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2, 2014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죄(罪)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화목의 마음을 주셨는데, 사단이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이간시키고 불화케 하는 죄(罪)의 씨를 사람의 마음 밭에 심어놓았습니다.

사단의 간계(奸計)로 인간세상에 죄가 들어오매, 첫 번째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 들어갔습니다(창 3:8).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쫓기에 앞서서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불순종함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심어준 불의와 불화의 마음입니다. 그들은 의(義)와 화목(和睦)이신 하나님과 더 이상 함께 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의 강, 불화의 높은 담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은 ‘죄사함과 화목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이 가운데 화목제(和睦祭)는 특별히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소나 양이나 염소의 수컷이나 암컷을 드리되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레 3:1-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 앞에 흠없는 어린 양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고, 또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하여 드려지신 화목제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 바울은 화목제물로 드려지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2-1226)의 평화의 기도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 만연한 불화와 반목에 일조(一助)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우리는 화목제물로 십자가 상에 드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할 것이며 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와 분쟁, 미움과 시기 사이에서 ‘화목의 사도’로서 ‘화목케 하는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2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전에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의 사람을 바라봄이 외적 조건--육체대로였습니다.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학문이 있고, 세상에서 출세한 듯한 사람을 보면 그를 귀히 여기고 부러워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힘이 없고, 배운 것이 없고, 하층 인생을 사는 사람을 보면 업신여겼습니다.


한국 신문의 사회면에 소개된 기사입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의사와 선을 보고 결혼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 집에서는 딸이 명문대학 출신의 의사와 결혼함에 딴에는 신경을 써서 몇천 만원의 결혼예물과 1억원의 지참금을 줘서 보냅니다. 그러나, 막상 의사 신랑 당사자는 그것이 자기 가치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여겨서 결혼 초부터 여자를 구박하고 때립니다. “너와 너의 부모가 나를 뭘로 보고 겨우 이렇게 밖에 대접하지 않느냐!”고 날마다 아내를 들볶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바란 것은 집 한 채와 병원개업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조기 이혼으로 마감되었지만, 이것이 사람을 육체대로 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가치관이 변합니다. 그의 신분여하, 가진 것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귀히 여기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따라서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픈 마음이 들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그의 외적 조건만을 보았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학문이 없는 목수의 아들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을 밝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놀라운 구원의 비밀입니다.

바울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만 알았기에 그를 하나님을 만홀되이 일컫는 자라 하여 이단시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결박하여 옥에 가두는 일까지 서슴없이 감당하였습니다(행전 9:1-2, 13-14; 갈 1:23; 빌 3:6). 이러한 바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매 그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전에 유익(有益)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기게 되고, 전에 고상(高尙)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배설물(排泄物)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 3:7-8).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변화입니다.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여 주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어제까지 좌절하고, 슬퍼하고, 고통받고, 병든 나의 모습은 없어지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소망이 넘치며, 건강한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제 우리는 옛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변화하는 삶을 삽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삶은, 바울이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이미 말씀한 대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18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和睦)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의 현저한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불화의 담이 있었습니다.
담 저편은 빛이요 공의이신 하나님이 거하시고, 담 이편에는 어둠이요 불의인 인간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 담은 하나님이 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罪性)으로 말미암아 쌓여진 담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된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이 담을 허심입니다.
그 몸의 찢기심으로 담을 허셨습니다. 이에 인간들은 죄가 없이 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담력을 얻었습니다(히 10:19-20.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 자신을 아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허물을 고백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응답하십니다.
화목(和睦)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화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서먹서먹한 관계를 벗어버리고 다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희생양 되신 예수님께 돌리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의 복음(Gospel of Reconciliation)'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된 믿는 사람들은 나가서 아직 화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맡은 대사(大使)로써 이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하고만 화목을 이루시지 아니하시고 또한 인간의 죄로 인하여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세상에 속한 모든 피조물과도 화목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롬 8:19-21).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세계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20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원문을 더 정확히 번역하면,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라”(καταλλάγητε τῷ θεῷ, Be reconciled to God!)입니다. 수동적(受動的)인 표현입니다.
인간은 화목의 객체이지 주체가 아닙니다. 화목의 주체요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게 준비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여 막힌 담이 헐어지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 화목의 사역을 이루십니다.

화목의 사역은 수직적일뿐아니라 수평적으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인가 아닌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입증(立證)되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다고 하면서, 우리가 사는 한 사회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불화가 여전히 있다면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직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주위의 형제와 자매와 화목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예에서와 같이, 화목도 수직적으로, 수평적으로 같이 작용합니다.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 짐승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간의 죄가 죄를 알지도 못하는 짐승에게로 옮겨지고 인간의 이전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과거죄뿐아니라 현재죄와 미래죄도 온전히 흠 없고 티없는 어린 양되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시고 그로 ‘죄’를 삼으심으로써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먹보다도 더 검고 주홍빛보다도 더 붉은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를 눈같이, 양털같이 희고 의로운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교회의 사명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로 그와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화목의 복음’을 이웃에게 증거하는 일입니다. 미국 사회는 인종적으로, 성적으로, 빈부간에 불화가 많은 사회인데, 여기에서 교회는 ‘화목의 복음’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 안에서 먼저 화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마음 가운데 불화의 요소가 있을 때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화목을 경험할 때 이를 우리만 가질 것이 아니라 나가서 증거하는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기도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장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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