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2, 2015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바울이 전한 복음” (갈 1:11-17)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
언젠가 한국 신문 사회면에 난 기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절도·강도의 짓을 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심을 느꼈다며 모 신학교에 입학원서까지 제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뒤로는 얼마간 중단했던 절도와 강도의 짓을 계속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만 혼자 사는 집을 털면서 성추행까지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이 낮에는 하이드(Mr. Hyde)요 밤에는 지킬 박사(Dr. Jekyll: R. L. Stevenson의 소설 중의 인물)였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면, 계속 절도와 강도의 짓을 하는 것은 누구의 부름입니까?
그전에도 악명 높던 조직폭력배의 두목이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밝은 길을 가겠다고 하여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은혜와 뜻으로 교회생활을 하게 되고 또 모 신학교에 등록하고 착실한 전도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돌변하여 과거의 깡패의 기질이 나오고, 사기 등으로 다시 검거되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무엇이 사람의 뜻입니까?
우리가 판단하기 힘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이 신문기사거리가 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일시적 기분이나 착각으로 일을 벌려 놓고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갖다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일시적 감정에 따른 결단이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강권적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나의 삶의 모습과 성질이 아주 사라졌나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과거의 나를 (계속적으로) 버릴 힘도 아울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도 다시 나의 죄 된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적으로 저버리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 (착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고 교회생활도 하고 신학도의 길도 가다가 저버린 사람은 다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을 들을 수 없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자기만족과 감정과 착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헤아리던 사람이라도 후에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순전히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이었는지는 그 사람의 삶의 열매로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의 삶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고 명성을 날렸지만, 늘 그를 괴롭히고 그로 끊임없이 빠져들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곧 음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천한 여자와 동거하고 적법하지 않은 아들까지 얻게 되었지만 그의 음욕(淫慾)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가 괴로움과 번뇌 가운데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어린아이들의 음성인 것 같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의 노래와 같이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깬 어거스틴에게서 음란의 마음이 온전히 제하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회심(conversion)하는 순간입니다. 아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이요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요 부르심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강권적으로 역사합니다. 내가 과거의 삶과 내게 속하여 있던 것을 잊지 못하여서 다시 돌아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게 나를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전에는 (겉모양의)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사역을 위하여 포기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하던 일들을 포기하고 결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산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정하신 역사하심을 체험하였을 때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과거의 행적은 때로는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요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여왔던 종교전쟁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의 주장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내분과 갈림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하심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잘못 판단함과 갈림의 아픔과 상처 가운데서도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롬 8:28 참조).

2
   1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과 교인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일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일 뿐 아니라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 아니기에 바울은 사람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12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도’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무협파의 계승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 무협파의 특징적인 비기(秘技)나 도의 핵심(核心)을 전승받거나 습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어떤 인간의 스승을 통해서나 사도를 통하여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속하여 있을 때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이었지만 가말리엘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수하여 준 적이 없습니다. 가말리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어떤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의 복음의 진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메섹에서 눈이 안 보이는 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나 주위사람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 그의 공생애의 삶이 어떠하였나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주변 이야기이지 복음의 내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증거자로서 일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음이었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도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계시(啓示)’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륖시스(ἀποκάλυψις: 히브리어는 '갈라')는 “벗기다, 제거하다, 감추인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알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라고 했는데, 비밀을 알게하신 것이 “(특별) 계시”의 의미입니다.
계시(啓示)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그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시편 19:1; 롬 1:20).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일반계시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창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계시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과 방법을 밝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과 뜻과 구원계획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계시를 주십니다. 특별계시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현현(Epiphany: 창 16:13, 31:11; 출 33:20-23, 33:9; 왕상 19:2), 예언(민 12:6; 히 1:1; 벧전 1:11)과 이적(마태 14:13-21; 마가 4:35-41; 요한 11장) 등이 있습니다. 특별계시 중에 가장 독특하고 두드러진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구원을 증거케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도 특별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과 영생의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13-14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3-14절에서 바울은 과거의 그의 전력(前歷)을 회상합니다. 그는 과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고자 임의로 인간적인 생각과 주장 가운데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스스로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모습은 밝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유대교에 속해 있었을 때에 그는 그의 바리새인적인 열심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잔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잔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세오’(πορθέω)는 ‘완전히 파괴시키다’ ‘멸망시키다’의 뜻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이와 같은 과거의 행적을 말함은 그가 유대주의에 속하고 유대주의적 율법에 열심이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음을 강조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유대주의자로서 율법을 열심히 지킴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드러내게 만들고 따라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대강의 내역에 관하여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기 전 바울, 곧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8장 1절에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8장 3절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9장 1-2절에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22장 3-5절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그리스도의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26장 9-12절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색출하여 잡아들이고 옥에 가두고 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스스로 생각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무시무시하고 잔악한 일들을 감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그 가운데 없었습니다. 요즘 사울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면 이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원수요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쓰신다면 나는 그러한 하나님은 믿지 않겠노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시고 많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10절에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함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인되었던, 그리스도와 원수 되었던 자신도 포함시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울이 기실은 하나님과 원수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속하여 있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역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목사라도, 장로라도, 집사나 어떤 사람이라도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입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택정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리조(ἀφορίζω)”는 ‘구분하다, 분리하다, 따로 떼어놓다, 지명하다(separate, take away, set apart, appoint)’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향하신 특별한 뜻과 목적을 갖고 계셨는데, 바울이 아직 세상에 있기 전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부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오(καλέω)”는 ‘(이름을) 부르다, 불러들이다, 소집하다(call [in], name, summon)'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바울을 그의 어머니에서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 가운데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이에 응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실현됩니다.

   16절: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신 사람마다에 특별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심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행전 9:15-16, 22:21, 26:16-18).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증거케 하실 때,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또한 그 속에 아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울에게 전도의 담대함과 권능을 덧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신 계획이 각기 다르지만 동일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 나타나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이나 착각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사를 경험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우리가 먼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되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아직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적 명령을 하십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과 상의할 때, 하나님의 뜻 행함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7절: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먼저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음은 먼저 사도된 자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봄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계시가 확실하기에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을 더욱 잘 알기 위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메섹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얼마를 머물면서 기도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뜻을 헤아리며 그의 부르심에 응할 제반 준비를 갖춘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신학교에서 삼 년을 머물면서 공부하는 것도 바울의 아라비아의 경험을 하기 위함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제반 준비를 갖추기 위함입니다.
교인들에게 때로 기도원을 찾음이, 수련회가 필요한 것은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과 분리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부르심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더욱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고자 함입니다.
아라비아의 기간을 마친 다음에 바울은 전도의 현장으로 향합니다. 그가 간 곳이 다메섹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놀라우신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게바를 만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소요한 기간이 약 삼 년이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이방인들의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리고 그 부르심을 그가 알 때 그는 과거의 잘못된 삶의 모습들을 청산하였습니다. 그의 생각과 논리와 학문으로는 과거의 삶이 하나님을 위하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을 밝히 드러내시매 그는 과거에 그가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삶은 바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선하신 뜻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현재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계획과 목적에 어긋나 있다면 과감히 우리의 현재의 삶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놀라우신 축복을 경험할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평안이 우리를 주장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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