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0, 2012

"그리스도인의 표 된 것" (고후 12:12)

"그리스도인의 표 된 것" (고후 12:12)


성경구절: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 12:12)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도경(道經)」 제 24장):
      발뒤꿈치를 들고 서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企者不立)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다 (跨者不行)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自見者不明)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고 (自是者不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이 없고 (自伐者無功)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自矜者不長)
      도(道)의 관점에서 이러한 것들은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만물이 혹 그것들을 싫어하는 바니, (物或惡之)
      그러므로 도(道)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것들에 처하지 않는다. (故有道者不處)

남보다 커보이고 싶고, 더 잘보이고 싶고, 나아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어서 발뒤꿈치를 드는 사람은 잠깐동안은 그렇게 보이도록 서 있을 수 있지만 오랫동안은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동안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 신앙이 좋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더욱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이런 사람은 인정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큰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큰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그 걸음을 멈춰버립니다. 계단을 두 세 계단 한꺼번에 뛰어오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디게 보이더라도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고 자기의 세상 자랑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드러나집니다.
저는 40세가 되어서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평신도(3년의 전도사)의 삶을 살았기에 안수를 받은 초기에는 제가 목사란 느낌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제가 목사임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목사전용 검은 셔츠(Clergy shirt)를 착용하곤 했습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즐겨 입기도 했지만, 그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목사로서의 몸가짐을 조심하고자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크리스천의 표시가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보증으로 보여 주십니다(고후 1:22, 고후 5:5; 엡 1:14, 엡 4:30). 성령의 역사가 어떤 사람이 과연 크리스천인지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그에게 여러 가지 희한한 기사(奇事)들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날 정도의 대단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행전 19:12).  그러자, 떠돌이 유대인 무당(=마술사)들까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능력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도 바울이 행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逐邪)을 행하고자 합니다(행전 19:13). 스게와(Sceva)라고 하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이 바울의 능력이 부러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는데 믿음이 없이 행하는 고로 악귀의 힘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가지고 놉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전 19:15)고 하며 악귀들린 사람의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억제할 때 그들은 상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표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이런 일이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에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믿는 마음으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할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의 표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자 하지 않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표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신도로서 학원목회를 하거나 교회의 직분자의 생활을 할 때에는 저에게 말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거치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말하는 일에서나 행하는 일에서 자제하고 조심을 하게 됩니다. 이는 목회자의 말과 행동은 쉽게 그리고 왜곡(歪曲)되어서 비난과 비판의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은사로나 열매로든지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부담스럽던 교회생활이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의 교회생활이 되고, 전에는 여러분의 삶의 한 변두리에만 머무시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고후 12:20-21)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 (고후 12:20-21)


성경구절: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근수근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2:20-21)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상대방에 대하여 원하는 바가 다를 수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이민 한인교회에 있어서는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질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는 그 성도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 교육수준이 높든 낮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모이고 찬송하고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 런데, 외로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평균의 성도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전달함으로 자기가 행하고 있지 못한 사안에 대하여 지적받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사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자기의 말(세상적인 이야기라도)을 청종해주고 자기가 내는 의견대로 목사가 따라서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모습을 고치기보다는, 그것을 목회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괜찮은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민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목회자와 교인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생각하기를 원치 아니하며, 목회자는 교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말을 들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성도를 위한 종(servant)' 정도로 (사실은 ’하나님의 종‘인데)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입장이 원만히 절충되거나 이해되지 못할 때 목회자와 성도의 갈등이 심화(深化)됩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역할이나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바울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너 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라고 함은 두 번째 방문에서 그가 경험한 아픔과 후회감을 반영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적인 문제에 관하여 권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지만 그의 권면은 받아들여지는 대신에 심한 반대와 사도로서 모멸감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한 만족감으로 돌아오는 대신에 근심함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고후 2:1).
이 제 그들을 세 번째로 방문을 해야 할 것인데 그 방문에 앞서서 이와 같이 편지함에도 바울의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자의 비방에 여전히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연보를 할 필요성을 그렇게 장황하게 역설했는데 바울의 말이 무시당한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능력과 권위는 교인들이 그를 얼마큼 인정하고 그의 말(혹은 그의 입술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인들을 통하여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라고 했습니다.
고 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보기를 원함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뒤에서 바울을 욕하고 수군수군하지만 바울은 항상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의 도리에 맞는 삶을 살지 못함도, 음행을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이 세상 일에 탐닉하는 것도, 얼마간의 실수를 하는 것도 그저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사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쳐서 주님께 복종케 하는 삶을 사는(고전 9:27) 바울의 입장으로는 그것은 사랑의 바른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는 그들을 안락하게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에 그들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직설적인 바울에게는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곁길로 간 것을 곁 길로 갔다고 지적하여주는 것이 사랑의 바른 표현입니다.
고 린도전서 4장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 고린도 교인들의 바른 결단을 촉구하고,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歸正)하리라”고 그의 단호함을 보이고, 갈라디아서 4장 20절에서는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결연(決然)한 마음을 표시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2절에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가면 다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아주 강한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지 자기의 화를 못이기는 징계를 가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모습 그대로를 드러냄으로써 바울 자신이 원치 않는 나무람으로 그들을 대하고, 출교를 명해야 하는(고전 5:4-5 참조) 사태가 발생할까봐 두렵고 염려하는 마음이 듭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교인들 중에서 여전히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다툼(quarreling)"은 각자의 생각이나 주장이 너무 세고 이를 굽히지 아니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에서는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시기(jealousy)"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고 헐뜯게 됩니다.
"분냄(anger)"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노함(wrath)과는 다른 것으로서 자기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서 터져나오는 무익한 화를 말합니다.
"당짓는 것(selfishness)"은 영어 단어 ‘selfishness'가 나타내듯이 이기적인 마음의 소산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하는 대신에 자기의 주장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중상(slander)"은 상대방의 한 말과 행동이 아닌 사실무근(事實無根)한 것을 갖고 사실인양 상대방을 모함하거나 넘어뜨리는 일입니다.
 수군수군하는 것(gossip)"은 어떤 사람의 뒤에서나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거나 왜곡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거만함(conceit)”은 세상에 속한 쓸 데 없는 것을 과시하거나 뽐내는 일입니다.
어지러운 것(disorder)"은 교회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멋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며 그로 인해 교회를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한 이 여덟 가지는 고린도 교회에만 존재하던 문제꺼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많은 교회들 안에 내재해 있는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고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성도는 입으로는 아무리 교회를 염려하는 것 같으나 그들의 행함은 교회를 세우고 유익을 가져오기보다는 교회를 무너지게 하고 해를 끼치게 됩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바가 이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서 바울의 글을 통하여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경계를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 이어 2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할 때 그의 두려워할 것들에 대하여 계속 말씀합니다.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낮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노오(ταπεινόω)’는 ‘낮추다, 겸손케하다, 수치를 당하다, 모욕감을 느끼다(humble, make ashamed, humiliate)'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중에서도 사도의 권위가 서있고 사도로서의 권면이 받아들여져야 할 것인데, 바울이 2차 방문할 때 그가 당했던 모멸감과 수치를 다시 당하게 될까봐 염려함입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도인 바울에게 뿐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는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할 수 없게 되며, 고린도 교인들은 이제 다시 그들의 잘못에서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바른 권면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다보면, 그의 권면이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의 권면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목사의 권고와 조언을 듣던 사람이 가슴을 닫고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할 때, 이 목회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교인을 향하여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도 그의 말은 다만 췌사(贅辭)--‘쓸 데 없는 소리’만 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또한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의 또 다른 편지에서도 강력하게 권고한 것이 있는데, 즉 고린도 교회 내에서 얼마간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더러움(ἀκαθαρσία: impurity)과 음란함(πορνεία: immorality)과 호색함(ἀσέλγεια: licentiousness)을 회개하고 내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르고 신령한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여전히 이와 같은 죄악상을 발견하게 될까봐 바울은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하거나 넘어뜨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이제라도 그들이 잘못된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원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세 번째로 대면할 시간이 점점 다가옴에 그 마음에 기대감이 있고 설렘이 있습니다. 그들의 바른 모습을 보기를 원하기에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하고 나무람의 말도 하고, 눈물을 뿌리며 호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그 자신을 인정해 달라거나 변명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고 참으로 칭찬이 많은 성도로 만들기 위함에서 한 것입니다.
사도와 교인들이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원치 않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기쁨의 만남이 되어야 할 것이 상처와 고통과 부끄러움의 만남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잠시 잔간 후이면 두 번째로 이 땅을 방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되 근심함과 두려워함이 아니라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모습은 벗어버리고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하심" (고후 13:3-4)

"그리스도의 강하심" (고후 13:3-4)


성경구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3-4)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함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의 의견이나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개인으로서는 그와 같이 엄청난 판단을 내릴 자격이나 권한이 없습니다.
고 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심판을 우리에게 내립니까?”라고 반문할 때, 바울은 “내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매 내가 너희에게 이런 판단을 내린다”고 대답합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바울도 약한 사람이지만 그를 사도 삼으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저(=그리스도)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도 저들과 같이 약한 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그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강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아무 의미가 없고 힘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권위가 서야 할 것이며 그의 판단이 구속력을 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판단을 부정한다면,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다스림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강력하게 말씀함은 앞서 12장 20-21절에 언급한 바대로, 그가 고린도 교회를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 그의 사도로서의 권고와 판단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바울 개인으로는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불순종하면 어쩔까 하는) 이번 방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한을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사실이고 그의 능력이 무한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를 영접지 아니한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로마병정들 앞에 그는 참으로 약한 자로 비춰졌습니다. 그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자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아니하고 뺨을 치는 자에게도 항변하지 않으십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이 바라기는, 지금이라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무리들을 혼내 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아무 저항도 아니하시고 무기력하게 끌려가십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그를 짓누를 때 그는 나약함으로 쓰러지고 또 쓰러지며, 로마병정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하십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저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라고 의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가 혹 무슨 초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그의 모든 적들을 통쾌하게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왕에 오르시는 사건이 있기를 기대하여 보았지만 그저 무기력하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절규하며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주 죽은 자들 가운데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능력으로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시키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 올리우사 그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여전히 과거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태어나 황당한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한 궤변가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를 향하여 눈을 드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과 능력의 주님으로 역사하시며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예하게 됩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와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은 인정하나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여전히 약한 자요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자의 모습으로 고통과 수고와 핍박을 당한 것이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바울을 때리고, 가두고, 중상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바울도 여느 연약한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연약한 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으므로(갈 1:12)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교회 안에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목회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고, 직분자에게 직분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사신 모든 성도들에게 성도의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그 권세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능력에는 강제권이 있고 그 권세에 대항할 때는 제재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장하시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하기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만 잠잠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이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란 분이 있다면 나를 심판해보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경험하거나 본 적이 없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일 뿐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에 징계를 늦추시나, 이들이 계속 이러한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갈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쌓여짐으로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롬 2:5 참조).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고 한결같이 이루어 주십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사도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가 사도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능력은 그의 사도 직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집니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성도의 직분과 권세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집니다. 그 스스로가 그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와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 직분자로서 또한 성도로서 하나님 안에서 어떤 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다른 직분자의 권위가 다만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길 때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역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되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또 직분자로서 여러분의 권위와 능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교인들" (갈라디아서 3:1-5)

"어리석은 교인들" (갈라디아서 3:1-5)


성경구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3)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리석은 일들을 생각하고 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거나 칭찬 대신에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초(楚)나라의 재상 소양(昭陽)이 위(魏)나라를 쳐서 군대를 와해시키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은 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齊)나라를 공격합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크게 걱정하며 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는 진진(陳軫)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습니다. 진진은 “염려 마십시오, 폐하. 소인이 곧 초군의 진지를 찾아가 침공을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초나라의 초군의 진영으로 소양(昭陽)을 찾아가 그와 회견합니다.
진진은 소양에게 묻습니다. "초나라의 법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이면 어떤 벼슬이 주어집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벼슬은 상주국(上柱國: 최고의 공로를 세웠을 때 주는 벼슬), 작위는 집규(執珪: 최고의 작위)가 주어질 것이오.”
진진이 다시 묻습니다. "그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오직 영윤(令尹: 재상)이 있을 뿐이요."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습니다. "영윤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왕도 영윤을 두 사람씩 두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소양에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초나라의 제사를 맡은 사람이 임금의 시종들에게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시종들이 서로 말합니다. '몇 사람이 마시자면 감질이 나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뱀의 몸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려고 왼손으로 술잔을 잡고 오른 손으론 뱀의 발을 그리면서 '난 발까지 그릴 수 있어'라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그가 발을 그리고 있는 사이에 뱀의 그림을 완성한 두 번째 사람이 술잔을 빼앗으며 말합니다. '뱀은 원래 발이 없네. 발을 그리면 안 되는 걸세.' 이렇게 말하고는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뱀의 발-사족(蛇足)-을 그리던 사람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한 것입니다.
진진은 소양을 보며 말을 잇습니다. “어떻습니까? 대감은 이미 초나라의 영윤(令尹: 재상)이시고 이미 위나라를 공격해 장군을 죽이시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또 제나라를 침공하시고 승리하신들 무슨 보람이 있으시고, 더 이상 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지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뱀에다 발을 그리는 격이 됩니다.” 소양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습니다(<<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우리의 어리석음 가운데는 이만하면 충분한데 그 이상을 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리자 걱정이 되는 신심(信心)이 큰(?) 아내는 새벽기도까지 다니면서 '남편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를 아는 그의 친구 되는 분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 잘 될 터인데"라고 조언하자, 이 분은 속으로는 약간 꺼리지만,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도 기도드리고 부처님께도 불공을 드리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신심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는 (출 20:5, 신 5:9) 괘씸죄를 짓는 결과를 낳습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아직 카톨릭 신부로 있을 때, 자신의 죄가 온전히 용서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진 것 같지 않아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계단을 자기 마음에 죄 용서받은 것같이 느껴질 때까지 계속하여 기어서 오르내리는 고행(penitence)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사족(蛇足)을 다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지 금도 카톨릭에서는 그들이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한 세계 여러 고행의 장소에 신자들이 가서 고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프랑스 루르드에 '거룩한 계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마리아가 18번 나타났기에 거룩한 장소로 지정된 곳이라고 합니다. 로마교황청은 1년에 4번 이곳에 와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연옥(煉獄)에서의 9년 간의 속전(면죄: indulgence)을 약속하여주고 있습니다. 카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행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지지지만, 이러한 고행의 제도 속에 있는 카톨릭교도들에게는 이것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죄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토라'라고 하여 십계명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 사항들을 주셨습니다. 토라의 원래의 의미는 "지시사항, 가르치심"인데, 이를 속박과 제한의 의미의 "율법"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토라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법 규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안 식일을 예로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세부사항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십리 이상을 걷는 것,' '나무의 가지를 꺽는 것,' '몸을 지나치게 움직이는 것' 등등 이러한 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는 것이므로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고 하나님께 과잉충성하는 의도에서(?) 스스로 정하여 놓고 이를 정한 사람들도 이 규범의 속박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행위같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안 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더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을을 범하였다고 분을 내며 송사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심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세부규칙을 만듦으로 스스로 율법 속에 갇히는 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종교행위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해서, 전에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이 넘쳤는데, 지금은 모든 교회의 일이 짜증스럽고 남을 비난하는 입술이 내게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직분이나 체면치례의 봉사나 의무 기타 외형적인 것에 너무 신경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에, 주일날 예배드릴 때만 믿음이 있는 것 같고  거룩한 척 하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에게 바울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의무로서 속박 지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율법('즉, '하나님의 지시')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함의 즐거움과 자원함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한 표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3:13)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3:13)


성경구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10여년 쯤 전에 한국에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1997년 6월 출간)는 책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어떤 목사(이윤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년 2월 출간)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인기 있던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그 책들로 향하게 합니다.
교회를 꼬박꼬박 출석하고 신앙을 붙잡고자 하는데도, 여전히 사업에 실패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병이 항상 그 사람과 가정을 따라다니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에 대대로 흐르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계에 조상대대로부터 흐르고 있는 저주를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놓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며, 이를 끊어버려야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그 독자들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며(nullify),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갈 3:9 참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을 살 때에는 병듦 가운데, 가난한 가운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한 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물론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라면, 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길지 않은 생은 하나님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각각 달리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신명기 21장 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사람들 앞에 경계를 삼기 위하여 죽인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흉악한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은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저주는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신 것입니다.
아 담과 그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사망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고, 그들 뿐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사망이 인간 세상에 왔으나, 율법은 '불순종이 죄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롬 7:7).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라고 말씀함은, 율법 아래에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인 사망이 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를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저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죄를 죄 되게 하는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인생들을 자유케 하셨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시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돌이켜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를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이나 기타 '부담'에 우리를 맡기는 삶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여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며,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을 얻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그것을 끊을 수 있는 비법을 발견하고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등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축복과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것이 더욱 유익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등의 책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두려움과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모든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이를 믿습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1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1908~67)의 연시(戀詩) <행복>에 나오는 내용인데, 시조시인인 정운 이영도씨에게 보낸 수많은 연애편지의 모음을 출간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 중에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시조시인 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여인으로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뒤이어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그의 마음 전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서른 여덟 살의 유치환은 스물 아홉의 청상 과부 이영도를 행하여 사랑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당시의 유교적 전통의 규범을 깰 수 없기에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거의 매일 편지를 쓰고 시를 써서 보냅니다.
20 여 년 동안 5천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불타던 유치환의 사랑은 1967년 2월 13일 부산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끝이 납니다. 이영도가 소장하였던 유치환의 연애편지들은 그가 타계한 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짝사랑이든지 쌍방의 사랑이든지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우리는 더욱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생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사랑을 함으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함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므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인생의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원하시고 허락하시는 행복의 비결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행되어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에 할례(割禮)를 받는 것입니다.
창 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쌍방계약)을 맺기를 원하시는데, 그 언약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속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인 것 같지만 인생들을 축복의 말씀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자에게 중요한 재생산 기관(reproduction organ)의 표피(foreskin)를 베는 행위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 즉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림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지만, 만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의 할례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과연 아브라함의 할례가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심입니다.
아 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삭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고자 함으로써 그의 할례가 유효한 것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고, 그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리고 창세기 22장 16-18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는’--즉 메시야가 그의 씨로 임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곧 하나님의 구원함에 이르는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그가 할례의 언약을 따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림으로 얻어진 것인데,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12-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말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을 사랑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까?
13절에 이른 대로, 우리 각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복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준행하였기에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NLT: "Therefore cleanse your sinful hearts and stop being stubborn.")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께 헌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결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는 않고 자기의 육체에 있는 할례의 표시만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와 같이 자기의 육적 할례 받음을 자랑하는 유대인 할례당에 속한 사람들에게 표피 조금을 베고 그같이 자랑할 것이면 아예 잘라내고 더 자랑하라고 그들을 책망합니다(갈 5:12).
할례는 하나님께 그의 마음과 삶의 가장 중요한 드리는 것이며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할례를 자랑하며 전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할례의 신약적 표현은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부, 성자와 성령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드리겠다는 결단이요 헌신인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세례의 효력을 상실한 채의 삶인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circumcise your hearts)고 말씀함은 진정한 의미의 헌신과 결단을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신 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요”라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예레미야 6장 10절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 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보다는 그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즐겨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곧 진정한 결단이요 헌신임을 선포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circumcise the foreskin of your heart, cleanse your sinful hearts)은 “마음의 표피”를 도려낸 사람인데, 여기서 “마음의 표피”란 교만한 마음, 완악한 마음, 자고한 마음 등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목이 곧고 자고함”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데, 이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7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 신이시요 주들 중에 주시요, 크고 능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만유의 주님 되십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장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위에 그는 사람들의 중심을 보시고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8-19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살 때 나그네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 리 인생들이 평생에 어떤 삶을 살지는 다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불행해질 수도 있고, 현재는 남편이 있는 사람이 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주변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동정이나 동냥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웃 사랑함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행복하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20절에서 모세는 12절에서 역설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그에게 친근히 하라-곧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맹세는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닌 오직 그의 이름에만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21-22절: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할 것은 그는 우리의 찬송이시요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고 두려운 일이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처음 애굽에 내려갈 때는 70인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그 자손들이 430년 후에 애굽을 나올 때는 남자 장정만 60만이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을 계수하면 족히 200-300만이 되고 또한 많은 가축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200-300만의 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세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7절에서 주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3
인도 태생의 예수회 사제인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1931-1988)가 쓴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한 친구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래 자네 요즘 교회에 다닌다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잘 알겠구먼! 그래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분인가? 어디서 태어났나? 몇 살에 죽었지? 무슨 일을 했나?"
그러자 교인이 된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니,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난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 사실 나는 얼마 전에 술주정뱅이에다 빚까지 지고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산산조각이 났던 우리 가정도 화목해졌지. 이게 모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나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야. 이 사실만은 나도 알고 있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므로 우리의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 전부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욱 행복하여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Wednesday, April 11, 2012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제직의 소명과 헌신” (누가복음 5:1-11)


                                                                         1
소명(召命, call)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떤 특별한 일로 부르심을 말합니다.
넬슨(John Oliver Nelson)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들을 목회자로 삼으십니다.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거듭난 청년들을 부르시고, 설교하시고, 계획을 세우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전공 직업이 있는 동시에 성별된 주교와 사제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권사나 집사이든, 아니면 평신도이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소명의 귀중함을 생각하며 신실함과 열성으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저서 “소명(The Call)"에서 ”소명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같은 총체적인 소명이 왜곡되어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성직이라고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소명이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소명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의 달란트와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하나님)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각각 다른 직임으로 부르셨지만, 그의 부르심의 뜻은 각각 자기의 달란트와 재능에 따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때에 부르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인생의 삼분지 이를 산 모세를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세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그는 아직 인생의 미숙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성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 예레미야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부르실 때 그는 남방왕국 유다의 한 시골 드고아의 목자였습니다. 시골의 목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 그것도 적대관계에 있던 북방왕국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증오하던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자 요나를 적국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치게 하는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모세, 예레미야,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일군을 원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소명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감 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구원의 확신을 경험케 한 모라비안 교회의 창설자 진젠도르프(Nikolaus Zinzendorf, 1700-1760)는 청년 때에 각 지방으로 유람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란 제목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몸을 버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글귀에 크게 감명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쏟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울다가 일어나 이후로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몸바쳐 일할 것을 결심하고 돌아와서 모라비안 교회를 세웠습니다. 진제도르프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한 그 글귀는 찬송가 185절의 주요 가사내용이기도 합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 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하느냐?

이 찬송가의 작사자 프란시스 리들리 해버갈(F. R. Havergal, 1836-1879)도 소녀 시절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에 걸려있던 이 “에케호모”란 그림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고 계심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즉시 이 찬송가를 작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오 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는 첫째, 부르심의 장소(場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저 숲 속의 현자의 은둔처가 아니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어부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르심의 대상(對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되 세상의 학문이 많은 자나, 종교 지도자나, 부자나 다른 특권 계층의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스스로 평범 이하의 우둔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되 일상적인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혹은 지혜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는, 부르심의 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되 그들이 생업에 분주하게 종사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든지(마태 4:18; 마가 1:16) 또는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누가 5:2).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마태 4:21; 마가 1:19).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을 때 ‘너희들 정 할 일이 없으면 나를 따라 오지 않을래? 내가 너희에게 할 일도 주고 또 먹을 것도 줄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거나 사양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너무나 바쁘다는 것입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냐고, 자녀들 학교 따라다니랴, 음악레슨 시키랴, 운동시키랴, 또 차 태워주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의 때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때,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붙잡고 있는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종용하십니다. ‘나를 택하든지 세상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마태복음 8장 21-22절(누가 9:59-60 참고)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쑴하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무리가 몰려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눅 4:43), 때로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힘을 재충전받으셨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신 때에도 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2절: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두 배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배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부의 배입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와 피곤한 육신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 수님께서 시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시몬이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도록 허락하였는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그의 말씀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권세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시몬아, 내가 네 배에 올라타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매, 시몬은 “선생님, 그리 하옵소서.”라고 순순히 대답했을 것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몰려든 무리들의 관심사는 병 낫기와 귀신들림에서 벗어남과 세상에서의 양식을 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해서 전파하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에게로 그의 관심을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에 오르신 것은 그에게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장차 그의 사역에 동역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성경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릴 장소까지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5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어려서부터 갈릴리 바닷가에 살아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입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을 방문하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그 앞에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가만히 있지 못할 그인데, 오늘 이 낯선 사내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매, 그는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행하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능력이 많다고 하길래 그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일에는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기 잡는 일에서까지는 그보다 낫다고 생각할 리 없는 시몬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절망감과 허탈함에서 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그였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그는 참으로 지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에게 권세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낯선 남자의 권세 앞에 순종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할 때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앞에 계신 예수님의 권위가 그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기대에 앞선 순종과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약속들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데, 당장은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그 약속과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붙잡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함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그가 붙잡고자 한 것을, 믿으려고 한 그것을 얻게 됩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의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시몬의 배와 함께 나간 다른 배를 불러 함께 고기를 담았는데, 그물에 걸린 고기는 두 배를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릴 때 이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정하신 곳에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10 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얻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시몬은 고기를 많이 잡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게 말씀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나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고, 자연의 모든 현상까지도 아신 단 말인가?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시몬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주위의 어부 모두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두 배 중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두 배를 가득 채운 큰 물고기를 싣고 두 배가 호숫가로 나오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놀라매 달려와서 함께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4:21; 마가 1:19 참조).


시몬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호칭이 “선생”(ἐπιστάτα)에서 “주님”(κύριε)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 본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가르침을 배운 제자로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분은 그저 “선생”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분 같이 여겨졌습니다. 해서, “주여”(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위시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려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심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이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함입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선(滿船)의 배를 저어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더 이상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까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릴(=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그물을 깁던 아버지까지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물은 어부의 생업의 중요한 수단이며, 배는 어부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재산이요, 부친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포기함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도구, 재산과 사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좇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세오”(ἀκολουθέω)는 ‘따라가다(follow)’, '동행하다‘(accompany)의 의미와 함께 ’제자가 되다‘(be a disciple)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업을 모두 포기하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세상 기업을 경영하는 가운데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놀랍고 은혜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떤 주의 일꾼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하게 하시며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간 베드로는 후에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목적을 위하여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3
예 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를 좇아간 첫 번째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전승(傳乘)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안드레는 이집트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기록된 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이로써 복음이 세계로 전파됨에 밑거름이 되고, 요한은 소아시아 서해안의 한 섬 밧모섬에 귀향당하고 그후에는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임을--아니 보통 사람들보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의 앞뒤를 재지 않는 단순한 마음(simplicity)과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원하는 가슴입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으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0-26)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0-26)

       
                                                                         1
요(堯) 임금이 화북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땅에 사는 봉인(封人)이 요 임금에게 “임금님께서 재물을 많이 취하시며, 아들을 많이 낳고, 장수하시도록 기원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러자 요 임금이 미소를 띄우며 대답합니다. “그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가신 일이 많을 것이며,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오래 살면 그만큼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겠는가? 이것들은 덕을 쌓는 데는 한갓 쓸모 없는 것들이오.”
재물, 많은 아들들, 장수가 세상 복의 기준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것들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곳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재물도 많고 자식들도 여럿 있어서 행복하여야 할 터인데 그 자신은 전혀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자식들은 여러 가지로 속을 썩여서 없느니만 못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도 없어서 늘 만족이 없습니다.
그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부자가 이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좋길래 덩실덩실 춤을 춥니까?” 가난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나에게 세 가지 기쁜 일이 있어서 춤을 춥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은 대답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지으신 것이요, 둘째는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요, 세 번째는 지금 나를 부러워할 사람은 없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너무나 좋아 춤을 춥니다.”

                                                                             2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는데 비하여 누가복음 6장 20-49절은 평지수훈(平地垂訓)이라고 불립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 (언덕)에서 설교를 하셨다고 했는데(마태 5:1), 누가는 평지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복음 6장 17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平地)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성이 있고 역설적입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갖고 있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을 이 세상을 사는 관점에서 풀어 해석하고자 하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20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되기 위하여 예수 믿고 부자 되기 위하여 교회 나오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해석하였는데(마태 5:3),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누가 6:20)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건 “심령이 가난한 자”이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가난으로 인하여 세상에 큰 소망을 두지 못하는 자라도 그에게 임할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와 같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는 자가 바라볼 수 있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너무 커다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참으로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남겨놓고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커다란 재산을 관리하여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 부를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것을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물질적인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까?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의존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클 때 그렇습니다.
마 태복음 19장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10:23-25; 누가 18:24-25).
왜 그렇습니까?
천국으로 향한 문은 좁은 문인데 부자는 양손에 이것 저것 움켜쥔 것이 많아서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의 관련구절을 보면,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고,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 태가 영적인 갈급함과 애통함에 관심을 가진데 반하여, 누가는 육적인 주림과 울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영적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배부름을 얻는 것과 같이 육적인 굶주림을 당하는 자에게도 주님께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많이 만나는 성도마다 위로하시고 웃을 일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찾고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사람들의 판단과 기대와 다릅니까?
사 람들이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무난한 사람이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함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책망함을 받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악하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네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였구나, 버린 바 되었도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어서 이리로 오라’고 하는 주님의 극진한 대접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증거한 사람들 중에 미워 버린 바 되고, 갇히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외칠 때,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심한 푸대접을 받습니다.
미가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그는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궁중 선지자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아합왕에게 싫어 버리고 갇히는 바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할 때 그의 예언을 싫어하는 방백들에 의하여 매를 맞고 옥에 갇힐 뿐만 아니라(렘 37장) 진흙 구덩이에 강제로 처넣어짐을 당합니다(렘 38장).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매 므낫세왕에 의하여 톱으로 베임을 당합니다(히 11:37; 위경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 참조).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할 때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쳐죽입니다(행전 7장).
베드로와 바울, 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여느 중한 범죄자들 중에 한명과 같은 여김을 받으셔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상의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주님을 인하여 세상사람들은 미워하며, 멀리하며, 욕하고,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도 --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칭찬은 세상사람들의 것과 다름을 아시기 바랍니다.

23절에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레미야가, 엘리야가, 아모스가, 미가야가, 기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외치던 많은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싫어 버린 바 되었습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나에게 욕이 돌아오고 화가 임할 때 슬퍼하거나 상심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하며, 바른 증거를 받을 때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주위의 박해에 기뻐하고 뛰놀아야 할 것인데, 이는 박해가 심한 만큼 하나님의 상도 큰 까닭입니다.

24절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부요한 자”는 그의 삶의 가치가 온통 재물에 쏠려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지키고 모으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하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재물보다도 더 귀한 것은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도 재물에 우선을 놓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의 축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배부른 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배고픈 자”--“주린 자”를 돌아봄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자기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교만한 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임할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제 웃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세상의 일로 웃는 자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쏠려 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짓밟고 자신의 권세와 부를 쌓아갑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에 애통하며 울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의외적인 말씀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세상 기준으로는) 원만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일 것인데 이러한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남이 싫어하는 소리는 안하고 남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하는 사람일텐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하여야 할텐데 듣는 사람이 그것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듣기좋은 소리를 함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교회지도자로서 목사님이 생각해봅니다. ‘내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일본사람들이 나와 우리 교회사람들을 싫어하고 욕하겠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되나? 또 내가 거부함으로 인하여 우리 교인들이 다치면 쓰겠나?’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작정합니다.
이 목사님의 결정이 바른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거짓선지자들에 대하여 요한1서 4장 5절에서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있습니다.
참선지자의 선포하는 말이 귀에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의 말은 은근하고 귀에 솔깃합니다. 따라서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거짓선지자의 말을 따라갑니다.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미가야라고 하는 참선지자와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참말을 선포하니 그의 말이 악함과 허물투성이인 아합왕의 귀에 좋게 들릴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400인의 궁중선지자는 온갖 좋은 소리로 아합왕의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아합왕이 거짓선지자들을 좇을 때 그는 아람군대와의 길르앗라못 전투에서 패하여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판단과 칭찬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 구경을 갔는데 부처님께 절하지 않으면 중들이 싫어한다고 부처님께 절하는 크리스천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칭찬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화가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을 받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3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이제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paradox)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우리가 즐겨 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비로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아니 오히려 더 움켜쥐고 하나님께 속한 것도 얻으려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부요한 자이며, 이미 배부른 자이며, 이미 웃는 자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세상 것으로는 가난하여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모하며, 지금 세상에서는 주린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을 사모하며, 현재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기쁨을 삼을 수가 없어서 우는 자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웃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의 오이코노미아(=경제)의 의미

                                        성경 속의 오이코노미아(=경제)의 의미


성경에서 경제(經濟)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iκονομία)는 세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또는 청지기 (=오이코노모스:  οiκονόμος)의 직무’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6:1-4). 즉,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부여받은 각 크리스천 청지기의 달란트의 경영입니다. 각 크리스천은 자신이 청지기(=오이코노모스: 집 맡은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소유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나눔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오이코노미아는 ‘복음 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 증거를 위한 청지기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9:17). 복음 증거란 지상(至上) 사명을 맡은 크리스천이 개인으로 또는 공동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셋째로, 오이코노미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經綸)’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1:9). 즉, ‘하나님의 경제(經濟) 혹은 경제계획(經濟計劃)’입니다. 하나님의 경제계획은 다름아닌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人間救援)입니다. 이 시대상황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임은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육적·경제적인 빈곤으로 신음하는 이웃을 구원함도 교회가 감당하여야 할 일입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성경을 ‘크리스천들을 위한 (하나님의) 경제학 교과서’라고 봅니다. 성경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 이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9절) ......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不足)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13-15절)고 함으로써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이미 찾을 수 있습니다(출 16:18).

 빈들에서 오천 명(남자의 수만)을 먹이신 예수님의 5병 2어의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나눔의 사역’을 보여주신 예입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바울의 예에서도 그러했듯이, ‘나눔의 사역’을 통해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눔의 경제사역’을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셨고, 19절에서 보면, “... (예수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함으로써 제자들을 ‘나눔의 사역’에 동참시키셨습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초대교회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나누고 통용할 때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행전 2:44-47, 4:32-35).

 필자는 저서 「Y2K, 무엇이 문제인가?」와 바울서신을 강해한 설교집들(로마서, 고린도전서-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빌립보서)에서 ‘21세기 한국교회’의 모델로 ‘평균의 경제원리’를 실천하는 ‘나눔의 교회’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청지기의 일과 복음 증거의 사명과 하나님의 구원계획(=경륜)을 온전히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삼위 축도" (고후 13:13)

"바울의 삼위 축도" (고후 13:13)


성경구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바울은 13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함으로써 고린도후서를 마칩니다.
구 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도 대제사장들이 축도를 하였는데, 그 축도의 전형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즉,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머물게 된 신약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도는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본 절은 바울의 서신들에 등장하는 축도들 가운데 가장 온전한 형태로서 현대 대부분의 교회들의 목사님들의 축도의 전형입니다. 축도의 제일 먼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축도는 바울의 모든 서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 마서 16장 20절에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했고, 고린도전서 16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8절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했고, 에베소서 6장 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고 했고, 빌립보서 4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6장 21절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22절에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도서 3장 15절에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빌레몬서 1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은혜(χάρις)는 나의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용서와 선물을 체험케 하는 선하시고 친절하신 뜻(grace, kindness, glory, goodwill)입니다.
그 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롬 5:6, 8, 10)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하나님 앞에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엡 6:23 참고).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환난과 곤고와 어둠과 깊음과 사망 가운데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가능케 합니다.

그 위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 가운데 교통하심으로 각 사람의 필요와 간구를 생각나게 하시며, 성도와 하나님 간에 역사하사 성도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시편 23:1-6)


1
‘목사’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단어가 세 개가 있는데, priest, minister와 pastor 입니다.
Priest는 구약의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말로서, 교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세례와 성찬의 성례전을 베풀고, 예배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Minister는 헬라어 διακονος에서 유래된 것으로 deacon 집사라고도 번역되는데, 교회행정을 담당하고 봉사하는 일을 맡은 일꾼(servant)이란 뜻입니다.
Pastor는 ‘목회자’란 뜻으로 교회란 목초지 또는 목장(pasture)에서 하나님의 양인 교인을 인도하는 목자(shepherd)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목자의 본을 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라 양들을 잘 인도해야 할 것인데, 요즈음 교회들은 목사가 목자의 역할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교인 또한 양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염소가 되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 가끔 산에 흰 줄이 여러 개로 가있는 장면을 발견하는데 가까이 가보면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행렬(行列)입니다. 어느 여행자가 목동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따르는 양들이 모두 몇 마리나 되는 줄 압니까?” 그는 “모릅니다”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때 잃어버린 양이 있는 줄도 모르겠네요?!”  “아니요, 압니다.”  “나는 나의 모든 양을 이름으로 압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4-15절(또한 10:11)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시고,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다고 하십니다. 양은 이러한 선한 목자를 전적으로 따르며, 그를 의지하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푸른 초장에서 꼴을 먹고 물가에서 물을 마십니다.

2
이 시편을 지은 다윗에게 전쟁은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의 장인 사울과의 싸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의 쫓김.... 물론, 다윗에게 평안한 때도 있었지만, 그의 생의 많은 부분이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 시에서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두 개의 비유적 표현(imagery)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5-6절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시편 23편은 함축적으로 표현된 시지만,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의 자상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1-4절에서는 목자로, 5-6절에서는 하늘의 집 주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간략한 두 단어('여호와 로이')의 표현이지만, 말하는 사람의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한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했습니다.
“나의”란 표현으로 다윗은 천지주재(天地主宰)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목동의 일을 하였던 다윗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양들을 물과 꼴로 마시우고 먹이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사자와 곰과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그와 이스라엘을 먹이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자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으로 나에게 공급해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실 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
다윗은 무엇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어 느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다는 확신에 찬 표현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기고 있고 그의 처들이 대낮에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도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지으신 이--하나님께 그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은 참으로 미련하고 재주가 없는 짐승입니다. 양에게는 집단행동의 본능이 있습니다. 한 양이 독초를 뜯어먹고 죽으면 다른 양들도 독초를 뜯어먹고 죽는다고 합니다. 미련한 양은 도살장(屠殺場)에 끌려감에도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 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부족한 양을 목자 되시는 주님이 사랑하신다고 증거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염소로부터 구분되어 양의 반열에 서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마태 25장). 이는 양이 재주가 없고 미련한 대신에 목자가 주는 꼴만 먹고 그의 인도함에 따라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로 해(害)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꼴을 먹고 풀밭에서 눕게 하시며 마실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쉬게 하십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네페쉬')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소생시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슙'의 원 뜻은 ‘가던 길을 돌이키다, 돌아오다’(return)인데 이에서 ‘회개하다’(repent)와 ‘소생하다, 회복하다’(restore)의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가던 길을 돌이키다”--즉, 바른 길로부터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는데 이에서 돌이켜 원래의 바른 길--하나님의 길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의의 길”--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의 길로 가던 사람이 방향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옴이 ‘회개하다’입니다. 죄의 길은 사망의 길이었는데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온 사람에게는 생명의 소생(蘇生)이 있습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곧잘 집으로 돌아오지만, 양은 쉽게 바른 길(right paths)을 잃고 다른 길로 갑니다. 양은 바른 길에서 떠나면 그 스스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양이 바른 길에서 떠남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에게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목자는 양을 바른 길-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다윗이 현재 처하여있는 처지는 그로 미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그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고 또 만인이 보는 대낮에 지붕 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합니다(삼하 16:21-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낙망과 고통으로 그릇된 길로 행할지 모르는, 좌절하여있는 영혼에게 힘을 주시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소생시키시며, 그릇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양들이 의의 길로 행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함인데(“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므로 영광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
양이 먹을 수 있는 풀이 항상 평지에만 있으면 좋을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평지의 풀이 다 없어지면,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고지나 혹은 골짜기로 다닙니다. 길이 험하여서 해를 당할 것 같지만, 목자의 인도에 따라 행할 때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지금 여러 가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경이지만, 그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주님의 같이하심-임마누엘(Immanuel)-을 느끼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rod)는 한 끝이 굽어져있는 것인데, 이로서 수풀을 헤치거나, 양이 가시덤불에 걸렸을 때 굽어진 끝으로 빼냅니다.
약 2 feet 가량 되는 목자의 막대기(staff)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무기입니다. 막대기 끝에 날카로운 금속을 달아 사자나 곰, 기타 맹수의 공격 때 이들을 쫓습니다. 목자가 맹수로부터, 거친 자연조건으로부터 양들을 지킬 것이기에 양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자의 함께 함으로 안위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행 안내자가 미국 여행자들에게 이스라엘 목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절대로 양을 지팡이로 때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지팡이로 양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며 몰고 지나갑니다. 여행 안내자는 민망해서 그에게 묻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도살꾼’이라고 합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4절에 어두워졌던 분위기가 5절에서 전환됩니다. 4절의 좌절과 침체가 극복되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의 장인 사울이 그를 죽이고자 하고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미리부터 예비하신 상을 베푸십니다. 그의 적들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다윗과 마주 앉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어 그를 최고의 손님으로 우대하십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차고 넘치시는 축복입니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의 손님은 특별한 날에 초청받는다는 의미(意味) 이상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계속되는 그 천국의 혼인잔치에 영원히 머무는 손님입니다.
다윗이 현재 여호와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정태적(情態的) 표현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 장차 머물 것이라는 역동적(力動的)이고 진행적(進行的)인 소망의 표현입니다.
목자 되신 여호와를 바라봄으로 세상의 삶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갖는 소망의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십니다.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 가운데도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양과 같이 재주 없고 미련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목자이십니다. 그들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갈 길을 모르고 헤맬 때에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을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십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이름으로 아시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에 우리를 부르시고,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 리가 사망과 고통의 길을 혼자 가고 있다고 생각할 그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도 우리의 공급자,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풍족한 것으로 공급하시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모든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매 우리가 안전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은혜가 무한하며, 차고 넘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를 원할 것이며, 이 때 주인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의 자비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