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감사 조건” (빌립보서 1:1-11)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懇求)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懇求)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始作)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思慕)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證人)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聰明)으로 점점 더
풍성(豊盛)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찬송(讚頌)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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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약외경서 중에 바울행전(Acts of Paul)이 있는데 거기에 바울의 외모에 대한 표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고니온(Iconion)에 오네시보로(Onesiphorus)란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집밖에 나와 아내(Lectra)와 두 아들(Simmias와 Zeno)과 함께 기다립니다. 바울과 친하게 지내던 디도(Titus)의 편에 바울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들었기에 그렇게 생긴 사람이 오는가 멀리까지 내다봅니다. 그랬더니, 아닌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저만치서 오고 있습니다. 그 바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하면, “키가 작고, 대머리에다가, 두 다리는 휘어졌으나, 몸의 상태는 양호한 편입니다. 두 눈썹은 서로 만나고, 코는 갈고리 모양 휘어졌으나 (유대인들의 매부리코), 친근감이 넘쳐납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얼굴이고, 또 어찌 보면 천사의 얼굴처럼 보입니다 (And he saw Paul coming, a man small of stature,
with a bald head and crooked legs, in a good state of body, with eyebrows
meeting and nose somewhat hooked, full of friendliness; for now he appeared
like a man, and now he had the face of an angel)." (Acts of Paul, 3 Acts
of Paul and Thecla)
여기에 묘사된 바울의 전체적인 모습은 미남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그의 얼굴이 천사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표현한 것도 그가 잘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은혜와 권능과 성령이 충만한 까닭”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와같이 천사의 얼굴을 소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바울행전에 또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군 네로(Nero)가 ‘바울을 목베어 죽이라’ 명하고 얼마 후에 파르테니우스(Parthenius)와 페레스(Pheres) 두 사람을 보내어 과연 그를 참수(斬首)하였는가 확인하라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이 와보니 아직 형이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죽음 문앞에 있던 바울은 이들을 보자 전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시오. 그 하나님이 나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것이요.” 그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들은 이제 네로에게 돌아가야 하오. 그러나, 당신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면 당신의 하나님을 믿겠소.” 그 자리에 롱구스(Longus)와 세스투스(Cestus)란 백부장도 있었는데 그들이 구원(救援)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일 아침에 내 무덤으로 가보시오. 거기서 디도(Titus)와 누가(Luke)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오. 그들이 당신들에게 주님 안에서 인(印)을 줄 것이요.”
그리고 얼굴을 들어 동편을 향한 다음 손을 들고 오랜동안 하늘을 향해 기도합니다. 형리가 그의 목을 벨 때, 그의 목에서 하얀 우유같은 것이 쏟아져나와 병사의 군복을 적십니다. 거기에 모인 자들이 기이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이 (영으로) 그날 오후 3시경에 네로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군사인 나 바울은 죽지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너 사악한 네로는 의인의 피를 불의하게 흘린 까닭에 얼마 있지않아 많은 해와 징계를 당할 것이니라” 말합니다. 네로는 이 말에 심히 두려워 떨며 옥에 있는 무고한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합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롱구스(Longus)와 세스투스(Cestus)는 전날 바울이 죽기 전에 그들에게 말한 대로 바울의 무덤을 찾습니다. 과연, 디도와 누가가 거기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보자 두려움으로 도망하고자 합니다. 롱구스와 세스투스는 디도와 누가에게 그들이 어떻게 여기왔는지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들에게 영생의 인에 대해서 묻습니다. 디도와 누가는 기쁨으로 그들에게 주님안에서 구원의 인을 베풉니다.
어떤 전승(傳乘)은 바울이 콜로새움에서 머리뿐 아니라 몸의 마디 마디 베이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살리신 주님을 증거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롱구스와 세스투스가 로마의 백부장들이었지만 바울의 죽은 다음에도 바울로 말미암아 구원함에 이릅니다.
2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Prison epistles)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의 에바브로디도의 방문을 받고 그의 편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빌립보는 바울에게는 참으로 각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에 “밤에 환상(幻像)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기록한 대로, 일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다니면서 더욱 견고케 하기를 원했던 바울은 성령의 계시로 유럽의 관문인 그리-스 중부 마게도냐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마게도냐 첫 번째 사역지가 바로 빌립보이고 이후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빌립보 지방에서의 복음사역은 바울이 자주(紫紬)장사 루디아를 만남으로 그의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 문제꺼리인 교회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또 모범적인 교회도 여럿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가 그렇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렇고,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그리스 반도 마게도냐에서 개척한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빌립보를 위시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등의 마게도냐 교회들은 21세기를 향한 현대교회들이 연구하고 추구해야할 모범적인 교회들입니다. 그들은 모으는 교회가 아니요 나누어주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극한 가난 가운데 있던 교회였지만 주위의 그들보다 못한 교회들이나 성도들이나 이웃들을 돕기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하여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바울의 자랑꺼리입니다.
바울이 가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자 했을 때, 비교적 여유가 있는 고린도 교인들은 발뺌을 하거나 늑장을 부리는데, 가난으로 여유가 없던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이 모금운동에 동참합니다. 사실, 바울은 그들의 형편이 안 좋은 줄 알았기에 그들에게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자기들도 이 일에 참여케 해달라고 당부했으며, 그들보다 1년 먼저 이 일을 추진해온 고린도 교회보다 일찍 마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들의 자선을 칭찬할 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自願)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한 돈을 전달해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몇 년을 예루살렘의 감옥에 유하다가 황제에게 재판받기 위해 로마로 옮겨져서 현재 가택연금 혹은 옥에 갇히는 상태에 있음을 이 빌립보교회가 듣고 그를 기도로서 돕고 또한 물질적으로 돕고자 에바브로디도편에 작은 정성을 담아 바울에게 보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얼마간 바울과 함께 머물다가 돌아갈 기한이 되었을 때, 바울은 그의 편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3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2절은 인사말인데 이를 통해 디모데가 그와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냥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언급이 없기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후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단수로 교회라 칭한 반면 갈라디아서에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복수로 사용했고, 빌레몬서에서는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표현합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바울은 교회를 모임의 장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단수로 칭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모임장소가 공공건물은 아니지만 어떤 한 개인의 가정이었던 것같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복수로 사용한 것은 갈라디아는 비교적 넓은 지역이라 한 곳에 모여 예배드릴 수 없으므로 몇 가정에 예배의 장소를 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나 예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교회란 명칭을 쓰지 않은 것은 이 지방에서는 정해진 장소가 없이 수시로 모임의 장소가 달랐던 까닭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도들이 가난하여 그렇게 비밀스럽게 모이기에 적당한 집조차 가진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교회란 명칭을 사용했건 안했건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인건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전도한 소아시아와 그리-스반도의 초대교회들은 가정교회였습니다. 말하자면, 요즘 교회에 속한 구역모임과 흡사한 것입니다. 이 구역모임을 중심으로 그들의 뜨거움이 싹텃고 구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용하고 비밀스럽지만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나와) 교제함을 인함이라.
바울에게 이 빌립보교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하면,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 마다 기쁨으로 간구드리는 대상입니다. 곧, 바울의 감사와 기쁨의 원인입니다.
이 빌립보교회에 바울이 그렇게 길지않은 날동안 머물렀지만 그들은 바울을 열심으로 도운 자들이요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또 실천하는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의 보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이나 머물렀고 또 바울에 뒤이어 아볼로라고 하는 훌륭한 설교자를 사역자로 가졌지만 변화가 없었던 반면에 이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떠난 다음에 변변한 사역자도 없었는데 그들의 믿음을 잘 유지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믿음에 진보를 보인 교회입니다.
이 어찌 바울의 감사와 기쁨과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목회자로서 어떤 성도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목회자에게 향응(饗應)을 잘 베풀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삶일 때 그렇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여럿이지만 특별히 빌립보교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할 것입니다.
5절에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이라” 했는데, “복음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원어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εἰς τὸ εὐαγγλέλιον)”은 직역하면 “복음 속으로(into the Gospel)"입니다.
성도들끼리 교제-서로 돌아보고 구제하고 교통하는 삶-하고 또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과 교제하는 삶이 ‘복음속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뜻입니다. 곧, 복음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이란 의미입니다.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서 “착한 일”이란 성도가 서로 돌아보고 불쌍한 자를 구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에 지금까지 살아오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빌립보교인들을 축복하셔서 이들이 현재 하고 있는 이 믿음의 착한 일들을 계속해가게 해달라는 기원(祈願)입니다.
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서 각별히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선한 일이 끝까지 계속될 것을 기원함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늘 바울과 기도 가운데 영으로 교통하고, 바울의 선교사업을 때로는 기도로 때로는 물질로 도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해온 것을 바울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에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사람을 보내어 호소한 일에 가장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교회인 까닭입니다.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8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로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ἐν σπλάγχνοις Χριστού Ἰησού)라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 가장 깊숙히에서 아무런 가식없이 울어나오는 진실된 애정으로’란 뜻입니다. 형식적인 표현으로서 ‘내가 너희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애정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을 뒤집어보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마음을 아시지’라 함으로 극한적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 가지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간구(懇求)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만하면 됐지!’ 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온전으로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도 3장 12벌이하에서 보는 바대로 “얻은 자도 아니요 이룬 자도 아니요 잡은 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라고 자신을 평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인들이 앞으로도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게 행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허물없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선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선하고 허물없는 삶’은 우리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반복하여 강조하듯이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믿음이 있는 자요 주님안에 거하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셋째는 빌립보 교인들이 의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의 삶에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도,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되어 허물없는 삶을 사는 것도 궁극적(窮極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르고 진실된 삶은 자기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자 함임을 빌립보 교인들과 이 편지를 대하는 우리로 깨달아 알기를 원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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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통하여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님들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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