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립보서 1:19-26)
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有益)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慾望)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豊盛)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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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역사학자(Church historian)는 현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危機)는 교인들의 생각 속에 내재된 “무교회주의적 성향”이라고 지적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만 교회에 매이기를 거부하는 “탈교회의 기류”가 성행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 주일날 교회에는 나가고 예배도 경건한 모습으로 드리지만, 그 이상은 교회와 교회의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만 아픕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을 그어놓고 주님을 믿기로 작정합니다.
교회는 다니되 기도는 하지 않기로, 교회는 다니되 성경은 읽지 않기로, 교회는 다니되 교회의 골치 아픈 일은 알지 않기로 정합니다.
이렇게 작정한 사람은 그가 의도한 대로 세상기준의 편안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가 그렇게 작정했기에 주님께서도 주님의 모습과 진리를 이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작정하십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까지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되고 나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함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희생이 없이 주님께 나의 사랑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가운데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재물은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남편이요 아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위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확실한 위안거리로 삼을 축복을 받기 위한 한 방편으로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는 이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그들이었지만, 성령을 받고 성령이 주장하시는 변화된 삶을 살기 전까지는 그들도 세상에서 더욱 확고한 지위를 얻고 더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태 10:37-38)
재물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출세도 주님 사랑함 다음에 놓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바울의 말씀이 마음 속에서부터 깨달아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개인성과 단체성 양면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의 결단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 1813-1855)는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한 개인이 홀로 서는 단독자의 결단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앞에는 항상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한 사람-주님의 길을 가고있는 사람에게 그 다음의 선택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의 선택들에는 주님께서 영(靈)으로써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못 끼면 나머지 단추도 바로 낄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 주님과의 관계가 잘못 설정되면 그 이후의 모든 관계가 바로 될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러한 사람은 교회를 찾되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게 되거나, 혹은 늘 갈급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 답답한 심정으로 교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재물을 비롯한 세상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 체, 주님을 사랑하는 체 합니까?
아니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의 주님 사랑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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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것이란 18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사건”입니다. 외모로서이건 참으로이건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간구하는 바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이리할 때, 이러한 그리스도의 전파로 바울이 기도 중에 소망하는 구원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니
바울이 늘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매여있으나 자유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증거하고자 힘씀은, 그가 바라는 것이 자신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후에 어떤 세계가 전개될 것인지 그가 믿음의 눈으로 밝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쉐익스피어(Shakespeare)의 햄릿(Hamlet)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고 독백하였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문제꺼리일 것입니다.
햄릿에게 삶은 고통과 번민의 연속입니다. 죽음을 생각해보나 알 수 없는 죽음의 세계가 그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세상사람들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고통이요 번민의 대상이 되지만, 그러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불확실의 세계보다는 늙고 병들어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이 세상의 삶을 택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원망하며 저주하며 죽어가는 사람일지라도, “자, 이제 평안히 눈을 감으십시오” 하는 말을 들으면 더 큰 화를 발합니다. 인간이란 그만큼 불확실의 저 세상에 대한 형언할 길 없는 두려움이 있고 저주스런 세상이라도 이 세상에 있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 주님을 선택한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눈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독백 대신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게는 문제가 아니로다” 하는 담대함이 있게 됩니다. 이는 자포자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할 때, 나의 죄된 욕망과 두려움과 불확실한 마음은 이미 죽었습니다. 오직 내가 지금도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덤으로 사는 것이며 내가 평신도로 살든지 목회자로서 살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증거하기 위한 목적만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To me to live is Christ)”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여전히 사시는 첫 번째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자녀입니까?
그보다, 주님이 우리 삶의 첫 번째 의미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나 자녀의 일 때문에 주님께 바치기로 작정한 시간이나 우리의 마음 중심을 떼어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신앙고백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함은 죽음이 고통의 삶으로부터의 도피처이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바라본 죽음은, 그리스도의 영-곧, 성령과 같이 하여 이미 충만해진 삶이 더 충만해지는 출구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죽음이후의 세계는 어둠과 불확실의 세계가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과 존귀의 세계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나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주님께 유익한 삶이라고 하면, 죽음 이후의 삶-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은 내게 유익함이 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할 필요도, 환난을 인내할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눈으로 낙원에서의 평안하고 즐거운 삶을 밝히 바라보십니까?
22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바울에게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사는 이 세상도 즐겁고,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죽음이후의 삶도 즐겁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이후에 생명강가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더 유익합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이 세상에 거할 것인가, 아니면 저 세상에 거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를 놓고 고민함니다. 그의 고민은 불안함과 번민에서 나오는 고민이 아니라 행복한 고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죽음이후의 세계를 원하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전도의 열매를 맺는 일도 매우 유익하고 보람있는 일이기에 무엇을 선택하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21-22절을 번역할 때,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기회를 의미하나, 죽는 것이 더 나으니라. 그러나, 사는 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더 많은 기회를 내게 주는 것이라면,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23-24절: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니라.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한 대로 바울 자신을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유익하고 좋을 것이지만, 잠시 더 육신으로 거하는 이 세상의 삶이 그를 바라봄으로 위로와 힘을 얻는 빌립보 교인들과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25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주님께서 그를 당장 데려가지 않으시고 얼마동안 더 살아있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進步)와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심으로 인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임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진보”에서 진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코페-이(προκοπή)인데, 이의 원 뜻은 “앞에 놓인 것을 자르다, 베다”는 뜻입니다. 즉, 개척자가 삼림을 개간하거나 헤치고 나아가기 위하여 ‘앞에 놓인 나뭇가지나 잎을 자르고 나가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이 그저 바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으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놓여있는 역경과 고통을 헤치고 나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해서, 이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기쁘고 그들에게 믿음의 씨를 뿌린 자로서의 보람을 얻게 됩니다.
26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豊盛)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은 옥에 갇혀있는 상태이나, 주님의 은혜로 바울이 다시 놓임을 얻게 되고 빌립보 성도들을 방문하여 같이 있을 기회를 갖게 될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자랑이 넘쳐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 안에서의 자랑(καύχημα)”은 주님 안에서의 기쁨(joy)이요 주님 안에서의 영광(glory)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다시 볼 수 있게 됨으로 주님께 풍성한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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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 보면 그 앞에 어려운 일이 놓일 때가 있습니다. 해서, 사는 것도 싫고 죽는 것도 두려워서 마지못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와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온전히 주님을 선택하셨습니까?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한 그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있는 사람이라도, 생명이 있을 동안에,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주님께 유익이 되고 또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열매맺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