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9, 20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고후 6:14-7: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고후 6:14-7:1)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1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시조(時調)로써 불충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악을 도모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나는 비록 희고 깨끗한 몸이요 성결한 삶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짝하여 지내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종류, 비슷한 성격의 새들, 짐승들, 사람들끼리 모이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간신들과 짝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간신이 되고, 역적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역적모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살게 되면, 종종 믿지 않는 남편이(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갑니다. 남편이나 아내 중에 어느 한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이면 주일날 교회 가는 일에 있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그러다 보면 서로 타협하게 되고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위에 믿지 않는 친구들이 많다 보면 이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종종 크리스천의 삶과는 동떨어진 일들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믿음이 신실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孟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맹자의 집은 처음에는 공동묘지 근처였는데 어린 맹자는 종종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기에, 곡을 하거나 관을 묻는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아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이곳이 아이를 키울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서 이사를 갑니다.
이사를 간 곳이 시장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며 흥정하는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어머니는 그곳도 아이를 키울 곳이 못된다고 판단하여 다시 이사를 합니다.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서당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그 흉내를 내면서 놉니다. 비로소 맹자의 어머니는 마음이 놓이고 그곳에서 정착을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가난한 살림에 세 번을 이사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은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맹자가 웬만큼 장성하여 집을 떠나 타지방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가 어느날 돌아왔습니다. 이때 맹자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학문이 얼마나 진보하였나 묻습니다. “네 학문이 어느 정도 나아졌느냐?”
맹자는 대답합니다. “그대로입니다.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그만둘까 봅니다.”
그러자 맹자의 어머니는 칼로 짜고 있던 베를 끊어버립니다. 맹자는 영문을 몰라 떨면서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묻습니다.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네가 공부를 그만 두는 것은 내가 베를 끊는 것과 같다. 군자는 학문에 힘써 이름을 내고, 모르는 것은 물어 지식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지고 세상에 나가서는 위험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너는 지금 공부를 그만 두려고 하니, 앞으로는 심부름이나 하면서 생계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베를 짜서 생계를 꾸려 가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여자가 생업을 그만두거나 남자가 덕을 닦다가 타락하면 도둑이 되거나 남의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어머니 말씀에 충격을 받고 맹자는 분발하여 학문을 쉬지 않고 쌓았으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에 들어가고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됩니다.
이 고사를 단기지교(斷機之敎), 즉 베를 끊으면서 준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화하는 삶을 살고자 힘씀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온전을 이루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14-16절에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가나안 거민들과 어떠한 사귐도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7장 2절 이하에 보면, “... 그때에 너는 그들(=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기는커녕 인정이 없고 잔인하게까지 여겨집니다.
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악의 속성에 물들기 쉽다는 사실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장에는 이스라엘 중 어떤 자들이 이방 모압여자들과 음행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 이천 명을 염병으로 죽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하게 될 때 그들의 우상들--그들이 하나님보다 앞에 놓는 것들--을 아울러 섬기게 되고, 이러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중 방백들과 두목들을 포함하여 어떤 자들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에스라 9:3).
느헤미야도 유대인들이 이방사람들과 혼인할 때, 느헤미야 13장 25-27절에서,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다시는 이방 여인들과는 절대로 혼인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의 사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극명하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이방 족속들인 우리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의 사귐과 교제를 강조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믿는 사람들끼리의 혼인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잘 몰랐을 때 혹은 실수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사람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2절 이하에서 배우자와 그대로 살되 남편의, 아내의 구원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14절)고 권고합니다.
이 세상 인구의 80% 이상이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요,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들이 문화적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나 참 믿는 사람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일체의 접촉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접촉을 갖지 않으려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믿는 사람들만이 집단으로 수도원 생활을 하거나 신앙촌과 같은 촌락을 형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형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 살아야 할 것인데, 세상에 살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하여 그들의 삶의 모습대로 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Do not be mismatched)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이 이끄는 대로 세상에 속한 자의 사욕(私慾)을 탐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신명기 22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실 때,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와 나귀는 크기와 성격과 선호가 각각 다른 짐승으로 함께 보조를 맞추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습니다.
소와 나귀의 다름으로 밭 갈기가 더디 되는 일은 있어도 함께 망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멜 때에는 함께 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배우자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형제나 자매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자녀를 둔 사람도, 혹은 믿지 않는 친구를 둔 사람도 믿지 않는 배우자나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녀나 친구의 세상적인 주장이나 선호에 따라가는 삶을 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쉽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자와의 교제나 결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데 신약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에서 온전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품성이나 모습은 여전히 유혹에 약하고 세상적인 것에 빠져들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믿는 사람들에게 로마서 12장 2절에서 권면할 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로 대조시킵니다.
첫째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이신데 불법을 범하는 자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긴 바 된 사람이 돌이켜서 불법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불법이 무엇입니까?
살인이나 강도나 도적질이나 간음만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 하나님의 명령과 뜻대로 살지 않음이 죄요 불법입니다.

둘째로,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14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온 자들인데 아직도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모할 일이 없습니다.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바울이 말씀한 대로 먼저 이 음성을 듣고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나온 사람으로서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15절)라고 했습니다.
벨리알(Βελιάρ; לעילב)은 구약(舊約)에서는 “쓸모없는 자”(worthlessness, uselessness), “비류”, “멸망”(ruin, destruction), "불의“(wickedness)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삼상 25:25; 삼하 16:7, 20:1, 22:5; 왕상 21:13; 시편 18:5; 잠언 16:27).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the War Scroll, the Thanksgiving Hymns, the Community Rule, the Damascus Document 등)에서는 ‘어둠의 자식들’과 ‘벨리알의 자식들’이란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즉, 여기에서 벨리알은 ‘사단,’ ‘악이나 어둠의 세력’이란 뜻입니다.
신약(新約)에서는 이곳에만 나오는데 ‘사단’ 혹은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혹은 사단이 조화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과 사단의 권세 가운데 놓인 사람이 조화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넷째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15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고 그가 바라보는 것은 위에 것인데, 믿지 않는 자의 관심은 세상 나라와 세상에 속한 부와 지위와 명성이고 그가 바라보는 것은 땅에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16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에 두어야 할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아스돗 사람의 우상 다곤의 당에 두었을 때 다곤의 상이 무너져 내려버리고 사람들에게는 독종의 재앙이 임합니다(삼상 5장).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여기에 제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카비 형제들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하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맨 먼저 하신 일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그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일입니다.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나무라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3:16-17, 6:19).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믿는 사람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을 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결한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에 두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16절에 인용한,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레위기 26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2장 38절에서 다시 약속을 주십니다. 지금은 패역한 유다백성들이고 그로 인하여 바벨론 왕에게 붙인 바 될 것이지만 70년 후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 27절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17-18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52장 11절에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정결케 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에스겔 20:34, 41 참조).
또 이사야서 43장 6절에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출 4:22; 삼하 7:8, 14; 렘 31:9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그의 백성이 아닌 자,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들과 함께 거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요, 하나님은 정하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부정한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그를 본받아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권면합니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17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16절).
셋째로,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됩니다(16절). 우리의 하나님이시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리라(18절)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요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으로써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당부합니다.

3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도, 직장에도, 사회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상의 악이나 불의를 도모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속하여 있어야 합니까?
불법에 속할 것이 아니라 의에 속할 것이요, 어두움 가운데 누워있는 자가 아니요 빛 가운데 거하며 빛을 발하는 자들이어야 할 것이요, 벨리알--사단에게 속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할 것이요, 우상(偶像)의 일을 꾀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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