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0, 2015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갈 3:6-9)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갈 3:6-9)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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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聖地) 이스라엘을 관광하려고 가면 여러 가지 특이한 것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관광 안내자들의 학벌이 상당히 높은 것에 놀라게 됩니다. 1999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우리 목사 그룹(Princeton 동문들)의 관광안내를 세 사람이 맡았었는데 (전체 관광안내 1명, 갈릴리 유적지 관광안내 1명, 예루살렘 유적지 1명), 그 세 사람 모두 고고학자요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그 중에 두명은 이미 박사학위(Ph.D.) 소지자요 한 명은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만이 고학력자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관광안내원이 고학력자이며 고고학과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하루 일당이 높아서 관광안내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의 유적지들(구약과 신약시대의 유적지 모두)을 외국관광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들 거의 전부가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관광안내를 잘하기 위하여 신약성경(특히 복음서)에도 통달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적,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 고난의 장소, 죽음의 장소, 승천의 장소와 이에 얽힌 사연들을 훤하게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자(Gaza), 웨스트뱅크(West Bank) 등 분쟁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거주 지역이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큰 충돌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관광안내를 맡은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그 관광버스의 운전기사들은 아랍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운전기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아랍인들 거주지역에 위치한 유적지나 식당을 들를 때에 적대감 없이 우호적인 대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 땅과 갈릴리 사이의 갈릴리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는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야곱의 열 아들들의 후손들(북방왕국 이스라엘)인 (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혼합민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인들의 땅이었는데, 지금은 사마리아인들은 흔적이 없어져버리고 아랍인들이 사는 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아랍인들의 선조가 누군가 하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이 86 세 때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그의 첫 번째 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부터 반복하여 세 가지 약속을 주시는데, 곧 민족과 땅과 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이 처음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의 나이가 몇살이었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곳을 떠나서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있는 하란(Haran)이라고 하는 곳에서 머물다가 아비 데라가 죽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인 것을 보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의 나이는 아마도 육십 세를 전후한 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확신이 약해질 때쯤이면 하나님께서 한 번씩 나타나셔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곤 했는데, 이러한 약속의 반복도 이행의 증거 없이 이십여 년이 지나가니깐 지치는가 봅니다. 너무나 오래 기다리다 보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뜻이 우리가 생각한 것 하고는 다른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갖게 되는데, 흔히 이런 일에 밝은 쪽은 (성경에 의하면) 남자보다는 여자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이니, 아마 당신 몸 하고만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구려. 우리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여종 하갈이 아리따우니 그를 취하여 자식을 생산해 보도록 하세요.” 아브라함이 신중한 사람 같았으면 ‘더 기다려 보자고 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면 여쭈어보고 결정하자’라고 했을 터인데, 그는 아내 사라의 의견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여 (창 16:2), 하갈과 동침하고 그가 잉태하여 자식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이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응답보다 앞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1절이하에서 이 이스마엘을 가리켜 육체를 따라 난 자(4:23, 2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요(4:23),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4:29)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경청하여 들었기에 육의 자녀 이스마엘을 얻게 되고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손들의 갈등은 이미 그 초기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 사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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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justification by faith)가 그의 전혀 새로운 궤변이 아님을 성경 아브라함의 예룰 갖고 설명합니다.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절은 창세기 15장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롬 4:3, 9; 약 2:23 참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을 때,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정하셨다(=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의로 정하셨다(=여기셨다)”고 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의 절대적 기준에 못미치는 것일지라도 “의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행위로는 특별히 흠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으로 인해 남편이라고 하면 죽일까 두려워하여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자진하여 애굽왕 바로에게 바칩니다(창 12:11-20). 물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아무런 일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20년쯤 지나 가나안 남쪽 그랄 지방에 우거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의 연고로 그랄 왕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동생이라고 하므로 아비멜렉이 그를 취하고자 합니다(창 20:1-7).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아무 일이 없게 하십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무모한 것은, 이 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7:15-22, 18:9-15)고 약속을 주셨었는데, 그 약속의 몸을 함부로 범하게 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입니까?
이러한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실수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부르시고, 명하실 때,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명하심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 중에서도 교활하고 사기꾼 같은 야곱을 택하시고, 그를 들으시고, 축복하셔서 그에게 이스라엘--“하나님과 씨름한 자”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허락하십니까? 또 그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까? 벧엘에서, 그리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기뻐 보신 까닭입니다.

   7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이 혈통을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인줄 아는데, 바울의 이와같은 선포는 놀라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선조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1-12절과 16절에서 “저(=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절).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12절). ... 그러므로 후사에 속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 밖에 있었던 자들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더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들어감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입니까?

   8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구약, 특히 야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이 오직 그들에게만 있는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있을 복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창세기 12장 3절 (또 18장 18절과 22장 18절; 행전 3:25 참고)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약속하신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원래 여리고성의 창기로서 그 성의 함락과 함께 죽을 것이었지만, 그가 여호와를 믿고 바라보았기에 그 가정과 더불어 구원함에 이르고(수 6장, 히 11:31),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마 1:5).
룻은 이방 미디안 여자였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기에 “토지무를 자”(고알: לאוג)로서 구약의 예수님의 모형인 보아스와 결혼하고 예수님의 반열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었습니다(룻 4장).
니느웨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적으로서 그들의 패역함이 하늘을 찌르기에 무너져내려야 할 자들이었지만, 요나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적으로 간구하였기에 멸망치 않고 구원받는 복을 얻었습니다(욘 3장).

이방 사람들은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매 그의 보혈의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는 모든 이방인들도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 2:12-18).

여기서 “성경”이라고 말씀함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본문에서 의인화시켰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속박과 의무규정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언급할 때는 ‘율법(律法)’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순전하신 뜻을 의미함에는 ‘성경(聖經)’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 복음을 전했다”는 뜻은 복된 소식(gospel),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이미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바울은 7, 8, 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ἐκ πίστεως)이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men of faith)가 되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내가 가져야 되겠다고 하여 가져지는 것이 아니고 버려야 되겠다고 하여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만 있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을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을 구하기 위해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信賴)--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라고 함은 그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약속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 위에 밧줄을 묶고 바퀴가 하나 달린 자전거로 미국에서 카나다까지 건너가겠다고 말합니다. 건너가는데 혼자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 중에 한 사람을 태우고 가겠다고 합니다. 구경꾼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밧줄을 잘 타는지 압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밧줄타기 공연을 한 이래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음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이아가라 폭포를 동반하여 건너갈 자원자를 찾음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한 소년이 나섭니다. 나를 태우고 건너가라고 합니다. 구경꾼들이 놀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소년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믿어요. 그는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어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밧줄을 잘 타는 사람이에요.” 이와 같이, 나의 생명까지 내어맡길 수 있음이 전적인 신뢰의 믿음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종종 야단치는 편인데, 어떤 때는 아이가 왜 야단을 맞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야단을 치고 나서도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야단을 맞은 아이는 10분도 못되어 웃는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서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아빠가 왜 자신을 야단쳤는지 잘 모르지만, 아빠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야단맞을 일이 있어서 야단맞았지 생각한 것이고, 자신을 야단치는 아빠가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에 지금 웃는 얼굴로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아빠와 자녀의 신뢰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춘기의 틴에이저(teenager)가 되고 자기의 이성과 주장으로 판단하게 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보다 앞선 전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순종(順從)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긴 한데 그 말씀 아래 나를 두지 못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함은 아직 믿음의 마음이 내게 적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들이 적혀 있는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 말씀 아래 자신을 두지 못함은 순종의 마음, 곧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이 믿어져서 그대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믿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순종으로 인하여 후에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약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순종의 믿음--믿음 이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시고, 24절에서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킴이 의무감이나 억지로 되어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내게 율법적인 강요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하나님의 선물(gift)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모할뿐 아니라 간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비한 자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람 보기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낮아지고 겸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마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고, 또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아직 내세와 영생이 계시되지 않은 구약시대에서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복은 이땅에서의 부(富)와 장수(長壽)와 번영(繁榮)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 계시되어진 신약백성들에게 복은 영적인 것으로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도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시고 8절에 또다시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후손의 생사화복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약속하시되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울은 로마서 8장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 가운데 거함이 믿는 자가 누릴 지고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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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고, 또한 사랑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을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기시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 인하여서 이 세상에서의 한정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의 증거로서 우리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시며 그분의 다스리심 가운데 우리를 두시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갈 3:1-5)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갈 3:1-5)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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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리석은 일들을 생각하고 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거나 칭찬 대신에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초(楚)나라의 재상 소양(昭陽)이 위(魏)나라를 쳐서 군대를 와해시키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은 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齊)나라를 공격합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크게 걱정하며 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는 진진(陳軫)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습니다. 진진은 “염려 마십시오, 폐하. 소인이 곧 초군의 진지를 찾아가 침공을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초군의 진영으로 소양(昭陽)을 찾아가 그와 회견합니다.
진진은 소양에게 묻습니다. “초나라의 법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이면 어떤 벼슬이 주어집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벼슬은 상주국(上柱國: 최고의 공로를 세웠을 때 주는 벼슬), 작위는 집규(執珪: 최고의 작위)가 주어질 것이오.”
진진이 다시 묻습니다. “그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오직 영윤(令尹: 재상)이 있을 뿐이오.”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습니다. “영윤(令尹)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왕도 영윤을 두 사람씩 두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소양에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초나라의 제사를 맡은 사람이 임금의 시종(侍從)들에게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시종들이 서로 말합니다. ‘몇 사람이 마시자면 감질이 나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뱀의 몸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려고 왼손으론 술잔을 잡고 오른 손으론 뱀의 발을 그리면서 ‘난 발까지 그릴 수 있어’라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그가 발을 그리고 있는 사이에 뱀의 그림을 완성한 두 번째 사람이 술잔을 빼앗으며 말합니다. ‘뱀은 원래 발이 없네. 발을 그리면 안 되는 걸세.’ 이렇게 말하고는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뱀의 발--사족(蛇足)--을 그리던 사람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한 것입니다.“
진진은 소양을 보며 말을 잇습니다. “어떻습니까? 대감은 이미 초나라의 영윤(令尹: 재상)이시고 이미 위나라를 공격해 장군을 죽이시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또 제나라를 침공하시고 승리하신들 무슨 보람이 있으시고, 더 이상 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지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뱀에다 발을 그리는 격이 됩니다.” 소양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습니다(<<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우리의 어리석음 가운데는 이만하면 충분한 데 그 이상을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리자 걱정이 되는 신심(信心)이 큰(?) 아내는 새벽기도까지 다니면서 ‘남편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를 아는 그의 친구 되는 분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드리면 잘 될 터인데”라고 조언하자, 이 분은 속으로는 약간 꺼리지만,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도 기도 드리고 부처님께도 불공을 드리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지나친 신심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는(출 20:5; 신 5:9) 괴씸죄를 짓는 결과를 낳습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아직 캐톨릭 신부로 있을 때, 자신의 죄가 온전히 용서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진 것 같지 않아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계단을 자기 마음에 죄 용서받은 것같이 느껴질 때까지 계속하여 기어서 오르내리는 고행(penitence)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사족을 다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지금도 캐톨릭에서는 그들이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한 세계 여러 고행의 장소에 신자들이 가서 고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프랑스 ‘루르드’에 ‘거룩한 계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마리아가 18번 나타났기에 거룩한 장소로 지정된 장소가 된 곳이라고 합니다. 로마교황청은 1년에 4번 이곳에 와서 무릎으로 이 계단을 오르는모든 신자들에게 연옥(煉獄)에서의 9년 간의 속전(면죄: indulgence)을 약속하여주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행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러한 고행의 제도 속에 있는 카톨릭 교도에게는 이것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죄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토라라고 하여 십계명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 사항들을 주셨습니다. 토라의 원래의 의미는 “지시사항, 가르치심”인데, 이를 속박과 제한의 의미의 “율법”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토라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법 규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안식일을 예로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세부사항들을 정합니다. 안식일에 십리 이상을 걷는 것, 나무의 가지를 꺽는 것, 몸을 지나치게 움직이는 것 등등 이러한 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는 것이므로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라고 하나님께 과잉충성하는 의도에서 스스로 정하여 놓고 이를 정한 사람들도 그 규범의 속박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행위같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먼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더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분을 내며 송사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심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도 지키지 못 할 세부 규칙을 만듦으로 스스로 율법 속에 갇히는 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을 질문으로 시작하여서 질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목회자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명시적(明示的)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밝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 있었던 일입니까?’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은 십자가 사건에서 불과 20년밖에 경과되지 않은 때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눈으로 목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틀림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 막달라 마리아, 주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목도한 500여 형제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틀림없는 사실이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의로와지고 부활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고전 15:8-9).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증언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틀림 없는 사실이요 그들 삶에 중요한 전기--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확신으로 바라보고 믿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는데, 여기에서 돌이켜 겉모양의 유대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비난을 피하고) 칭의(稱義)에 관하여 안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고 할례와 식사규례 등의 의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고자 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바울은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who has bewitched you?)란 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카이노’(βασκαίνω)는 “(악마같은) 마술사가 마법을 걸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다, 최면술을 걸다(bewitch, place under a spell, hypnotize)”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와 식사 등의 율법 행위를 하라고 부추긴 사람들도 (유대인) 크리스천이긴한 데, 그들이 한 짓꺼리를 보면 이는 마치 마귀의 짓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복음의 진리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라고 한 바울의 이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의 확신에서 떠나도록 미혹하였습니다.

   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복하여 전하고 가르친 복음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인 너희가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을 잘 지켜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질문하고 그들에게 대답해 보라고 합니다. 정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에베소 지방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을 때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전 19:2)였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에”가 아니고 “믿을 때에”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할례자들이 “네가 무할례자(=고넬료와 그 가정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와 함께 먹었다”(행전 11:3)고 힐난하며 시비꺼리로 삼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성령)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구별 없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어리석으냐?” 1절에 이어서 “어리석다”(ἀνόητοι)란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를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였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듣고 믿음”(2, 5절)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의 믿음의 삶을 시작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과잉된)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부추김으로 할례와 율법을 좇아가는 모습은 믿음이 아닌 종교행위일 뿐이며 이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육적(肉的)인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이는,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임하시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3절의 헬라어 원문은 단지 ”영“: πνεύμα)의 생각은 생명인데, 율법으로 말미암는 육체(=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는 것인데, 율법의 의문은 우리를 죽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질문들이 생길 것입니다.
율법의 원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러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들을 옥죄고 멍에를 지우는 법조문(法條文)이 되어서는 그들을 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는 데 효력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 전체적으로 무익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율법의 유익(有益)에 관해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세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했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리라.”(롬 7:7)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율법 지킴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까?
믿음으로 의로와진 다음에도 의무감이나 구속감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지킴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성화(聖化)의 삶이 아니요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지켜나가는 삶을 살 터인데, 이것이 의무감이나 제약감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그에게 즐거움이요,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4절에서 “육신(=육체)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4절: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은 괴로움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쓸 데 없는 일에 시간과 몸과 생명을 낭비하는 사람 취급을 받아왔고,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반쪽짜리 크리스천 대우밖에 받지 못하여왔습니다. 그들의 무할례가 식사규례가 여전히 시비꺼리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 크리스천들로 말미암아, 할례를 받고, 식사규례를 변경하고, 모세의 율법을 따르기로 작정하여 그들의 이방인의 모습을 버리고자 함은 그들이 이제까지 받아온 괴로움과 핍박을 헛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례가, 식사규례가, 모세의 율법이 그들의 칭의와 구원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상실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믿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로부터 당하는 조롱과 비방을 견딤이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련이요 연단일진데 이를 견딤이 마땅합니다.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셨는데 이 일이 율법에 복종하려고 할 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듣고 그를 믿음으로냐고 바울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질문들이 그러하듯이 대답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2절 반복).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그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능력을 수반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계시고 역사함을 확실히 알게 하심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그 능력을 행하셨는데, 그들이 이것을 경험하였는데, 이에서 떠나 율법의 행위로 덧입고자 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3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생활을 종교행위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직분이나 체면치례의 봉사나 의무 기타 외형적인 것에 너무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에, 주일날 예배드릴 때만 믿음이 있는 것같고 거룩한 척하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에게 바울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의무로서 속박지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함의 즐거움과 자원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성숙한 표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