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갈 3:1-5)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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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리석은 일들을 생각하고 행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함으로써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거나 칭찬 대신에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초(楚)나라의 재상 소양(昭陽)이 위(魏)나라를 쳐서 군대를 와해시키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은 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齊)나라를 공격합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크게 걱정하며 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는 진진(陳軫)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습니다. 진진은 “염려 마십시오, 폐하. 소인이 곧 초군의 진지를 찾아가 침공을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초군의 진영으로 소양(昭陽)을 찾아가 그와 회견합니다.
진진은 소양에게 묻습니다. “초나라의 법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적군을 무찌르고 적장을 죽이면 어떤 벼슬이 주어집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벼슬은 상주국(上柱國: 최고의 공로를 세웠을 때 주는 벼슬), 작위는 집규(執珪: 최고의 작위)가 주어질 것이오.”
진진이 다시 묻습니다. “그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까?”
소양이 대답합니다. “오직 영윤(令尹: 재상)이 있을 뿐이오.”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습니다. “영윤(令尹)은 고귀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왕도 영윤을 두 사람씩 두지는 않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소양에게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줍니다.
”초나라의 제사를 맡은 사람이 임금의 시종(侍從)들에게 큰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시종들이 서로 말합니다. ‘몇 사람이 마시자면 감질이 나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뱀의 몸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려고 왼손으론 술잔을 잡고 오른 손으론 뱀의 발을 그리면서 ‘난 발까지 그릴 수 있어’라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그가 발을 그리고 있는 사이에 뱀의 그림을 완성한 두 번째 사람이 술잔을 빼앗으며 말합니다. ‘뱀은 원래 발이 없네. 발을 그리면 안 되는 걸세.’ 이렇게 말하고는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뱀의 발--사족(蛇足)--을 그리던 사람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한 것입니다.“
진진은 소양을 보며 말을 잇습니다. “어떻습니까? 대감은 이미 초나라의 영윤(令尹: 재상)이시고 이미 위나라를 공격해 장군을 죽이시고 여덟 개의 성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또 제나라를 침공하시고 승리하신들 무슨 보람이 있으시고, 더 이상 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행히도 지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뱀에다 발을 그리는 격이 됩니다.” 소양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습니다(<<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우리의 어리석음 가운데는 이만하면 충분한 데 그 이상을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리자 걱정이 되는 신심(信心)이 큰(?) 아내는 새벽기도까지 다니면서 ‘남편의 새로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를 아는 그의 친구 되는 분이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드리면 잘 될 터인데”라고 조언하자, 이 분은 속으로는 약간 꺼리지만,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께도 기도 드리고 부처님께도 불공을 드리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지나친 신심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는(출 20:5; 신 5:9) 괴씸죄를 짓는 결과를 낳습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아직 캐톨릭 신부로 있을 때, 자신의 죄가 온전히 용서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진 것 같지 않아 성 베드로 성당 앞의 계단을 자기 마음에 죄 용서받은 것같이 느껴질 때까지 계속하여 기어서 오르내리는 고행(penitence)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온전히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사족을 다는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지금도 캐톨릭에서는 그들이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한 세계 여러 고행의 장소에 신자들이 가서 고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프랑스 ‘루르드’에 ‘거룩한 계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마리아가 18번 나타났기에 거룩한 장소로 지정된 장소가 된 곳이라고 합니다. 로마교황청은 1년에 4번 이곳에 와서 무릎으로 이 계단을 오르는모든 신자들에게 연옥(煉獄)에서의 9년 간의 속전(면죄: indulgence)을 약속하여주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행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러한 고행의 제도 속에 있는 카톨릭 교도에게는 이것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죄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토라라고 하여 십계명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여러 사항들을 주셨습니다. 토라의 원래의 의미는 “지시사항, 가르치심”인데, 이를 속박과 제한의 의미의 “율법”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토라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법 규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안식일을 예로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세부사항들을 정합니다. 안식일에 십리 이상을 걷는 것, 나무의 가지를 꺽는 것, 몸을 지나치게 움직이는 것 등등 이러한 것은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는 것이므로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라고 하나님께 과잉충성하는 의도에서 스스로 정하여 놓고 이를 정한 사람들도 그 규범의 속박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행위같지만 하나님의 뜻하고는 먼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더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분을 내며 송사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심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도 지키지 못 할 세부 규칙을 만듦으로 스스로 율법 속에 갇히는 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을 질문으로 시작하여서 질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목회자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명시적(明示的)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큰지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밝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 있었던 일입니까?’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은 십자가 사건에서 불과 20년밖에 경과되지 않은 때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눈으로 목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틀림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 막달라 마리아, 주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목도한 500여 형제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틀림없는 사실이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의로와지고 부활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고전 15:8-9).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증언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틀림 없는 사실이요 그들 삶에 중요한 전기--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확신으로 바라보고 믿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는데, 여기에서 돌이켜 겉모양의 유대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비난을 피하고) 칭의(稱義)에 관하여 안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고 할례와 식사규례 등의 의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고자 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바울은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who has bewitched you?)란 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카이노’(βασκαίνω)는 “(악마같은) 마술사가 마법을 걸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다, 최면술을 걸다(bewitch, place under a spell, hypnotize)”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와 식사 등의 율법 행위를 하라고 부추긴 사람들도 (유대인) 크리스천이긴한 데, 그들이 한 짓꺼리를 보면 이는 마치 마귀의 짓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복음의 진리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라고 한 바울의 이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의 확신에서 떠나도록 미혹하였습니다.
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복하여 전하고 가르친 복음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인 너희가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을 잘 지켜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질문하고 그들에게 대답해 보라고 합니다. 정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에베소 지방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을 때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전 19:2)였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에”가 아니고 “믿을 때에”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할례자들이 “네가 무할례자(=고넬료와 그 가정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와 함께 먹었다”(행전 11:3)고 힐난하며 시비꺼리로 삼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성령)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구별 없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어리석으냐?” 1절에 이어서 “어리석다”(ἀνόητοι)란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가’를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였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듣고 믿음”(2, 5절)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의 믿음의 삶을 시작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과잉된)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부추김으로 할례와 율법을 좇아가는 모습은 믿음이 아닌 종교행위일 뿐이며 이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육적(肉的)인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이는,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임하시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3절의 헬라어 원문은 단지 ”영“: πνεύμα)의 생각은 생명인데, 율법으로 말미암는 육체(=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는 것인데, 율법의 의문은 우리를 죽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질문들이 생길 것입니다.
율법의 원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러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며 결국 죽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들을 옥죄고 멍에를 지우는 법조문(法條文)이 되어서는 그들을 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는 데 효력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 전체적으로 무익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율법의 유익(有益)에 관해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세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했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리라.”(롬 7:7)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율법 지킴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까?
믿음으로 의로와진 다음에도 의무감이나 구속감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렇게 지킴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성화(聖化)의 삶이 아니요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지켜나가는 삶을 살 터인데, 이것이 의무감이나 제약감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그에게 즐거움이요,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4절에서 “육신(=육체)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4절: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은 괴로움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쓸 데 없는 일에 시간과 몸과 생명을 낭비하는 사람 취급을 받아왔고,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반쪽짜리 크리스천 대우밖에 받지 못하여왔습니다. 그들의 무할례가 식사규례가 여전히 시비꺼리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 크리스천들로 말미암아, 할례를 받고, 식사규례를 변경하고, 모세의 율법을 따르기로 작정하여 그들의 이방인의 모습을 버리고자 함은 그들이 이제까지 받아온 괴로움과 핍박을 헛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례가, 식사규례가, 모세의 율법이 그들의 칭의와 구원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상실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믿는 유대인 크리스천들로부터 당하는 조롱과 비방을 견딤이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련이요 연단일진데 이를 견딤이 마땅합니다.
5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셨는데 이 일이 율법에 복종하려고 할 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듣고 그를 믿음으로냐고 바울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질문들이 그러하듯이 대답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2절 반복).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그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능력을 수반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계시고 역사함을 확실히 알게 하심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그 능력을 행하셨는데, 그들이 이것을 경험하였는데, 이에서 떠나 율법의 행위로 덧입고자 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3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생활을 종교행위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에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직분이나 체면치례의 봉사나 의무 기타 외형적인 것에 너무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기에, 주일날 예배드릴 때만 믿음이 있는 것같고 거룩한 척하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에게 바울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의무로서 속박지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함의 즐거움과 자원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성숙한 표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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