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2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5-11)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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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신문에서 가끔 일생동안 모은 재산을 교육기관이나 기타 구제기관에 쾌척(快擲)하시는 할머니들의 기사를 보면 그분들이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떠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그분들이 여유 있는 삶을 산 분들이 아니라 평생 삯바느질로 돈을 모은 사람이며, 또 어떤 분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기도 하고 또 남의 식당에서 일하다가 식당을 경영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재산을 물려줄 자손이 없어서 공공기관에 환원하는 분도 있지만,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재산을 물려주고 나머지를 다 사회에 환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재물을 움켜쥐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이런 분들의 기사가 더욱 훈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채근담(菜根譚)에 있는 말입니다:
    “나무는 뿌리로 돌아감에 이르러서야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것이 보람 없는 영화였음을 알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기에 이르러서야 자녀와 옥(玉)과 비단(緋緞) 따위의 재물이 무익했음을 안다
.”
나무가 무성한 한 때를 보내지만 죽을 때가 되면 일시적으로 꽃 피고 무성함이 헛된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이 남을 속여가면서 악착스럽게 재물을 모은들 다 헛된 일일뿐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沈淪)과 멸망(滅亡)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지나친 욕심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로써 시험과 올무에 걸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한 삶을 산 사람이라도, 아무리 권세가 많은 삶을 산 사람이라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의 재물과 권세와 이로 향한 욕심을 다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소망이 있는 것은 이 세상 다음에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하고 복된 삶이 있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옷의 비유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까지 달라지기도 합니다. 거지라는 (신분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안에 아무리 훌륭한 생각과 인격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주위사람들이 그를 거지취급하며 그도 결국에 거지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왕의 (신분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 속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자질 역시 열등하다고 하더라도 주위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여기고 받들기에 왕 노릇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임금인 사단에 속한 사람의 옷,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면 주위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여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자신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 셔츠(Clergy Shirts) 입기를 즐겨합니다. 입기가 간편한 까닭도 있지만, 젊지 않은 나이(37세)에 신학교를 가고 40세에 목사로 안수 받았기에 제가 목사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도 각인시키기 위하여 목회자 셔츠를 즐겨 입기로 작정했습니다. 목회자 셔츠를 입고 있기에 저를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도 목회자로서 합당한 행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와 아울러 제가 목사임을 밝히기를 즐겨합니다. 그렇게 밝힘으로 목회자의 품위를 잃지 않는 행동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해보면, 목회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앞에서도 “나는 목사입니다”라고 밝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후에 혼자 쓴웃음을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잡상인이 찾아와서 물건을 사라고 하는데, 그 잡상인에게도 “내가 목사”라고 밝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늦게 입은 목회자라는 직분의 옷에 감사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한 분 있습니다. 최상의 교육과 학위를 받으시고 핵 공학 계통의 연구소에 근무하시고 또한 14년 동안 장로생활을 하시면서 교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항상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의 최선을 드리려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현재 나이가 오십대 후반인데, 그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겠다고 보스턴(Boston)에 있는 한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장로로 14년을 시무하여온 교회의 ‘장로 전도사’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결정이 ‘잘된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를 떠나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저는 몸이 감전되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남은 일생동안,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옷을 입고자 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앞으로 목사가 될 때 목회를 잘할 것인가 잘 못할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제게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목회하고자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의 목회가 못마땅하게도 받아짐을 압니다. 그러나, 제게 중요한 것은 저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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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Put to death therefore what is earthly in you)”고 권고합니다. 우리 겉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들 중에 땅에 속한 것들--즉,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는 음란(fornication), 부정(impurity), 사욕(passion), 악한 정욕(evil desire)과 탐심(covetousness)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행동으로 짓는 성적인 잘못들과 지나친 욕심의 마음과 행동들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하심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covetousness is idolatry)”고 한 것은 지나치게 땅에 속한 것을 탐하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땅에 속한 것을 그 앞에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는 것들
“땅에 속한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땅에 있는 지체를 따르는 삶’을 여전히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시고 꾸짖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징계인데 이렇게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고, 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했고,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징계를 주실 때 깨닫지 못하고 땅에 속한 것들을 여전히 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나갑니다. 로마서 1장 24절 이하에서 보는 바대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자기의 정욕과 탐심대로 생각하며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내어 버려 두신다”고 했습니다(롬 1:24, 26, 28). 그러나 아주 내어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임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를 쌓아간다(롬 2:5)고 말씀합니다.

5절에 열거된 것들을 계속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이들은 “불순종의 자식들”(the sons of disobedience, 어떤 다른 사본들에는 이 말이 추가되어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불순종의 자식들”--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임--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7절: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골로새 성도들의 과거의 삶
골로새 성도들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과거의 삶이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가치판단이 세상에 속하던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서 바울은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세상 권세 잡은 자(=사단)의 뜻을 따라 육체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의 대상이었습니다.

    8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제 벗어 버려야 할 것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전에 갖고 있던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다음에는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란 5절에 열거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과 함께 8절에 열거된 것들 곧 분(ὀργή, θυμός)과 악의(κακία)와 훼방(βλασφημία)과 입술의 부끄러운 말(αἰσχρολοία ἐκ τού στόματος ὑμών)입니다.
한글성경은 분(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문에는 “노함”(또는 노, ὀργή: wrath)과 분냄(또는 분, θυμός: anger)의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함(외적으로 표현된 화)과 분냄(마음 속에 간직된 화)은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노여움의 감정과 그 표현으로 세상의 욕심과 정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악의(malice)는 다른 사람을 헤치거나 그에게 불이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의 뜻입니다.

훼방(slander)이란 노여움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을 중상하거나 비방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부끄러운 말(foul talk from your mouth)은 음란의 말이나 남을 해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제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32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납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사단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들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Now put them all away)”고 권고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을 때(엡 2:12)는 우리가 이와 같은 정욕과 탐심, 분노와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의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갔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하나님이 있는 자가 된 이제는 이 모든 이전의 옛 사람의 옷은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9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
바울은 8절에 이어서 벗어버려야 할 것 한 가지를 더 열거하는데, “서로 거짓말을 말라”고 합니다. 이 거짓말하는 것도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거짓말을 멀리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크리스천의 숫자가 꽤 되는데, 내일이면 밝혀질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그가 정치인(물론 다른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하지만)이라도 삼가야 할 일입니다.

8절에 이어서 “벗어 버리라”(put off)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고 함으로써 옛 사람의 마음의 모습 뿐 아니라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까지 온전히 다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의 전부가 그래 왔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벗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면’(롬 8:9) 이것이 가능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데 옛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즐기고 있는 것은 아직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계시긴 한데, 우리 마음 중심을 그 분께 내어드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입술로 고백하고 그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이제 새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엡 4:31).
이 새 사람은 다름아니라 잃어버렸던 창조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타락하기 전에 첫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 뱀의 간계로 인하여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사람의 모양으로 살되 그들보다 더욱 커다란 욕심을 갖고 살아도 괜찮다’, ‘그 욕심을 이루는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까닭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의 세상축복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세상의 일이 순조롭습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 안에서 소망하고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지 결코 우리 신앙의 첫 번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전에는 사단의 간계로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잘 믿지 못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고 새 사람의 옷을 입혀주시니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고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골 1:10 참조).

    11절: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안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국가나 종족이나 교육이나 신분에 차별이 없음
“거기는”이라고 함은 “새 사람의 삶에는”(in this new life, Living Bible)이란 뜻입니다. 새 사람의 삶을 사는 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 할례인(=이스라엘인)이나 무할례인(비이스라엘인)이, 야인(barbarian)이나 스구디아인(Scythian)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Christ is all, and in all)"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계시며(골 1:15),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골 1:16),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고(골 1:17), 그가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국가나, 종족이나, 교육이나, 신분이나, 성에 차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곧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엡 2:14-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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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우리 믿는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믿지 않는 사람의 세상과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과 한 사회,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삶을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구분된 삶을 살 것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동화되지 말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옷을 입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분냄과 악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이 있습니까?
이러한 옛 사람의 모습과 행위는 과감하게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하며, 그리스도의 영을 안에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나타내는 새 사람의 삶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위엣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4)

                                              “위엣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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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엣것”을 찾는 현실
얼마 전에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둘째,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셋째,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넷째, 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다섯째, 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두라;
여섯째, 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일곱째,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여덟째, 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아홉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열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이러한 사례들은 땅엣것을 생각함으로 망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20불 짜리 지폐를 주었습니다. 그는 공짜로 생긴 20불에 재미가 들려 혹 또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땅만 쳐다보고 걷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는 평생을 땅만 쳐다보며 걸어 다니면서 물건을 주웠는데, 단추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리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것들을 줍느라 평생 맑은 하늘과 푸른 나무들과 지저귀는 새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잃고 결국 넝마주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격언에 “땅엣 것을 바라보는 자는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만 땅엣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땅엣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국의 어느 조사기관이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정직하게 세상의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는 항에 “그렇다”고 답을 한 사람이 80%가 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정직하게 세상의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보는 곳입니다. 해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문을 보면서 분개하고 자신은 자유로운 것 같은 부분들에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복 주실 믿음을 지키는 삶, 정직한 삶을 살아가면 당장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볼 것 같기에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마태 5:13-14)고 말씀하시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A장로가 그대로 살지 않고, B권사가 또한 그대로 살지 않고, C집사가 그렇게 살지 않는데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반문하며 그러한 삶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2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조건 절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권면의 말씀은 아직 자아와 교만과 주장이 죽지 않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때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함께 부활한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믿기로 작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의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불의에 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0-11절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고, 또한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의 장인 마태복음 5-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하실 때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몰려든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제사이요, 병고침과 귀신 내어쫓음과 다른 이적은 젯밥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사가 아니라 젯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초점은 말씀에 있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고, 모순투성이요, 그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볼 것 같은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은혜가 되고, 따라서 그 말씀대로 살기를 사모하고 힘 쓸 때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의 사람이 되어있지 못하고 젯밥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일진데 우리의 생각하고, 찾고, 구할 것은 “위엣것”--“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땅엣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위엣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반문하셨는데, ‘믿어지지 않던 하늘의 일’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힘써 “위엣것”을 찾아야 할 이유는 그 “위에” 예수님께서 계시되 죽음과 악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21절에서 바울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힘써 “위엣것”을 찾아야 할 이유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빌 3:20)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거나 유학 오려는 사람은 미국이 어떠한 곳인가, 내가 가는 주(state)는 어떤 곳인가 열심히 자료조사를 합니다.
미국 내에서 타 주로 이사하려는 사람은 그가 이사할 주(state)와 타운(town)의 환경과 지리에 대하여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막상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생활에 서툴지 아니하고 빨리 적응하여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위엣것”을 찾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시민권은 아무리 길어도 백년이 고작인데,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4-5년 공부할 곳에 대하여 혹은 20-30년 살 곳에 대하여 그렇게 미리 조사하고 익숙하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삶의 기반이 될 하늘나라에 대하여는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곳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더 평안하고 즐겁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살피고 알아봄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곳에서의 삶이 우리 믿음과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모습과 태도로 사는가’와 무관하지 않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되, “땅엣것”에 얽매이며 지나치게 탐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엣것을 생각하라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ōgĩto ērgŏ sum)라고 했고,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함으로 존재하고, 사람은 생각하기에 다른 동물과 구분됩니다.
땅엣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이 땅에 존재하고, 위엣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명이 하늘에 존재합니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위엣것을 생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육의 몸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육신의 생각대로 우리가 살면 우리는 이 세상에 묶이며 이 세상과 함께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살리는 영의 생각--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5-7절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영의 생각을 하지 않고 육신의 생각--자연인의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또한 할 수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크리스천이 무엇으로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과 구별될 수 있습니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로 크리스천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크리스천이요, 아직 믿음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아직 크리스천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로 알 수 있지만, 내가 영의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있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아무리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외쳐도 위엣것을 찾을 수가 없고 위엣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선물로 또는 증거로 주십니다.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땅엣것을 생각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롬 8:6) 때문입니다. “땅엣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5절에 열거됩니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라”의 헬라어 ‘프로네이테(φρονείτε: think, have in mind)'는 현재형 명령인데, 이는 단 한 번만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각하라‘(continue to think)는 권고입니다. 따라서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지속적으로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보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에서 일주일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책을 집어들면 그 내용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학문에 진보가 있기 위하여서는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를 계속 생각하여야 합니다.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그 주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자기의 연구하는 것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에 성공하려면, 자나깨나 장사를 생각하고 사업장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거나 혹은 망하기도 합니다. 몇 개의 세탁소를 갖고 있는 분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이분이 골프를 하는데 골프가 장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골프에 재미가 들려서 일주일에 2-3일 골프장에 나가는 사람 치고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나의 믿음과 크리스천 됨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그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게 없을 때 이러한 일은 커다란 부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실 때, 이러한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거리입니다.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우리가 “땅엣것을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은 땅엣것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죄와 허물과 땅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죽기로 작정하고, 그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그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못 박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성도의 생명은 더 이상 이 세상 임금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그의 생명이 감추인 사람은 그가 이 세상을 살 때 연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죽은 자 같으나 기실은 산 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4-7절에서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신 것”,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을 과거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헬라어 문법으로는 a-orist). 우리가 죽은 자들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될 것과 하늘에 앉는 자가 될 것이 확실하기에 이와 같이 과거적으로(헬라어 문법의 a-orist는 사실은 과거적인 용법이 아니라 one-time action임, 시제가 아니라 사건이 단회적인 것임을 강조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남
믿는 사람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 하셨다면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주여 곧 오시옵소서”(마라나타)라고 하며 주의 다시 나타나심을 고대하며 그들 앞에 놓인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성도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요, 성도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살전 4:16) 나타나실 때 성도들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3
성도의 결단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당장에 잘되는 것을 보면 그 방법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위엣것”을 찾지 않게 하며 “땅엣것”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어가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위엣것”을 귀히 여기고 찾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위엣것”을 기쁨으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비로소 우리는 즐거움으로 “위엣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과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금욕주의는 유익한가?” (골로새서 2:20-23)

                                           “금욕주의는 유익한가?” (골로새서 2:20-23)
   
                                                                        1
“깨진 독에 물을 채워라”
오래 전에 아는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달마야 놀자’라는 한국 영화의 비디오를 빌려서 본 적이 있습니다. 조폭 간의 싸움에 패한 다섯 명의 폭력배들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산사로 들이닥치면서 그곳에서 스님들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머물기를 강청하는 폭력배들의 거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로써 주지스님은 그들에게 일주일 머물 것을 허락하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도 폭력배들은 떠날 생각을 안하고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발생하지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댑니다. 해서, 그들을 못마땅히 여기는 스님들과 조폭 간에 내기를 벌이는데, 부처님께 3천 배 올리기, 고스톱, 물 속에서 오래 견디기, 3-6-9 게임을 한 결과 승부는 2대 2로 조폭과 스님들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서로 떠나라 못 떠나겠다 티격태격할 때, 주지스님이 승부를 가름하는 문제를 냅니다. 깨진 독 두 개를 사찰 마당에 준비시키고,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합니다. 신발 짝으로 깨진 부분을 막으려고 해보기도 하고, 사람의 배 위에 독을 뒤집어놓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도 했지만 이 방법 저 방법이 다 여의치 않고 제한된 시간은 다 되어갑니다. 이때 갑자기 폭력배들의 우두머리(박신양 분)가 독을 들고 따라오라고 지시하고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물이 제법 고여있는 개울가이고, 그는 부하들에게 그곳에 독을 던지라고 소리칩니다. 그런 후에, 물로 뛰어들어서 독을 물 속으로 누르니 깨진 독에 물이 채워지고 또 넘쳐납니다. 주지스님(김인문 분)은 이를 보며 “물이 철철 넘치는구나”라고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선문(禪問)과도 같은 질문에 대한 모범 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우두머리가 주지스님에게 ‘왜 우리를 감싸주느냐?’ ‘스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착한 일을 하라든지 남을 괴롭히지 말라든지 바라시는 것이 있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때 주지스님은 “그럼 너는 밑 빠진 독에 물을 퍼부을 때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채웠어?”라고 질문하고, 우두머리는 “전 그냥 항아리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지스님은 “나도 밑 빠진 너희를 그냥 내 마음 속에 던졌을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달마대사를 그 태두(泰斗)로 하는 선불교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스님의 대답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리 ‘밑 빠진 독’과 같이 부족한 인생은 우리의 능력과 수고로는 물과 같은 성령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울 수가 없습니다. 채운 것 같으면 어느새 우리의 내면 적인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갈급하여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던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으로 풍덩 뛰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금욕적인 삶도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며, 우리는 여전히 곤고하며 매 마른 심령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의 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 머물라”
물고기가 물 밖에 있으면 아무리 펄떡거리더라도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물고기다움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를 물 속으로 놓아줄 때 그 물고기의 작은 동작도 물고기의 격에 맞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수영솜씨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애쓰지도 않는데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음으로 해서 물고기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꼬리지느러미를 한 번 탁 치면 빠른 속도로 물 속을 헤치고 나갑니다.

믿는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자기 의지로써 경건하여지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발버둥치거나 금욕의 삶을 살더라도 그는 자연스럽지 못하며, 물 밖의 물고기가 죽어가듯이 그렇게 할딱거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의 그런 애씀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 K 집사가 나 없이 경건하게 살려고 참 많은 노력을 하는구나. 그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니 축복해줘야겠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부단한 노력과 수고가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기에 다 헛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강 안으로 뛰어드니, 나의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가 자연스럽고 부드러움으로 하나님께 비춰집니다. 믿는 사람의 크리스천다움은 하나님 밖에서 억지로 힘들게 하는 몸놀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그 삶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물이 필요합니다.

물 밖에 있던 물고기가 물 속으로 놓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하나님 밖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 안으로 놓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은혜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바다 속에 살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 생각 하나 하나를 크리스천답게 하고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지게 만듭니다.

금욕주의와 하나님
주전 300년부터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Stoicism)에 속한 사람들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금욕은 하나님 밖에서 그들 철학의 선을 이루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믿음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 중에 일부(Saturninus가 대표적)와 마르시온주의자들(Marcionites)도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자처하던 이단이었는데, 그들이 금욕의 삶을 산 것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아버지, 절대적인 신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신, 데미우르고스(Demiurgos)와는 다른 신이라는 그들의 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데미우르고스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자식을 갖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참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만든 신이 데미우르고스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논리 속에 있는 절대적인 신에게 귀의하기 위하여 데미우르고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데미우르고스가 축복하는 결혼, 자녀증식과 고기 먹는 것을 금하고 철저한 금욕의 삶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자를 대처한 그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신은 다만 허상(虛像)일 뿐 그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칭하였지만, 창조주 하나님 밖에 머물고자 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르시온(Marcion)의 금욕을 요구하는 삶이 사람들에게 더 종교적이요 경건하게 보였는지, 마르시온의 교회와 교인수가 2세기 한때는 정통교회의 교세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중세 수도원 생활을 하는 신부들과 수녀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산다고 말하였지만, 그 안에 적지 않은 불륜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던 대신에 카톨릭의 계율 안에서 부자연한 종교행위를 한 까닭입니다.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금욕적인 삶이 좋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이는 경건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규율이나 율법이나 자신의 신학에 속박되는 금욕은 부자연스러우며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금욕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해지는 금욕은 신앙의 성장과는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하는 금욕은 그의 경건에는 전혀 무익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사람이 음행의 잘못을 범하기 쉬우므로 그러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11-12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지킬 만할 때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정욕의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때 이를 참는 것은 결혼함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7장 1-2절에서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권고합니다.

                                                                            2
    20절: 너희가 세상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초등 학문에서 죽음
여기서 “세상 초등 학문”(골 2:8; 갈 4:2)이란 사람의 학문과 사상, 신앙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시적이고 한정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여러 가지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그 기초 교육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진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자녀에게 초등 학문의 교육은 필요한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지만 학생들이 배운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배운 것조차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는 학문에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초 학문에 매어 있음이 학자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지만, 학자로서의 응용력은 그러나 학문의 기초를 배우지 않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철학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반 사상과 신앙체계를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기초 철학의 틀에 묵고자 함이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고 하나님을 더욱 체계적으로 잘 전달케 하기 위함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기초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성경의 기초에 매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로써 광대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삶에 기초돌을 쌓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것도 억지로 그런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매 또한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매 자연스럽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세상의 기초적인 철학, 율법, 기타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얽매는 것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율법조차도 우리를 그 아래 둘 수 없습니다.

철학의 요구에 따른, 율법의 요구에 따른, 교회법의 요구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자가 아니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기쁨과 평안도 없습니다.

“의문(儀文)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치 물 밖에서 헤엄치고자 펄떡이는 물고기와도 같이 많은 노력과 수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물 밖에 있음으로 해서 조만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초등 학문, 의문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이는 순종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사람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21-22절: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붙잡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말라
무엇을 붙잡지 말고, 무엇을 맛보지 말고, 무엇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지 않지만 금욕주의적인 삶의 일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결혼과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규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독신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결혼을 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신의 삶이든 결혼의 삶이든 이는 다만 환경일 뿐이며 그 외형 자체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중심입니다. 그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으면 그의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거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보다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계신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독신과 금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를 자랑하거나 이로써 그가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미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금욕적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음
외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으로는 이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주의 선생들이 율법의 요구에 따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라고 하고, 또는 영지주의자들이 금욕주의적인 삶이 엘리트 크리스천의 신앙이라고 선동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강력한 어조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외형적인 절제와 극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외형적인 삶의 성숙한 모습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경건과 금욕의 모양이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외적 경건의 삶이 나타나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으로 받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함은 입으로 하나님께 가까이함과 입술로 하나님을 존경함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으면서 입과 입술만의 봉사와 예배를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주보나 설교를 통하여서 예배시간 전에 나오셔서 기도하심으로 준비되고 성결된 예배를 드리시라고 광고합니다. 또 타지방을 여행하시더라도 주일을 꼭 지키시라고 말씀드립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신앙생활의 기초를 교육시키고자 함이지만 이러한 교육적 차원의 광고가 여러분을 얽맬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초등 학문에 속하는 사항이며 사람의 명과 가르침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를 사모한다면, 이러한 주보의 광고나 설교를 듣지 않고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자원함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3절: 이러한 것들은 자의적 숭배나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 무익한 것들
겸손을 가장한 자의적(恣意的) 천사숭배(골 2:18)나 오늘 본문의 금욕주의는 그 명분은 그럴 듯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 같으나 기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더욱 경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순리와 지시하심에 반하는 삶일 때가 더욱 많습니다.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돕는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리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3-5절에서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여짐은 외형적 독신이나 금욕적인 식사생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되어진다고 했습니다.

외형적인 금욕주의와 육체를 좇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무엇이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금욕적인 삶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과 같은, 또 때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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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08장: “은혜의 바다로 가라”
찬송가 408장 작시자 심슨(A. B. Simpson, 1843-1919)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바다로 배를 맘껏 지어가라고 권면합니다:                                                   

        1.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 보라.
        3.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후렴)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깊은 바다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얕은 물가의 찰싹거리는 파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지나쳐 가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그것을 넘어가면 무슨 일이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나치는 것이 우리의 결단이요 봉사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깊은 은혜를 맛보게 되며 맘껏 하나님께로 향한 뱃길로 배를 저어갈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결단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방법과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니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지’라고 여깁니다.
초대교회로 시작하여 오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종종 등장한 것이 금욕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자기 희생이 큰 것 같습니다. 속으로는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나고 탐욕의 마음으로 가득하더라도 우도 신앙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금욕(禁慾)의 돌”로는 밑 빠진 독을 매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금욕적인) 노력과 수고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안에 채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와 수고와 노력이라는 금욕적인 삶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던지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할 때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할 때, “밑 빠진 독”과 같은 우리 부족한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게 됩니다. 성령의 물로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요, 그리스도의 전적인 도우심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머리를 붙들라” (골로새서 2:18-19)

                                             “머리를 붙들라” (골로새서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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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물’
노자는 낮추기(또는 겸손)를 잘하는 것의 대표로서 물을 들고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입니다: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以其善下之)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故能爲百谷王)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是以欲上民)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必以言下之)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欲先民)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必以身後之)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못 느끼고 (是以聖人處上以民不重)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處前以民不害)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是以天下樂推而不厭)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투지 못합니다.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도덕경, 제 66장)


노자는 또 이르기를,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습니다. (天下莫柔弱於水)
    그러나 단단하고 힘센 것을 물리치는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而攻堅强者莫之能勝)
    그것은 바꾸지 않기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以有無以易之)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弱之勝强)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 (柔之勝强)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지만 (天下莫不知)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莫能行)
    그러므로 성인은 말합니다. (是以聖人云)
    나라의 더러운 일을 떠맡는 사람이 사직을 맡을 사람이요,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나라의 궂은 일을 떠맡을 사람이 세상의 왕이라고.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바른말은 반대처럼 들립니다. (正言若反)

    (도덕경, 제 78장)

물은 높은 곳에 두더라도 높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물의 이 속성은 짐짓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변할 수 없는 속성입니다. 또한 물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의 모양이 없습니다. 네모난 용기에 담으면 네모난 모양으로 있고, 둥근 용기에 담으면 둥근 모양으로 있고, 울퉁불퉁한 용기에 담으면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산을 깎아 내리며 바위처럼 단단한 것을 부수는 힘이 있습니다.

물과 관련한 노자의 가르침은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주로 해당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원만한 처세를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謙遜)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치심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성도에게 물과 같이 아래로 처하고자 하는 겸손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힘을 발하여야 할 때, 물과 같이 거칠 것이 없는 기세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12절(또한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물과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춤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약함을 고백하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의 의미와 교만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겸손이 좋다는 것은 많이 들어서 아는데 겸손해야 할 때 겸손하지 못하고, 담대해야 할 때 그렇게 함은 교만이라 여기고 겸손한 척 한다는 것입니다. 겉모양으로는 겸손이 있는데 속으로는 상대방보다 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을 낫다고 여김은 겸손이 아닙니다. 다만 교만을 겸손으로 포장한 것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나 아니면 다른 성도가 교회와 관련한 일을 부탁할 때, “제가 뭐 할 줄 아나요” “아직 그만한 능력이 제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 제게 기도시키시면 교회에 안 나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기도에 대한 겸손의 모양이 아니라, 그 속에 아집이 있음을 드러내놓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부탁 받았을 때,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일을 감당코자 힘씀은 교만이 아니라 믿음의 담대함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저의 믿음이 변변치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죽어봐야지 알겠지요!”라고 대답함은 겸손한 대답이 아니라 여전히 믿음이 없는 대답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예.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보며 ‘아 저 사람은 교만한 믿음의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겸손의 때를 모르고 있는 것이며, 교만함과 담대함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겸손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과 세상 지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이 (담대하나) 겸손의 고백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연고로 교만의 주장이 되고 맙니다.

                                                                                  2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상치하는 것들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첫째는 거짓된 철학의 가르침(8-15절), 둘째는 율법주의적 주장(16-17절), 셋째는 겸손을 가장한 천사숭배(18-19절)와 넷째는 잘못된 금욕주의의 강요(20-23절)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18절: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천사 숭배는 일부러 겸손한 것임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謙遜)이 좋다는 것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동하고 말함이 겸손인지는 잘 모릅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되, 그 하나님은 그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여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듣기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겉으로만 겸손한 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겸손하되 하나님께 담대함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겸손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고, 교만함과 담대함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다 보면, 어떤 아이는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야단맞지나 않을까 자신이 없을 때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아빠에게 말을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아빠로서 저는 그 아이가 직접 나와서 말을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아이가 자기의 요구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함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물론 그 중에는 꾸중을 들을 요구도 있지만, 그래도 제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아빠인 제게 얘기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골로새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겸손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인 줄은 잘 몰랐습니다. 그들 주위에 천사숭배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인즉, ‘우리 사람들은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냐?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께 직접 나가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는 천사에게 간구하고, 하나님을 직접 숭배하기보다는 천사를 숭배하자. 그러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 하나님’라고 외치며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 주제넘고 경망스러운 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는 것도 잘못된 일같이 생각됩니다.  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신에 천사에게 요청하여 천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숭배자들의 부추김에 넘어가게 되고 그들의 믿음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겸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천사숭배자들을 따라가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경고하되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온전하신 사람이신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들어올 수 없는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천사를 그 중간에 두고자 할 때 믿음의 상급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인간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는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헛되이 과장함
천사숭배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러이러한 일을 말해주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에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이나 때로는 계시를 통                                                   

한 그 신비적인 일들도 자기가 본 것을 주장하거나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유익을 주고 그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의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이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본 것(또는 보지 못하였지만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고 믿음이 없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은사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선 마치 세상의 모든 되어지는 일을 깨달은 사람이 된 양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비롯하여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는 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이며, 욕체의 마음을 좇아 본 것(혹은 보지 못한 것)을 헛되이 과장하는 사람입니다.

    19절: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머리를 붙들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된 겸손으로 천사를 붙듦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붙듦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능력이요 지혜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찢기심을 당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전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에 이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담력을 얻어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붙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오(κρατέω)’는 적당히 느슨하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놓치지 않게 꽉 붙잡다(hold fast, hold firm, seize)'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잡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해야지만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길을 잃지 않고, 또 때로는 손을 놓침으로 낯선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엉뚱한 곳으로, 위험한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강하신 손으로서 우리를 꼭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해서, 때로는 우리가 주님의 곁을 잠시동안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에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길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듦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각 지체요, 마디요 힘줄인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질서가 있는 자요 유기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하여서 머리의 명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몸이요 지체일 때 우리의 교회와 각 성도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에 따라 그 믿음과 삶이 온전하게 성장하고 따라서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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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바울의 머리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의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 뿌리가 공급하는 수분과 양분을 흡수함으로 인하여 잘 자라고 건강한 가지가 되어 싱그럽고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듯이, 몸의 지체들도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을 따라 서로 연합하고 적절한 운동을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충성스런 믿음의 자녀의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겸손은 가장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겸손이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감도 아울러 함께 하는 건강하고 바른 겸손의 모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림자와 본체(本體)” (골로새서 2:16-17)

                                          “그림자와 본체(本體)” (골로새서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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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 한 사회의 규범
1950-60년대에 한국에서 (큰 교회의 목사라고 하더라도) 목회자가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교인 집을 심방한다고 하면 그는 아마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웬만한 부자가 아니라 굉장한 부자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인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 안 된다(?)고 인식되어지는 목회자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운전한다면 이것은 (묵시적인) 사회규범에 저촉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몇 만 명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개인적인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교인들이 때로는 분에 넘치는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그 선물들 중에 천만 원 상당의 음향시스템이 있는가 하면 값비싼 외제차도 있다고 합니다. 그분 말씀이, 음향시스템은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외제차는 타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선물은 받고 어떤 선물은 돌려주어야 하는가를 정함은 대형교회의 목사로서 그의 개인규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규범이 목회자 전체의 규범 또는 교회규범, 사회규범에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면, 그는 자신의 개인규범을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을 위한 기준 또는 규범으로서의 성경
신앙생활을 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어려운 것은 성경말씀의 해석과 적용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저주아래 있지 말라’(갈 3:10-13 참고)고 함으로써 이방인은 율법 책이 필요 없는 듯 말씀하는데, 크리스천들에게 여전히 구약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은 율법 또는 말씀의 일점일획도 가감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태 5:18; 마가 13:31; 누가 16:17 참고).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은 “믿음”을 강조한 것 같은데,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대표주자인 야고보는 (믿음의 결과 증거로서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 크리스천인 면에서는 바울 사도의 서신들만 따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 미국 등 모든 이방나라의 교회들 중에 신약성경--그 중에서도 바울서신들만 갖고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교회들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구약과 율법을 버려도 좋다고 설교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말씀하되, 로마서 7장 12절에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고, 7장 14절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8장 14절에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의 저주아래 놓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죽기보다도 싫은 고통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 같아서 아무 의미 없이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율법이 저주요 멍에일 뿐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율법에서 자유한 것은 좋은데 방종에까지 이른다면 이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나의 삶은 아무래도 좋다’고 여긴다면, 이 사람 역시 바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오해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국가, 한 사회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이 그 국가의 구체적인 법률들을 전부 알지 않아도 법률에 저촉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구체적인 법률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알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크리스천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총 66권의 모음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관한 기록이 이 66권이 전부가 아니고 수 백 권의 많은 책들 가운데 신뢰할만하고 일관성이 있는 것들이 정경 66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경을 영어로는 캐논(Canon, κανών)이라고 하는데, 이는 (판단의) 기준 또는 규범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크리스천 삶의 기준 또는 규범이 되는데, 이 기준은 신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된 구약의 말씀도 그 기준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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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과 안식일에 의해 구속(拘束)당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이방 크리스천들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되어진 율례와 절기, 사건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재해석되어진) 이들이 성도들의 삶에 새로운 기준(canon)과 규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문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율례와 규례를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이러한 율법들의 틀 안에 가두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거룩하고 성결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하시기 위하여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식사규례(dietary law)를 가진 이방인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짐승들도 먹었고, 생명을 상징하는 짐승의 피도 마셨습니다. 또 시장에서 거래되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로 또 시비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함으로 크리스천 삶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고 비본질적인 것은 무엇이며,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구분하고자 합니다.
레위기 11장에 구체적으로 어떤 짐승들, 물고기들, 조류와 곤충들이 정한 것이고 부정한 것인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연구한 크리스천 의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정한 것으로 규정한 짐승들, 물고기류, 조류와 곤충류는 건강식품이요,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치는 지방, 콜레스테롤(Cholesterol)이 많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사는 크리스천들도 이 규례에 따라 식사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너무 이에 매이면 율법주의적인 삶이 되기 쉽습니다.
이 식사규례(dietary law)에 따라 천년이상을 살아온 유대인들에게는 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스러운 것이요, 부정한 음식은 보기만 하여도 비위가 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분을 모르고 몇 천년을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젖어온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음식문화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주의 크리스천들 중에 상당수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와 함께 식사규례를 지켜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계속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9-16절)에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서 부정한 것을 정한 것으로 바꾸신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부정한 것으로 여겨오던 것들 먹음을 허락하셨습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드 바르도(Bridget Bardeau)가 동물애호가의 입장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성경해석으로 보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비난이요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한국에서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의 수는 아마도 기껏해야 10-20% 정도일 것이요, 아무리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애완용 개를 잡아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솔트래이크(Salt Lake) 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쇼트트랙(Short Track)의 김동성 선수 판정시비 사건이 있던 날 밤에 NBC 야간 코미디 프로그램의 호스트인 재이 레노(Jay Reno)가 한국의 개고기 음식문화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하여서 한국국민들이 열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또한 바울이 지적한 대로, 타국의 음식문화를 코메디의 소재로 삼았을 뿐 아니라 더욱이 비하하는 대상으로 여겼기에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
이스라엘인들이 오늘날까지 지키는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인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살려주신 유월의 날(Passover)을 기념하여 이날로부터 일주일동안 무교병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    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 그들에게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추수한 곡물 가운데 첫 부분을 드림으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아직 장기저장 시설이 개발되지 않은 때에 곡물들을 오랫동안 썩지 않고 신선하게 보관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월삭(a new moon)은 새로운 달을 맞이함을 기념하는 날로서 매월 초하루에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민 28:11-15).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신 5:12)고 말씀하신 대로 육일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에 안식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삼대 절기가 유대인에게는 역사적 의미와 민족적 의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 자체로는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유대인 절기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절기를 지킴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월력(음력)이 아니라 일력(양력)을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월삭은 별로 의미 없는 날일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0-11절에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경계의 말씀을 줌으로 의미 없는 유대주의로의 향함이 믿음의 삶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그 까닭은 그 날 안식하면서 그들의 삶을 보호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세부적인 금기조항들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면, 이는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없으며 참된 쉼과 평안을 마련하여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안식일의 의도가 훼손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초대교회 신도들은 때로는 안식일에 때로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던 숨어서 지내던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칠 선생이 필요한 날 비밀스럽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위험한 고비들을 넘긴 교회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주일에 찬송과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성례전을 행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평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날 안식을 취하고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을 허락하신 의도를 이해하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을 즐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let no one pass judgment on you)"고 말씀합니다.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비본질적인 문제요, 의미가 적은 것들--즉, 유대인의 식사규례(dietary law)를 따라 먹고 마시는 것, 유대인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삼거나 책잡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유대주의 선생들이 이러한 비판을 함으로 골로새 성도들이 동요되었는데,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공동번역은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These are a shadow of the things that were to come; the reality, however, is found in Christ. (이러한 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장래 일의 그림자와 본체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한 율례들, 절기들과 안식일, 그리고 여러 사건들은 다만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했고,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자 또는 모형은 참형상--본체(本體)가 아니라 본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먹고 마신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난 물은 그 자체로는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로써 그들의 생명양식을 삼고 힘을 얻었지만, 광야에서의 만나와 물은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2-33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5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음식도 또한 성결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장 53-5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애굽에 머물러 있을 때 애굽인들의 장자들과 구분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고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었는데, 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절기도 결국은 인류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맥추절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추수 때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는 사람들을 알곡으로 거둬들이실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고, 마태복음 13장 29-30절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장절은 무엇입니까? 이 역시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곡물과 기타 식물(食物)을 썩지 않게 잘 보관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신약시대에서 이 잘 보관되어지는 곡물과 식물은 바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 안에 영으로 함께 계시매 그들이 썩지 않고 온전하게 잘 보관되어집니다. 우리 자신들의 약함과 죄성으로 인하여는 쉽게 타락하고 부패할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킴이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매(마태 12:8)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쉼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일을 지킨 이스라엘의 안식(=쉼)은 진정한 안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8-9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은 불안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취한 안식은 다만 모형이요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몸은 그리스도시니라”(the substance belongs to Christ)고 했습니다. 영어성경 NIV의 번역대로 구약의 먹고 마시는 일,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 기타 다른 사건들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Salvation History)적 입장에서 구약성경의 가치는 구약의 사건들과 기록들이 구원의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케 함에 있습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가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고 해석되어지는지 우리로 하여금 발견케 하십니다. 구약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알게 하십니다.
                                                       
유대주의의 식사 규례, 절기, 월삭과 안식일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은 그 자체로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방인들은 이 율례와 절기와 안식일과 사건들의 멍에(또는 저주) 아래 자신들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갈 3:10, 4:5 참고). 그러나, 이러한 것들(그림자)이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될 때--생명의 양식,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추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심, 그리스도의 평안과 안식, 그리스도의 동행하심--이는 크리스천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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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본체 되신 그리스도만 온전히 바라봄입니다.
규범이나 기준 그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의 해석과 적용은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문화와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불완전한 그림자요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우리의 영원한 길과 생명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현재를 사는 성도들 가운데 여전히 그림자를 바라보고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에 전적인 소망을 두고 안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실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있음입니다. 육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은 실체 같으나 그림자일 따름이요 영원한 것 같으나 다 지나갈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이요, 그림자 같으나 참된 실체입니다(히 8:5 참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사시며 증거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요 실체인 하나님나라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미혹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질 그림자를 붙잡고자 평생을 헛된 달음질을 하지말고, 우리의 길과 생명이시요, 우리의 본체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실체의 실체인 영원한 본향 하나님나라와 하나님께만 소망을 닻을 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11-15)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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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죄와 허물의 청산(淸算)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제반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국가이기에,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조상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잘못이 청산되어지기는 해야 하는데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단죄형식으로 행해짐을 봅니다. 언젠가 진보적인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주동이 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 708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친일파로 규정하고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들만이 친일을 하였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친일을 했어야 했을 것이며, 반대로 거의 모든 조선사람들이 외형으로는 친일을 했으나 그 마음 속에서는 애국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희망의 나라로”의 작가 현제명씨나 “울밑에 선 봉선화”의 작가 홍난파씨도 단지 친일파로만 매도하기엔 그분들 마음 속에서의 상황은 좀더 복잡하였을 것입니다.
인위적(人爲的)이고, 작위적(作爲的)인 친일파 규정은 진정한 사과나 회개와 용서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친일을 하여 민족이나 어떤 대상(또는 그룹)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를 용서해주고 다시 그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대신에,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무마한 사람은 버젓이 중요한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밝혀지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떼는 것이 낫다는 그른(?) 생각을 갖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드러난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시비를 걸다가 흐지부지되면 또 그대로 자리 지킴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인 것이 문제입니다.                                                 

일제치하에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자의반 타의반 신사참배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심한 체벌(體罰)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들 중에 고문을 받다가 또는 옥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방이 되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들이 출옥(出獄)할 때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암담한 현실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는 대신에 종교계의 기득권 세력이 되어서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을 다시 한번 광야로 내어 몰았습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선하고 거룩한 얼굴로 신도들을 향하여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절대로(?) 범하지 말라고 외쳐댑니다.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면 되지 사람들에게는 안 하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 목회자의 신사참배는 본인만의 잘못이 아니라 신도들을 오도(誤導)한 것이기에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사안이었습니다. 과거에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최근까지 들리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잘못을 청산하기 위하여 글이나 말로 적절한 회개를 한 목사님이 있다는 소문은 거의 들은 바 없습니다.
목회자를 위시한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왜 사람들 앞에 잘못을 시인하기를 꺼리는 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체면입니다. 그랬다가는,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자 할 때, 그는 사람들의 용서를 얻는 것은 고사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닐진대,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그냥 모른척하고 버티면 될 일인 것을 구태여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계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존경을 받는 인물들 중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독재정권을 옹호한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세월이 흐른 다음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과거에 대해서 적절한 변명 내지 사과를 한 사람은 거의(?) 전무합니다.

정부 지도자가 “부정-비리를 척결하라”고 강한 어조로 의지를 천명하지만 왜 부정-비리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행하고 있습니까? 지도자 자신이 과거의 돈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친·인척들이 적지 아니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데, 집안단속은 못하면서 “부정-비리 척결”을 외침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부정-비리를 저지른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한 마디의 사과나 용서를 구함이 없이도 몇 십 년을 무사히 잘 지내왔습니다. 이러한 토양에서, 당장 눈앞에 이익이 있는데 부정과 비리를 안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여겨집니다. 첫째는, 발각되지 않으면 되고, 두 번째는 들통이 난다고 하더라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되고, 세 번째는, (조사하는 검찰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정-비리에 얽히고 설켜 있기에 걸고 넘어가면 흐지부지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크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일이 터지더라도 처벌되는 사람들은 잔챙이들이지 몸통이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었습니다.

정치, 경제와 사회, 그리고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 진정한 자성(自省)이 없이는, 부정-비리-부패의 거대한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아니하면, 친일파가 여전히 활보하고, 신사참배자가 더욱 존경받고, 부정-비리 정치인들이 한국을 다스리는 풍토는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 임금은 악의 세력인 사단이니까요(요한 14:30; 엡 2:2).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해야 할 크리스천들 역시 부정-비리-부패의 거대한 연결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교회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교회들이 진정한 복음은 전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출세하는 비결로서의 잘못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방법이 어떠하더라도, 돈 잘 벌고 세상에서 잘되었다면 믿음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로 그 방법이 어떠하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커다란 교회건물을 갖고 있으면 유능하고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아니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부정이나 부패를 방조하거나 무성하게 하는 온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부정을 해도, 비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무마될 수 있다는 교리는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옛사람 청산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한지가 오래인데, 아직도 믿음의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사람이 청산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마음에 여전히 부정하고 거짓된 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림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위안을 받기 원하며, 이러한 것을 간직한 채 바라는 것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사는 동안은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어려움이 닥칠 때 그의 믿음은 송두리째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살기 위하여,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그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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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리하심으로 나타나게 된 결과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음
창세기 17장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covenant)을 맺으시되 아브라함(사람들) 편의 언약의 표시로서 그와 그의 가계에 속한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새로 사내아이가 태어나 팔일이 지나면 그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할례는 양피를 베어내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대로 하나님의 명하심에 순복하며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할례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들이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바울에 앞서(롬 2:28-29) 이미 구약시대에도 손으로 행한 외형적인 할례보다 마음으로 행한 진정한 할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또한 레 26:4; 신 10:16).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6장 10절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또한 렘 9:25-26). 예레미야서에서 할례는 교만(驕慢)을 도려내는 행위입니다. ‘마음의 교만’의 가죽을 베어내야지만 온전히 하나님께 속할 수 있으며 ‘귀의 교만’을 도려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회개하고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44장 9절(또한 44:7)에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신약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이 할례가 무엇입니까?
                                                   
육적 몸을 벗음
“육적 몸을 벗음”입니다.
신약성도들에게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마음의 할례--가 필요한 것은 육적 몸을 벗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육적 몸”이라고 함은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골 3:5)이요 “옛 사람의 모습”(골 3:9)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기 전에는 여느 세상사람들처럼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골 3:5)이 가득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에 속하여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전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였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옛 사람의 옷--곧 육적 옷을 벗어버리는 그 일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가능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곧 마음의 할례를 받음은 “심령으로 새롭게 됨”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이는 곧 “그리스도의 할례”(περιτομή τού Χριστού)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할례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그 효력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성도의 교만한 마음을 도려내고 그의 죄와 허물의 부담을 벗기시고 새로워지는 심령을 허락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인 몸”-“옛 사람의 옷”은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의 옷”-“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마음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은 죽고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요 거듭난 삶(重生)입니다.

    12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됨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성령의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죄된 육신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게 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도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2-4절에서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되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
바울은 로마서 6장 10-11절에서 “그(=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곧 성령의 세례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됨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일으키심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입니다.
                                                   

    13절: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골로새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로서 죄와 허물과 육체의 할례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아니었던 까닭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에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온 세상사람들을 사랑하시매(요한 3:16), 예정하신 경륜의 때가 이르매(엡 1:9)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그를 바라보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심
(이방) 사람들을 살리시되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때, 사람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리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우리로 저(=그리스도)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은 죄와 허물에 대한 부담감을 여전히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에서 자유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14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삭제-못 박으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 조항의 모든 부담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 율법의 저주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시사항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사항들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부담이 되고 이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불안하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삽니다.

할례가 원래는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헌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할례의 표를 지닌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자발적이며 기쁨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담이요 저주 아래 놓이게 하였습니다. 율법이 각 사람에게 죄를 생각나고 깨닫게 할 뿐 아니라(롬 3:20)그 중량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해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주실 뿐 아니라 우리로 율법의 세부조항들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부담에서도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이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서 그 자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또한 갈 4:4-5 참고).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승리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심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죽음의 권세 가운데 매인 바 되지 아니하고 승리하셨음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ἀπεκδυσάμενος τὰς ἀρχὰς καί τὰς ἐξουσίας”라고 함은 악의 천사들의 세력 가운데 묶인 바 되지 않고 그들의 세력을 격퇴시킴입니다.
공동번역은 15절을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밝히 드러 내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사들(powers, rulers)과 권세들(authorities)을 제압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정체가 밝히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정사와 권세들--공중권세를 잡은 악의 천사들 혹은 사단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모습들을 감추고 광명의 천사들을 가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에서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악의 천사들이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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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과거는 청산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 죄와 허물의 청산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여도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직 죄와 허물의 자백이 없었던 사람은 이 시간을 통하여서 죄사함의 확신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할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사람의 옷, 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여주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의에 대하여 살리시고 이제 우리를 얽매고 있던 이 세상 임금의 세력 뿐 아니라 의문에 쓴 증서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하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를 이기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만 바라보심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서 진정한 승리와 기쁨을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 (골로새서 2:8-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 (골로새서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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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이란 용어와 그 사용
우리는 종종 철학(哲學)이란 단어를 어떤 소신(所信), 목표(目標) 또는 관(觀)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생철학이라고 하면 ‘사람이 어떤 소신이나 목표를 갖고 인생을 사는가’ 하는 것이고, 목회철학이라고 하면 ‘목회자가 어떤 소신이나 목표를 갖고 목회를 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점쟁이가 사람의 운세를 예견하는 것을 운명철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생 제반의 사건이 필연의 초인간적 위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운명철학이 인생철학이나 목회철학보다 국어사전적 의미의 철학(哲學)에 더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국어사전은 철학(哲學)을 ‘인생(人生)·세계(世界)의 궁극의 근본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영어로는 필로소피(philosophy)인데, 헬라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에서 온 것입니다. 필로소피아는 사랑(love, friendship)이란 뜻의 필로스(φίλος 또는 필레이 φίλη)와 지혜 또는 지식이란 뜻의 소피아(σοφία)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필로소피아(철학)는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함’이란 의미입니다. 철학자(philosopher)는 필로스(φίλος 또는 필레이 φίλη)와 소포스(σοφός)의 합성어로서 ‘지혜 또는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헬라어의 필로소피아(철학) 또는 필로소포스(철학자)란 말은 주전 6세기 때의 사람 피타고라스(Pythagoras, 580?-500? BC)가 ‘나는 다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요즘 어떤 학문의 분야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최종학위를 주는데 이를 철학박사(Ph.D.=Doctor of Philosophy)라고 합니다. '철학'(여기서 철학은 국어사전적 의미)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만 철학박사 (Ph.D.)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공학, 심리학, 물리학, 화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철학박사(Ph.D.) 학위가 주어집니다. 신학박사의 학위의 종류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신학박사(Th.D.=Doctor of Theology)’요 다른 하나는 ‘철학박사(Ph.D.)’인데, 대부분의 경우 학문의 전문성의 면에서 Th.D.보다는 Ph.D.를 더 인정하여 줍니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은 어지간히 ‘철학’이란 이름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박사란 ‘인생(人生)·세계(世界)의 궁극의 근본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 분야의 학문적 지식을 사랑하여 연구하는 사람’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학문 또는 지혜를 사랑함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인생이나 세계의 궁극적 원리를 연구하는 철학을 포함하여) 학문 또는 지혜를 사랑함 자체는 악이 아닌데, 이것이 잘못되면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적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플라톤(Plato, 주전 427? - 347?) 이후 로마와 그리스 뿐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에 플라톤의 철학이 팽배하여 있었습니다. 바울시대에도 플라톤의 철학(Middle Platonism)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사상과 주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철학(그의 「Republic」)에서 유대인의 하나님, 세계를 창조한 신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최고의 신이 아니고 다만 열등한 신(inferior or lesser god)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데미우르고스 하나님은 플라톤의 철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회 안에서 기존의 크리스천들에 대한 반대 세력(=영지주의 또는 기타 이단)을 형성하는데 기여를 하여 유대인의 하나님인 열등신 ‘데미우르고스’ 말고 ‘아직까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최고의 신’(Unknown Supreme God)이 있다는 주장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의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라 이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신’이므로 그를 섬겨야 하는데, 이를 알게 하는 것이 ‘특별한 지식(또는 지혜)’인 영지(靈知, gnosis)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창조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게 하고 또한 적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와와 바벨탑을 쌓던 사람의 ‘철학(=지혜 사랑)’
(플라톤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이 ‘지혜를 사랑함’의 위태로움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괴팍하게 하고, 아집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 밖에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사랑할 때입니다.
성경 속에 대표적인 사례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자마자 발생합니다.
하와가 뱀의 미혹(迷惑)에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욕심(=지나친 지혜의 사랑)입니다. 창세기 3장 4-6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지나치게 지혜를 사랑함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예가 있습니다. 그들이 탑을 쌓던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다시 있을지도 모를) 홍수로 인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지혜의 높이에까지 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도전을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지혜를 사랑함은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잠언기자는 1장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고, 3장 13-14절에서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고 했고, 또한 9장 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사랑함이 필요하되, 우리의 지혜의 출발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어설픈 학문의 지혜와 지식이 우리를 자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사모함에 방해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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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할까 주의함
‘철학(哲學)’과 ‘헛된 속임수’는 두 가지 다른 경계사항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철학이라는 헛된 속임수’(hollow and deceptive philosophy, NIV)라고 해석함이 좋을 듯합니다. 또는 ‘철학을 포함한 모든 헛된 속임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헛된 속임수’(empty deceit)는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왜곡시키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철학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거짓선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하나님과 적대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는데, 거짓교사들은 그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아니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합니다. 그로 인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다른 신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노략하다’(συλαγωγέω)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철학의 헛된 속임수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향한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 밖으로 다시 이끌어내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님
사람의 유전(tradition)이나 철학 또는 기타 세상의 초등 학문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발전되어 나온 철학이나 사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좇는 일이 아니라 다만 초등학문을 좇는 것이라고 바울은 변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계시된 이후로는 그때까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해왔던 구약의 율법도 세상의 초등 학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불완전할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데(골 1:9-10),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후로는 불완전한 율법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철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적대하게 됩니다.

    9절: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심
플라톤을 비롯한 헬라 철학자들의 주장과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참 하나님을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플레로마(충만한 하늘)에 존재하는 여러 이온들(Aeons, 신적 존재들) 중에 하나였습니다(발렌티누스 영지주의자들은 30개의 이온이 있다고 주장). 또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θεότης: Godhead, 여러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닌 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나님의 부분이 아닌 참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몸으로(σωματικώς) 거하신다고 변론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이 부분적으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이 전체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오시고 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의 일부분을 보는 것과 같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시고, 14장 11절(또한 10절 참조)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온전히 거하심으로,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하나되심을 강조하십니다.
                                                   

    10절: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짐
참 하나님의 신성이 온전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였던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신성으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여집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로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충만해진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충만하심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우리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자에게는 보증으로 성령이 들어와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지고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가 천사들과 동격이 아니라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머리되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심
“정사(rule, principality)와 권세(authority)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정사와 권세"는 천사의 이름으로서 거짓교사들이 그리스도와 동등되다고 주장하던 존재들입니다. 바울서신들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존재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그리스도와 대등하게 여기고 숭배의 대상으로 본 까닭입니다. 숭배의 대상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사람들의 중보의 존재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함으로 정사와 권세 등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천사들이 영적 전쟁의 대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로마서 8장 38-39절에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천사를 숭배의 대상 혹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로 여기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서 요한은 “내가 그(=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천사는 하늘에 있는 선한 천사라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천사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해서도 안 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 겸손이요 이 기도를 하나님께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요, 아직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나 마리아를 통한 기도가 잘못되었듯이 신부(神父)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바라는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인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까닭입니다. 전에는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때를 얻어서(속죄일) 일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으나,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의 찢기심과 함께 찢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어느 누구나 담대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서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도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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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결단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은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의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이는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대적하게까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과 그의 영이신 성령의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눈에 놓여 있던 비늘이 떨어지고 우리가 밝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총명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 우리의 눈을 덮는 수건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놀라운 축복을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이시며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 위에 머리되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 안에 영으로 역사하심을 믿고 고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충만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음” (골로새서 2:6-7)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음” (골로새서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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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와 아름다운 마음(A Beautiful Mind)
1970년대 중반이후 게임이론(game theory)이 경제학의 한 인기 있는 분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게임이론은 1928년이래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과 모르겐슈테른(Oskar Morgenstern)에 의하여 연구·개발되어 왔습니다만(그들의 공저 「The 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 (1944)」가 있음), 그 게임이론이 각 분야에서 보다 본격적이고 실용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은 존 내쉬(John F. Nash, Jr., 1928-)의 공로라고 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경제학은 물론 정치학, 사회학과 심리학 등 협상의 문제를 다루는 제반분야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22세 대학원생인 그가 1950년에 「비협력적 게임 (Non-Cooperative Games)」란 27쪽의 짧은 글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년 간 프린스턴에서 강사(Instructor)로 가르치던그는 그의 탁월한 논문과 천재성으로 23세인 1951년에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의 교수(C.L.E. Moore Instructor)가 됩니다. 내쉬의 협상문제(Bargaining Problem)에 관한 글과 협력적 게임(Cooperative Games)에 관한 글이 경제학계의 최고권위 저널(journal) 중에 하나인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에 그의 나이 22세 때(1950년)와 25세 때(1953년) 연속적으로 실렸습니다. 저의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은 내쉬의 게임이론적 협상모델과 그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수정된 내쉬 협상모델들에 대한 테스트(Test)입니다. 내쉬(Nash)가 저의 논문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제가 논문에 대한 구상을 하고 쓰고 있던 1980년대 중반에 그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는 전혀 저의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1999년 5월에 실비아 네이사(Sylvia Nasar)라고 하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의 경제담당 기자에 의하여 내쉬의 전기(傳記)가 「A Beautiful Mind」란 제목으로 출간되면서(한국에서는 2000년 7월에 승산출판사에서 「아름다운 정신」으로 번역·출판되었는데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2002년 2월에, 동일한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하여, 「뷰티풀 마인드」라고 제목을 다시 붙여 재출간함) 그가 사람들의 주목에서 사라져버린 지난 40여 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소상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내쉬(Nash)는 1958년도 포츈지(Fortune)에서 20세기의 가장 전도 유망한 수학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의 나이 30세에 이미 MIT의 정교수직을 받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었는데, 바로 이때 그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20대는 수학자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시기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방황하고 갈등하는 시기였습니다. 몇 명의 남자와 동성애적인 감정을 나누고 있었고 연상의 간호원과 사랑을 나누다가 사생아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연상의 간호원과 결혼하는 대신에, 그는 그의 수업을 듣던 알리샤(Alicia Larde)라고 하는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의 모든 외적 조건들은 그가 불행해야 할 이유를 발견치 못하게 하고 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헤어날 길 없는 “사고(思考)의 감옥(監獄)”에 갇히게 됩니다. 그의 천재성과 괴팍한 성격이 그로 다른 사람들과 융화(融和)하지 못하게 하며 광인(狂人)의 길을 가게 합니다. 그는 선망의 대상인 MIT의 교수직을 내놓고, 그의 모교 프린스턴의 빈 강의실을 떠돌며 자기만 알 수 있는 언어와 기호로 무언가를 칠판에 적고 혼자 푸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며 20대의 천재 수학자는 30여 년의 기간을 별 의미 없이 지독한 편집증 가운데 보내었습니다. 그가 정상인의 삶을 사는 것은 이제 정말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1990년대 초에 그는 거짓말처럼 정신분열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40년 전 그의 20대의 학문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의 공동수상자로 결정이 됩니다.
그의 전기작가 실비아 네이사는 내쉬의 삶을 그리면서 책제목을 왜 「A Beautiful Mind」라고 했는지 책 속에서 독자에게 전달하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내쉬의 괴팍한 천재성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기술(記述)합니다. 그 위에 30여 년의 심한 정신분열증을 겪는 남편의 곁에서 소망 중에 그를 내조하고 위로하는 아내 알리샤(Alicia)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이 내쉬의 전기(傳記)가 동일한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기자가 영화에서 내쉬역을 연기한 러셀 크로우 (Russell Crowe)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천재 수학자 내쉬의 역을 맡고 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는데, 자신의 연기에 만족합니까?” 러셀 크로우는 대답합니다. “연기에 만족하냐구요? 천만에요. 내가 내 연기에 만족하였다면 나는 은퇴했어야 합니다.” 그의 대답은 그가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여 더 이상 노력할 의미가 없어질 때, 더 이상 오를 나무가 없게 될 때 그는 연기자로서의 자신의 삶의 의미가 없어져 은퇴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하여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여 정진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여성편력을 제외하고는, 할리우드의 대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배우로서의 연기는 참으로 성실하고 성숙해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천의 아름다운 마음(A Beautiful Mind of a Christian)
저는 개인적으로 신약성경의 인물들 중에 바울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의 삶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바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신약성경의 절반의 책(13권)이 우리에게 전하여졌다는 것보다는 그의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위한 노력과 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미화(美化)시키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자신의 크리스천의 삶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는 혼신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한 사람의 노력하는 삶이 보는 사람들로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가 이미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룬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온전하여지고자 자신을 치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을 삶의 목표로 두고 있는 저의 신앙의 모습은 더욱이 부족하고 흠이 많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도 부족하며 크리스천으로서 삶도 온전하고 거룩함에서는 아직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러했듯이 저도 저의 믿음에 정진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은혜스럽게 전하여 성도의 삶에 변화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노력하는 삶은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    한 모든 사람들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갖고 계신 선하    신 뜻과 바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노력하며 발전하며, 그로써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며 세움을 입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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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라고 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의 주인이시요 그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인 것을 인정함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고 예수님은 이제 그와 동거동락(同居同樂)하는 삶을 살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함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자 합니다. “행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는 ‘(그리스도의 주변을 맴돌며) 걸어가다(go about, walk)'는 의미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살지니(στοιχέω: walk, live)”라고 했는데, 비슷한 권면입니다. 우리가 생을 사는 것은 여행자(또는 행인)가 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데, 우리 크리스천으로서의 인생의 여정에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행하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라”는 뜻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면서도 근심과 걱정으로 눈이 가려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글로바와 다른 한 사람--이 엠마오라고 하는 촌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때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고 있었지만 그들은 근심과 불안의 마음으로 눈이 가리워 있어 동행하시는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눈이 뜨임 받은 후에 비로소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누가 24:31). ‘지금 내 곁에 그리스도가 동행하시고 계심’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고 뿌리를 박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해서, 크리스천의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여서 여러 가지로 결단하지만 그 중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키는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진보에 좋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정하지만 하루 이틀이 고작입니다. 도무지 주위사람들이 나로 기도의 생활을 잘하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기도하기로 정한 그 시간에 꼭 무슨 일이 생깁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모습인데, 이런 분들을 위하여 어떤
지혜 있는 분이 충고합니다. 새로운 결단이 작심삼일에 그쳤다고 하여 실망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동일한 계획을 세우고 또다시 실천하려고 하라. 방해를 받아 또 중단되면, 이번에도 바로 다시 마음을 바로    잡고 실천하도록 하라. 그리하다보면, 비록 중간 중간에 중단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당초에 목표했던 계획에 성과를 얻게 되고, 나중에는 작심삼일로 그치지 않고 정한 일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자기가 계획하여 실천하던 일을 쉽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믿음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단지 5-10분이라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얇은 뿌리를 내기 시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결코 두려워하거나 마약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왜 내가 진작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나?’고 후회하게까지 하는 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고 박아야 합니까? 이렇게 함이 그 사람으로 크리스천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별 의미 없게 들립니다. 그 말씀이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씀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며 그의 삶에 지혜와 지식을 주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게 불안하여 하며 그 해결책을 세상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모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그 앞에 닥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그와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에 위안을 받고 마음에 평온을 유지하며 말씀 가운데 문제해결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그는 심한 비바람과 거친 파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믿음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힘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깊게 박은 성도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그의 행사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평온하며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세움을 입음
바울은 성도의 그리스도 안의 삶을 여행자(또는 행인)에 비유하여 “함께 걸으라”고 권면하고, 나무에 비유하여 “뿌리를 박으라”고 하며, 이제 건물에 비유하여 “세움을 입으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일생은 믿음의 건물을 지어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굳건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견실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의 터 위에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히 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분주함과 자신의 불성실함으로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견실한 건물을 세워나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공력이 과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인지, 아니면 나무나 풀이나 짚인지 시험하는 불은 때로는 그 앞에 닥치는 시련이요 위기상황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과연 그가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감사하는지 아니면 좌절하고 주저앉는지에 따라 그의 믿음의 건물의 견고함과 자질이 판정을 받습니다. 견고한 믿음의 건물을 꾸준히 지어나가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섬
우리의 터전인 그리스도는 그의 삶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이 어떠해야 할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간의 성품으로는 그도 죽음이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이 어떠할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539장의 작시자 모트(Edward Mote, 1797-1874)는 성도가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믿음으로 서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찬송가 539장 1, 2절)

감사함을 넘치게 함
어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있는가 아닌가는 ‘그 성도의 마음과 입술에 감사함이 있는가 아니면 불평이 있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이 믿음 안에 거하고 있는가 자기진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평강과 축복을 맛보는 성도에게는 외적인 환경과 상관없이 감사함이 샘솟고 넘쳐납니다. 이는 우리의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깨달음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감사함이 넘쳐나야 함은 그것이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결단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성도 됨을 아름답게 만듭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매일 나아감이 그와 그의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의 능력과 지혜의 한계를 주님께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로 덧입기를 사모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기를 간구하는 성도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권고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나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시며, 둘째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깊이 박음으로 인하여 폭우와 강풍, 거친 환경을 능히 견디어내며, 견고한 건물을 세우되 믿음의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내구성(耐久性)이 강한 자료를 사용하며, 성경말씀을 듣고 읽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고, 입술과 심령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고, 하나님의 크신 칭찬과 상급이 있는 아름다운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