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고후 5:11-15)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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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mania, μανία: madness, insanity)’란 단어가 있습니다. ‘정도가 지나쳐서 광적인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을 가리킬 때는 ‘마니악(maniac)'이라고 합니다.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라고 하면 서적광(書籍狂)이고, 클랩토마니아(kleptomania)라고 하면 병적인 도벽 증세입니다. 끝에 ‘마니아’를 붙여서 여러 가지 말을 만들 수 있는데, 베이스볼마니아(baseball mania)라고 하면 야구광, 골프마니아(golf mania)라고 하면 골프광, 댄스마니아(dance mania)라고 하면 댄스광, 비디오마니아(video mania)라고 하면 비디오광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몰두하는 인터넷광들(internet maniacs)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인터넷 사이트를 보는데 소비한다고 합니다.
4-5세기의 교부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는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10년 가까이 (376-386) 페르시아의 영지주의 이단인 마니파(Manichaeism) 신도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 어머니 모니카의 소망대로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십년의 세월동안 마니(Mani, 216-276)의 제자로서 잘못된(미친) 교리에 빠져 미친짓거리(mania)한 것에 심한 분함을 느끼고 마니파를 반박하는 많은 글들을 저술하였습니다. 물론 ‘마니아(μανία)’란 헬라어는 마니(Mani)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마니가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던 단어입니다.
어떤 ‘마니아’들은 삶에 별로 도움이 안 될뿐더러 무익하고 때로는 해롭고 사람을 망치기도 합니다. 비생산적이고 불건전한 일에 지나치게, 병적으로 몰두할 때 이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자들이 학문에 열중할 때 이는 학문에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밥먹는 것도 잊고 연구에 몰두할 때 이는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에디슨이 밥먹는 것도--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모르며--잊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국민학교에서는 ‘지진아’란 소리를 듣던 그였지만 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니아’란 소리를 들어도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마니악(Jesus maniac)’입니다. 즉,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학문에 미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책에 매달려야 하고, 골프광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매일 온종일 필드(field)에 나가 살아야 하고 밥상 위에 놓여진 삶은 달걀이 골프공으로 보이고, 젓가락도 골프채로 보이고, 꿈에서도 그린(green)에서 스윙을 하여야 할 것이지만, ‘예수에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마음의 십분의 일만 내면 충분합니다. 하루에 두-세시간만 매일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할애한다면 아마도 주위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위해서 시간과 재물과 마음을 내는 사람이 드물고, 이 일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소득이 없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익이 생기지 않는 일에 두-세 시간을 내는 사람이 드물기에, 만일 이런 일을 한다면 ‘예수에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직장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평소에 하던 일을 그만둘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시간과 마음의 십분의 일만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매우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마니악(Jesus maniac)--'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입으로는 ‘나는 크리스천--그리스도에 속하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마음 속에서 예수님보다 아직도 세상 것을 몇십 배, 몇백 배 더 사랑하고, 더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 영원한 나라에 상급을 쌓는 지름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마니악(maniac)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왕에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면 그리하여서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는 재미를 맛보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상에 속한 썩어지고 잠시 후면 없어질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시간의 십일조를 가지고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고, 그 특별한 맛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말씀 읽는 것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게 느껴지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나 사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신명나게 여겨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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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에게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장차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날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행위의 심판’으로, 믿는 사람은 ‘상급의 심판’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신약 외경서(Apocrypha)인 바울계시록(Apocalypse of Paul, 12장)에 보면 천사가 바울에게 이르되, “(사람이 죽으면) 의인이나 죄인이나 동일한 길을 지나서 하나님 앞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거룩한 분이 그들을 도울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두렵지 않습니다(The way whereby all pass unto God is one, but the righteous having an holy helper are not troubled when they go to appear in the presence of God)."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울 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하여야 합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이 우리를 행위로 심판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떨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 더 영광돌려드릴지 모름에서 오는 두렵고 떨림이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그의 기쁨이 되는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할 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주님을 증거함이 하나님 앞에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이는 믿는 자의 사모할 것이요 또한 힘써 행하여 바랄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는 반드시 동기(動機)가 있는데 그것이 세상적인 것일 때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고 상급이 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 일을 하는 것이라도 사람에게 높임을 받기 위한 것이요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 함은 하나님은 장차 우리를 판단하실 분인 것을 마음 속 양심으로부터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하나님이 계시지만 심판하지 않으실 분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불의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마음속으로부터 인정치 않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혜있는 자인양 우준한 삶을 살아간 까닭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의 양심이 진리로부터 가리워져서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의 날까지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12절에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장 1절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바울은 11절에서와 같이 말하는 것이 바울과 그 일행의 하는 일을 고린도 교인들이 인정해달라고 하는 의도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자랑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하고 충동질하는 거짓 선생들의 자랑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학문, 가문과 배경을 자랑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인정하고 파견한 지도자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열매맺는 삶을 살지 아니하며 오직 그들의 외적인 조건들만 자랑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중상하는 거짓선생들은 바울이 가르치고 증거한 복음의 내용은 엉터리요 잘못된 것인데 이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충동질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향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나 미쳤다. 나는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다. 너도 나처럼 미쳐봐라.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붙잡힌 바울은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압송되기에 앞서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분봉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갖습니다. 이때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변론하는 대신에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극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베스도 총독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전 26:24)고 말합니다. 이때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행전 26:25)고 대답합니다.
그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라도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요 온전한 말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미쳤다고 소리치고 손가락질하여도 분함이 없는 것은 이러할 때 하나님께는 오히려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봉석(권능)목사님은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하고, 신학생시절부터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녔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생각이 있는 사람의 정상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남들은 4년이면 졸업할 신학교를 7년이나 다니면서도 성적이 모자라고 학점이 미달이어서 졸업할 수가 없는데도 염려하지 않고 늘상 낙천적으로 “예수 천당”만 외치고 다니던 그는 예수광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시대에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앞가슴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쳤노라(I am crazy about Jesus)”란 글을 붙이고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웃고 손가락질하며 지나갑니다. 그의 등에 또다른 글이 붙어있는데 그것은, “그러면 당신은 무엇에 미쳐있습니까?(Then what are you crazy about?)”라고 하는 글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예수님께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사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지만, 세상에 속한 허망하고 없어질 것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 사는 그들이야말로 무익하고 없어져버릴 것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참되다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그는 지극히 온전한 사도요, 그의 증거가 그들에게 유익이 되고 그들을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세상과 이에 속한 것들에 탐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의 것을 사모하여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정신이 온전하고 바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으로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바울은 그가 지금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 그의 모든 학문과 출신성분을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고 감당하고 있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 일을 감당함이 (믿는)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랑이나 공명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바울이 바리새인이긴 하지만) 허세에서 그리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일을 함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몸 전체로, 내면 깊은 곳에서 시리도록 느껴지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이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되었는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건지시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의 효력--그의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을 살게 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다 미칠 수 있는데 이를 믿지 못하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죽은 자 가운데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효력을 믿고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는데,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죄와 허물의 덩어리인 그 옛사람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됩니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했고, 6장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죄와 허물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덩어리였던 옛사람은 오직 자기만을 위하고 이 세상의 것만 좇는 삶을 살았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순간에 그 옛사람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어서 땅밑에 누워 있는 사람을 향하여 아무리 큰소리로 욕을 하고 중상한다고 한들 그 사람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힘 안 들이고 떼돈을 버는 일이 있다고 아무리 설득하여도 무덤문을 열고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죽은 사람의 반응이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옛사람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지만, 이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산 자라고 했습니다. 산 자는 자신이 속하여 살아 있는 세계에 관심을 표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산 자이기에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의 일에만 관심을 나타냅니다.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죄된 세상의 죄와 허물과 욕심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고, 따라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욕심으로 살 것이 아니라 그를 심판의 형벌과 죽음에서 건지신 주님을 위해 사는 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바라보는 자는 여전히 세상 것에 연연해하며 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일진대, 자기만 그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감동적으로 신앙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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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린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은 삶에 별로 열정이 없고 의미 없고 낙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정신을 쏟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재물에, 학문에, 직장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향한 나의 열심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게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픈 마음을 빼앗아 가거나, 하나님을 위해 찬송하고 영광돌리는 시간조차 내지 못하게 한다면, 그러한 지나친 열심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탐욕의 마음일 뿐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미쳐 있습니까?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며, 주님을 찬송하기를 지극한 기쁨으로 여기며, 주님에 관하여 증거하지 않고는 입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 없습니까?
주님을 향하여 미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하여 미치되, 세상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거나 사람들로부터 공치사를 받기 위해서 미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의 것을 소망하기에 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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