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상전과 종” (에베소서 6:5-9)
6:5 종들아 두려워 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긋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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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원망꺼리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비웃음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싫어서 주님의 일을 안한다면 이 사람은 더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라, 참람(僭濫)한 말을 하는 자라 정죄당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다른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비방꺼리가 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다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욕을 당하고 원망꺼리가 되어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확실히 할 것은, 욕을 당하고 원망꺼리가 되되 자신을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원망꺼리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증거하다가 원망꺼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으니 욕먹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부커 워싱톤(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이란 사람이 있는데 19 세기 말로부터 20 세기 초를 산 흑인 교육자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하여 갔습니다. 그곳으로 이사하자 그는 대학교가 위치한 마을 주변을 어느 늦은 오후 시간에 산책하였습니다. 한 백인 여자가 장작을 패야 하는데 마침 한 흑인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릅니다. “이봐요 당신, 이리 와서 이 장작 좀 패주지 않겠어요?” 부커 워싱톤은 두말 하지않고 “그러지요” 대답하고는 열심히 그 부인이 가리키는 장작더미를 다 패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또 다른 잔일도 해달라고 명령쪼의 부탁을 합니다. 워싱톤은 군말하지 않고 성실하게 그 백인 여자가 당부한 일을 처리하여 줍니다.
그로부터 며칠 안있어 그 마을에 있는 대학교의 총장 취임식이 있다고 지방신문에 광고되고 그 백인 여자도 총장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궁금하여 취임식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연설하기 위해 단에 선 총장의 얼굴을 본 그 부인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인권이 신장되기 전인 20 세기 초반의 일이지만 저명한 흑인 교육자요 지도자인 총장을 흑인 노예 부리듯이 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지나친 일이라 생각되어 취임식이 끝난 다음에 워싱톤 총장을 찾아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행동을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총장님,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그 때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워싱톤 총장은 미소를 띈 얼굴로 “아닙니다, 부인. 그날은 덕분에 운동을 잘 한걸요.”
2
바울은 오늘 본문 상전과 종의 예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와의 세 번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주의 신학자들이나 북미의 흑인 신학자들은 에베소서 6장과 골로새서 3-4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한 권면을 싫어합니다. 이는 지배층의 횡포를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묵인하는 구절(句節)이라고 하여서 성경에서 제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글은 상전과 종의 관계를 당연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현 세상을 살고있는 나의 입장에서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관계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순종함이 참으로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내가 아내로서, 자식으로, 또한 종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나의 신세를 비관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남편을 대하되 그리스도를 대하듯 할 것이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므로 영의 부모인 하나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종으로서 상전을 대함에도 성실하고 기쁨으로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설교할 때 믿는 사람으로서 또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상전이신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떻게 함이 합당한 것인가 설교하고자 합니다.
5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상전에게 순종하되 “두려워하고 떨며” 하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다”는 말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어떤 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또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의 권력이나 사단의 권세 앞에 두려움은 믿는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요한도 계시록 21장 8절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들과 환경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며 싫어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두렵고 떨며”라고 함은 극한적인 경외함인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러한 마음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상전이신 주님을 대할 때 우리는 “성실한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ἁπλότητι)는 원어적 의미로는 “단순한 마음으로 (with simplicity)”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with single-hearted devotion)"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순종하되 이거 저것 재고 얻어질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님되시기에 정몽주의 시조에 나오듯이 “님 향한 일편단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단심(丹心)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6절: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의 종으로 상전이신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함은 겉과 속이 같게 하여야 합니다.
체면치례(體面致禮)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 예배에 빠지면 목사님이 뭐라고 생각하실테지 해서 주일예배에 참예함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쁨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행하기 보다는 사람의 귀와 눈을 찡그리게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주인의 일을 나의 일처럼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교회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할 때 나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의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 속에 파묻은 그 “악하고 게으른 종”도 자기의 일을 함에는 그렇게 게으른 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문제는 주인의 일을 경시 여기며 눈가림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7절: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바울은 사람의 상전을 섬길 때도 주를 섬기듯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믿는 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서 만홀히 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되 “단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단 마음으로”(μετʹ εὐνοίας)라고 함은 “기쁜 마음으로” 혹은 “선한 마음으로”(with a good will) 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말씀합니다.
우리의 상전이신 주님을 섬길 때, “단 마음으로”--즉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뜻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8절: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되,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행한대로 우리에게 상급을 베푸실 것입니다.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앎이니라.
우리가 혹 아랫 사람을 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우리의 태도는 윽박지르거나, 협박하거나, 공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종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떠는 마음으로 아랫 사람을 선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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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주일 정성스럽고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상전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단 마음으로” 하기로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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