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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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류의 이야기가 동서양에 각각 전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는 중 일연의 삼국유사 제2권에 나오는 신라 48대왕 경문왕의 고사(古事)인데, 그(응렴)가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나귀의 귀처럼 길어졌습니다. 왕후와 궁인들은 그의 비밀을 모르는데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으나 평생에 이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가 다가오자 그는 도림사(道林寺: 경북 월성군에 있던 절)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향하여 외칩니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 그리고 이 사람은 죽었는데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소리가 납니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 경문왕은 그 소리가 싫어서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대신에 산수유 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거기에서는 이제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라는 소리만 났다고 합니다.
서양 판에서는 복두장 대신에 이발사가 등장합니다. 당나귀 귀와 같이 긴 귀를 가진 어느 임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감출 수가 있었는데 그의 머리를 잘라주는 이발사에게는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에게 겁주며 다짐을 받되 “만약에 이 사실을 발설하면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임금의 비밀을 알게 된 이발사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이러다가는 얼마 못 가서 죽을 것같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시원스럽게 소리나 지르고 죽어야지’ 하고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숲을 향하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냅다 소리지릅니다. 그랬더니 속이 후련하여지고 시름시름 앓던 병도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바람이 불 때 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메아리쳐서 들렸습니다.
동서양에 전래되어온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합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에게 들은 말이나 나만 알게 된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속내를 친한 사람에게 믿고 드러내는데 그것이 그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너만 알고 있어’ 하고 전한 얘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과 귀를 거쳐서는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의 귀에까지 돌아오매 이 사람은 그가 처음 이야기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실망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만의 약점이 아닐진데 그 사람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비밀스런 이야기가 다시 자기 귀에 돌아올 때,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넓은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사람들을 대함에 서툰 점이 많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끔 저에게 “목사님, 제가 교회 생활을 잘 모릅니다. 지적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목회 초년시절에는 그것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 줄 모르고 그 사람의 고칠 부분을 발견하면 제 딴에는 그를 생각하여서 지적하여 줍니다. “OO 교우님, 교회에서는 (혹은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 십중 팔 구는 그 다음에 관계가 소원하여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싫은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이 처음에는 야속하고 섭섭하였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의 약점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약점이 없다고 딱잡아 얘기하지 못할 것은, 그러는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없는 다른 모양의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협력하여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함께 이루어나갈 사람들인데 때로는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고 마음을 닫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은 바로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의 약점만 바라봄이요, 상대방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며, 아니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자 입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며 입을 벌리지 않고 귀를 막고 마음을 좁게 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마음을 넓힌 것과 같이 그들도 마음을 넓힐 것’을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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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대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 지방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고(2-3절),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4절). 후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8절).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과 정성으로 가르치다가 기한이 차매 떠났습니다.
바울은 떠난 후에도 늘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적어도) 두 차례의 편지(고린도전서와 알려지지 않은 다른 편지, 고후 2:9)와 두 차례의 방문으로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권면하고 해결하는 일을 돕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무슨 유익을 얻고자 이리 했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가 깊어가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져갑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떠난 후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부추겨서 바울과 그들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은 오직 바른 말씀 전파함과 사랑과 권면인데, 거짓교사들의 이간으로 이것이 지나친 간섭과 잘못된 교리의 전달로 오해되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들 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목회자와 가까이 지내는 교인일수록 종종 후에 목회자에게서 더 멀어지고 목회자를 비방하는데 앞장 설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만큼 목회자의 약한 모습들이 잘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이분은 교회를 처음 출석하거나 아직 직분을 맡지 않은 교인들하고는 참으로 관계가 좋습니다. 그분들은 이 목사님을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목회자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집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면서는 점점 사이가 벌어지는데,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회의를 통하여서 그 목사님의 인간적인 약점들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설교와 심방만 가지고는 가장 훌륭하였던 목회자가 회의를 통하여서 목사의 자질과 부르심까지 의심받는 지경으로 전락을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지나친 치우침이 문제입니다. 그분에게 (인간의 약점이 없다는) 지나친 기대를 갖지 않았었다면, 그분에게 (인간의 약점이 많다는) 지나친 실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시되 완전한 사람들 중에서 부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니, 종종 말씀드리지만, 오히려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르셨습니다(고전 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calling)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드로나 안드레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마태 등과 같이 어부나 세리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학문이 있었고 배경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약점이 없었습니까?
눈병으로 눈꼽이 끼고 몰골이 형편없습니다. 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 말에 능하지 못하였습니다(고후 10:10). 그런가 하면 성격이 지나치게 직선적(直線的)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갈 2:11-14).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람이 없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함이 지나치게 올곧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한 주위에 적들이 많았습니다.
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닫은 것은 이와 같은 주위의 반대자들에 의한 농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할 때,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며, 예루살렘 공회로부터 파송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참 선생도 아니고, 그가 가르친 교리는 정통교리가 아니라고 비난합니다. 그 위에 그가 교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요 주제 넘는 일이라고 부추깁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마음을 좁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바울은 먼저 입을 열어 너희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화하기를 원하고 너희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12절에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악화는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십 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을 알고 지낸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딴 사람이 되는 예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장점들과 단점들이 그 사람 가운데 있었는데, 사이가 좋을 때는 그 단점들이 눈에 띄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난 A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 사람 참 몹쓸 사람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만 B의 오해일 따름입니다. A는 원래부터 그런 약점을 그 가운데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다만 어떤 일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문제는 상대방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됩니다.
몇 년의 오랜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한 남녀가 어이없게도 3개월도 채 살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어떻게 몇 년동안 매일 만나면서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몇 개월도 같이 살지 못합니까? 연애기간동안 같이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약점들이 노출되어 있는데도 보지 못하다가 결혼을 하여 같이 살매 약점들이 하나 둘 빠른 속도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목적을 위하여 약점을 일부러 숨기고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약점이 널려 있는데도 보지 않다가 상대방의 약점이 나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매 그것에 대하여 새삼 분개하고 따라서 그 사람을 욕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바로 나의 잘못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알면 가까이 지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가까이 지낸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런 사람인 줄 알고도 가까이 지냈다면, 설령 내가 불이익을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약점을 용납하는 넓은 마음이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나의 옹졸함이 나의 잘못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까?
나에게 약점들이 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내가 그것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나를 속인 상대방을 세상법정에 송사하고 싶을 정도로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바울이 권면하는 바는 차라리 속아주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 귀를 막고 마음이 좁아져서 이를 거부함은, 바울이 전에는 교묘히 자신을 위장하여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가 이제 새삼 알게 되어서 마음이 좁아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됨됨이에 대하여 속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열두 사도들의 부르심과는 다르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고전 1:1; 고후 1:1) 자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의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이 참된 것을 그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고 함은 바울이 그들에게 오해거리를 주어서가 아니고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서 마음의 문을 닫은 탓으로 대화의 단절과 서먹함이 있게 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너희 심정에서(ἐν τοίς σπλάγχνοις ὑμών) 좁아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심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은 창자, 내장, 심장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영어에서 가까운 표현은 ‘거츠’(guts)입니다. 즉, 사람의 정제되어지지 않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연의 감정(one's inmost self or feelings)--사랑, 미움, 노여움 등--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깊은 곳 속마음으로부터 문을 좁혀 바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을 받고 바울을 향하여서 마음의 문을 닫은 것입니다.
13절에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이상으로 넓은 마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자녀의 변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호통을 치는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이미 자녀의 커다란 잘못을 용서하여 줍니다.
거짓교사들의 부추김으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심하고, 그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고린도 교인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섭섭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어린 자녀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함에 이와 같이 영적인 부모의 심정으로 넓은 마음으로 대하는데, 너희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나를 대하여달라고 권고합니다. 열린 대화는 한쪽만의 노력과 자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모두 마음을 넓히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녀에게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들을 것을 강요할 때, 자녀가 부모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말문을 열지 않을 때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주장을 일방통행적으로 전개할 때입니다.
목회자와 교인의 대화가 단절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나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라고 교인의 듣기를 강요할 때, 교인이 세상의 말로써 목회자를 코치(coach)하고자 할 때 목회자-교인의 대화가 단절됩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 마음을 넓힌 후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한 것 같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교인들 상호간에 마음을 넓히고 상대방과 대화하고 그들을 듣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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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목회자와 교인들, 교인들 상호간) 서로의 약점들을 모릅니까?
대개는 두세 번만 만나보면 상대방의 장점이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가 약점이 있는데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점이 나에게 불이익으로 작용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의 약점이 내게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치게 될 때 그 사람은 나에게 갑자기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때로는 그 상대방이 목사일 수 있고, 때로는 다른 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권고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방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의 입을 열고 마음을 넓힌 후에, 상대방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당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지고 대화가 재개될 것이며,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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