; 마가 4:35-41; 요한 11장) 등이 있습니다. 특별계시 중에 가장 독특하고 두드러진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구원을 증거케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도 특별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과 영생의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13-14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3-14절에서 바울은 과거의 그의 전력(前歷)을 회상합니다. 그는 과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고자 임의로 인간적인 생각과 주장 가운데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스스로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모습은 밝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유대교에 속해 있었을 때에 그는 그의 바리새인적인 열심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잔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잔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세오’(πορθέω)는 ‘완전히 파괴시키다’ ‘멸망시키다’의 뜻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와 같은 과거의 행적을 말함은 그가 유대주의에 속하고 유대주의적 율법에 열심이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음을 강조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유대주의자로서 율법을 열심히 지킴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드러내게 만들고 따라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대강의 내역에 관하여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기 전 바울, 곧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8장 1절에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8장 3절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9장 1-2절에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22장 3-5절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그리스도의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26장 9-12절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색출하여 잡아들이고 옥에 가두고 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스스로 생각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무시무시하고 잔악한 일들을 감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그 가운데 없었습니다. 요즘 사울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면 이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원수요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쓰신다면 나는 그러한 하나님은 믿지 않겠노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시고 많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10절에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함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인되었던, 그리스도와 원수 되었던 자신도 포함시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기실은 하나님과 원수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속하여 있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역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목사라도, 장로라도, 집사나 어떤 사람이라도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입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택정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리조(ἀφορίζω)”는 ‘구분하다, 분리하다, 따로 떼어놓다, 지명하다(separate, take away, set apart, appoint)’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향하신 특별한 뜻과 목적을 갖고 계셨는데, 바울이 아직 세상에 있기 전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오(καλέω)”는 ‘(이름을) 부르다, 불러들이다, 소집하다(call [in], name, summon)'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을 그의 어머니에서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 가운데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이에 응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실현됩니다.

   16절: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신 사람마다에 특별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심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행전 9:15-16, 22:21, 26:16-18).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증거케 하실 때,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또한 그 속에 아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울에게 전도의 담대함과 권능을 덧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신 계획이 각기 다르지만 동일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 나타나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이나 착각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사를 경험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우리가 먼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되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아직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적 명령을 하십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과 상의할 때, 하나님의 뜻 행함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먼저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음은 먼저 사도된 자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봄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계시가 확실하기에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을 더욱 잘 알기 위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메섹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얼마를 머물면서 기도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뜻을 헤아리며 그의 부르심에 응할 제반 준비를 갖춘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신학교에서 삼 년을 머물면서 공부하는 것도 바울의 아라비아의 경험을 하기 위함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갖추기 위함입니다.
교인들에게 때로 기도원을 찾음이, 수련회가 필요한 것은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과 분리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부르심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더욱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고자 함입니다.
아라비아의 기간을 마친 다음에 바울은 전도의 현장으로 향합니다. 그가 간 곳이 다메섹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놀라우신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게바를 만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소요한 기간이 약 삼 년이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이방인들의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리고 그 부르심을 그가 알 때 그는 과거의 잘못된 삶의 모습들을 청산하였습니다. 그의 생각과 논리와 학문으로는 과거의 삶이 하나님을 위하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을 밝히 드러내시매 그는 과거에 그가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삶은 바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선하신 뜻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현재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계획과 목적에 어긋나 있다면 과감히 우리의 현재의 삶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놀라우신 축복을 경험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평안이 우리를 주장하실 것입니다.


 

Sunday, July 5, 2015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0)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
어떤 미국인 목사님이 부목사로 몇 년간 목회하다가 1,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가서 첫 주일 예배를 잘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나이 많으신 할머니가 그와 악수를 하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한마디합니다. “아유, 젊으신 목사님이 이 많은 교인들의 말을 일일이 다 들어주려면 고생 꽤나 하셔야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서 교인들과 인사하는 것을 중단하고 급히 단에 올라가서 아직 흩어지지 않은 교인들을 향하여서 입을 엽니다. “저는 이 교회에 여러분의 요구사항을 일일이 들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여러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따라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원하신다면 저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두 세 교인이 “우리가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저기서 “저희도 목사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잠시 후에는 전체 교인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목사님은 그가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였으며,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아래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복종시키는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가끔 설교를 준비하는 저 자신도 딜렘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심과 교인들이 듣기를 원하는 설교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다른 복음’ ‘다른 말씀’ 전함을 허용하지 않으심을 강하게 느끼기에 교인들의 원함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주장과 의견이 교환되고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몰몬교에 속한 사람들이 참으로 전도를 열심히 잘 감당합니다. 둘씩 짝지어서 전도를 하러 다니는데 그들의 전도 열심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평안이 깃들어있는 표정만 보면 그들이 분명 기성 교회의 신자들보다 복음의 진수를 그 마음에 경험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저의 집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서 장미를 파는 사람을 봅니다. 통일교에 속하여 있는 사람입니다. 장미를 파는 사람은 일정한 주기로 바뀌지만 통일교를 위한 그들의 수고는 한결같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장미를 팔면서 책을 보거나 무엇에 골똘하여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던 가수 초년생도 있었고 학식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들로 저렇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게 할까 궁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찾아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집 안으로 들인 적은 없지만, 가끔은 ‘저들은 어떻게 훈련하길래 저렇게 충성스럽게 개인 날이나 궂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가리지 않고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전도하러 다니나?‘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단에 속한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와 강요와 할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러한 전도의 열심은 본받을 만 한 것입니다.
기성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러한 열심이 아쉽습니다. 여러분의 자유함 가운데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생활의 일부를 희생하면서 교회와 복음증거를 위한 열심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헌신은 개인의 의지와 작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맛본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바울은 6절에서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이지만, 교회생활을 한다고 동일한 이해와 동일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것을 듣고 새기는 사람이 각기 다른 귀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엉뚱한 이해와 엉뚱한 복음을 좇는 일이 나타납니다.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교인들 중에 가끔 제게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러한 뜻으로 설교를 하지 않아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설교를 한 적이 없는데요.” 전하는 사람의 메시지가 제대로 들려지지 못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낸 모세는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 수 있고 부릴 수 있는 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욕구에 따른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여호와’라고 해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하늘에 속한 기쁨과 축복을 선포하는데, 여전히 땅의 것에 연연하며 땅의 축복만을 진정한 축복이라고 여기는 미련한 사람들은 선포된 복음을 자기의 욕구에 맞추어서 달리 듣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강도 있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외치십니까?
바울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고수하고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참복음에서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도 모두 ‘다른 복음’(ἕτερο 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죄사함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고, 영생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데, 그위에 할례나 율법 지킴을 구원의 요건으로 제시할 때, 이는 ‘다른 복음’이요,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목사님, 왜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듣는 사람 헷갈리네요.’라고 질문할 성도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고, 6장 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고,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했고, 8장 4절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함이 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어느 한 사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율법의 기준으로는 죄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원의 규정을 적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좋은 소식(good news)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율법대로 살지 못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임하여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어짐이 믿음입니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우리를 의롭게 하며 구원받게 하는 요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아도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단서도 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은 구원받기 위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이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 사람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 받음도 세례가 구원의 한 요건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크리스천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겠노라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부모가 어린아이를 세례 받게 할 때, 혹 어린아이에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때라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보험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성인의 세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아세례도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른 신앙인으로 잘 키우겠다는 공적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른 복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라고 말씀하심은 변경의 여지가 없는 케리그마(κήρυγμα: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겠지! 예수님은 ‘구원으로 향한 길(the way)'이라고 하셨지만, 그 길은 큰 길이긴 하지만 유일한(only) 길은 아닐꺼야. 다른 종교도 구원으로 향한 다른 작은 길은 될 수 있지!’라고 하며 나름대로 논리와 주장을 전개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이 사람의 마음에 이 세상 주관자인 사단이 비집고 들어옵니다.‘그럼, 네 생각이 맞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 하나님은 광대하신데 그렇게 편협한 구원의 방법만 갖고 계시겠어?’라며 우리의 생각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사단의 미혹에 넘어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구 때문에, 어떠한 마음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되어진 영생과 축복을상실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17절에 케리그마로 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토를 달고자 할 때, 임의 해석하고자 할 때 인간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야 할(proclaim) 목회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또는 교인들을 위한답시고 말씀의 강도를 스스로 조정할 때 이 사람은 ‘다른 하나님의 말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듣기를 들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목회자가 하늘에 속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요 인기가 없다고 판단하여 세상축복-만사형통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을 증거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경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으로 향한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설교한다면 이는 성도들을 혼잡케 하는 변경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란 강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어 9절에서도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이 말씀으로 참으로 중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역설(力說)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라고 했고 9절에서는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얻고, 구원함에 이르며 영생하게 됩니다”라고 선포하였는데, 후에 “이전에 내가 선포한 것은 아직 복음이 잘 모를 때 얘기고 실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야 됩니다.”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말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가 바울이나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려 내려온 천사라고 하더라도, 혹은 위대한 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하나님께로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런 망발(妄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단호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좋은 소식은 더하여질 수도 감하여질 수도 없는 유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Let him be accursed"--"아나세마 에스토(ἀνάθεμα ἔστω)"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선포입니까?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잘못된 복음--“다른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반문함으로써 잘못된 복음을 좇는 삶을 살 때 이로서 망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이 항상 바르고 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또한 바울의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사도행전 15장 36-41절에 기록된 마가로 인한 바나바와의 다툼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그는 부름(calling)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힘썼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나 원함이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도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바른 하나님의 길을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고 반문했습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사역’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원함이 서로 상충할 때, ‘사람들을 좋게 할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세상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디 하늘의 것만 바라보고 살 수 있나요? 땅에 속한 것이 하늘에 속한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성경은 하늘나라의 것을 말씀하는데 누가 하늘나라에 가보았나요? 그건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요. 성경의 기록은 2,000년 전의 것이므로 이대로 믿지 않아도 되요.” 이것이 목회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3
본문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음이 이상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함이 요란한 짓이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역설하며 경고합니다.
임의로 ‘다른 복음’을 증거하고, 임의로 ‘다른 복음’을 좇을 때, 이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죽음의 효력성을 무효로 만드는 자요, 사도들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바로 믿고 바로 좇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영에 속한 삶에 진전이 있으며 성화의 과정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좇지 않는 사람의 신앙의 삶은 항상 제자리에서 답보(踏步)하게 되거나 아니면 후퇴하게 됩니다. 일생을 교회생활을 하지만 마지막 때에도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며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윤리 교과서의 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깊숙이에 와 닫기를 바라며,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참 기쁨을 끊임없이 샘솟듯이 공급하여 주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