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9, 2014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0)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0)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榮光)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無名)한 자 같으나 유명(有名)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
에티오피아(Ethiopia)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귀한 직분을 감당하시는 선교사님 부부의 선교편지를 받았습니다. 동부 아프리카를 강타한 가믐으로 극한적인 가믐을 겪게 되었는데, 에티오피아 내에 8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아사(餓死)의 직전까지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접한 에리트레아(Eritrea)와의 국경지대 영토 탈환을 위한 전쟁으로 수만 명의 군인들과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로 인해 에티오피아는 전국적으로 식량의 부족과 전쟁으로 인한 가족을 잃은 슬픔과 정신적인 피해, 경제적인 피폐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 증거에 열심있는 선교사님들은 비포장도로와 산악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미전도 부족들에게 들어가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오지(奧地)에 사는 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험악한 길을 달리다가 몇 번이나 넘어지고 게다가 말라리아까지 걸려서 한 달간 자리에 눕기도 하였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편하게 그냥 지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서 한 달에 한 번은 험한 길과 생명 보존이 불확실함에도 미전도 부족을 다녀와야지만 직성이 풀린다는 편지 구절이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직분을 감당하다 보면 때로는 자청하여서, 때로는 부득불, 때로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직분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감사함과 기쁨으로 그 일을 잘 감당하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이 직분을 감당함이 세상에서 이익을 구함이 아니요,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함도 아니요, 세상사람들의 인정함을 받고자 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소망을 둘 곳은 하늘나라이며 우리의 칭찬과 상급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2
1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실 때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직분 맡은 자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귀한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지만 다만 세상의 욕심으로 인하여서 복음의 열매 맺는 삶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2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救援)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2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 49장 8절을 인용하여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에게 맡기신 직책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자를 도우사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그 때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구원을 찾는 바로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우리에게 바로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선포할 때입니다.

3절: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 일이 훼방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증거하는 사람의 부끄럽고 합당하지 않은 생활 모습은 주위의 사람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됩니다.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4절: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라고 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천거(薦擧)하는 일에 대해서 바울은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며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천거서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역의 결과가 (그것이 어떠하든) 그의 추천서(또는 그의 사역에 관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1-2). 또한 직분을 감당하는 그의 삶의 모습이 자천서입니다(고후 4:2).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 했습니다. 6장에서 바울은 모든 어려움 가운데 많이 견디는 것과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덕목들이 하나님의 일군의 직분을 위한 자천서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through great endurance, ἐν ὑπομονῇ πολλῇ)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잘 견디어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함"(God's approval)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환난”(in afflictions, ἐν θλίψεσιν)은 여기서는 개인적인 탐욕스러움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로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만나는 내적·외적 어려움 혹은 압박을 뜻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며 나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궁핍”(in hardships, necessities, ἐν ἀνάγκαις)은 극도의 가난함 혹은 곤궁인데 여기서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에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곤궁한 상태입니다. 이왕에 피할 수 없는 궁핍일 때 이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이함이 좋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씀합니다.

곤난(in calamities, distresses, ἐν στενοχωρίας)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재난에 가까운 대처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배가 파선하고 맹수를 만나는 어려움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동족에게 복음 증거의 기회를 얻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소요와 붙잡힘과 갇힘, 그리고 로마로의 이송 과정 등도 이 ‘곤난’일 것입니다.

5절: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4절이 바울이 당한 어려움의 일반적, 추상적인 표현이라고 한다면, 5절의 어려움은 구체적인 것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바울은 그가 겪은 환난과 곤고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합니다.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기록합니다.

매맞음”(in beatings, ἐν πληγαίς)은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무수히 당한 것입니다. 때로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때로는 태장으로 맞습니다. 옷이 찢겨지고 때로는 까무러치고 죽기 직전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매맞음이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직분을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매를 맞고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진 고통 가운데 참 크리스천의 진가(眞價)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평안의 시대에는 참 크리스천들이 사이비(似而非) 크리스천들과 함께 섞여서 구분이 안 가다가 환난이 오매 확연하게 구분이 갑니다. 알곡과 쭉정이의 구분이요, 곡식과 가라지의 구분(마태 13:24-30)입니다.

갇힘”(in imprisonments, ἐν φυλακαίς)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하다가 이방인들에 의해서 갇힘을 당하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는 동족에 의해서 갇히게 되고 또한 가아사랴의 옥에 3년 가까이 갇혀 있다가 로마에 이송되고 로마에서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다가, 잠시 놓임을 얻지만, 다시 붙잡힐 때 마지막에는 지하감옥에 갇힘을 당합니다. 그러한 갇힘을 당한 바울이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찬송을 하며, 옥중에서도 여러 교회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권면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계속해갑니다.

요란한 것”(in tumults, ἐν ἀκαταστασίαις)은 바울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바울의 전도를 반대해서 일어났던 유대인들이나 기타 이방인들의 소요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바울이 복음증거하는 곳마다 일부러 찾아가서 괴롭혔습니다.

수고로움”(in labors, ἐν κόποις)은 복음 증거를 위한 것이 아니면 바울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입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때로는 육로로, 때로는 해상으로 찾아다니는 일들이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전개한 모금운동이며, 생계유지를 위해서 그가 직업으로 삼은 장막 깁는 일(tent-making)입니다.

자지 못함”(in watching, ἐν ἀγρυπνίαις)이 있습니다. 때로는 매맞음이 고통스러워서, 때로는 한 밤중에 행해지는 고문으로 인하여서 잘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먼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먹지 못함”(in hunger, ἐν νηστείαις)이 있습니다. 복음증거자로서 바울은 이 지방 저 지방을 여행합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바울의 전도여행 경비를 도왔지만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바울이 장막 깁는 일을 감당하였지만 그 일도 늘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지방에 이르렀을 때 때로는 며칠씩 굶는 일도 허다합니다.

6-7절에서는 어려움 가운데 이를 견디며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바른 길로 가게 해주는 덕목들(virtues)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6절: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깨끗함”(in purity, ἐν ἁγνότητι)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마음과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의를 지키는 태도입니다.

지식”(in knowledge, ἐν γνώσε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것을 항상 앎으로 고난 중에서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환난을 통하여서 함께 하시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가 이제까지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이 변하고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오래 참음”(in forbearance, long-suffering, ἐν μακροθυμίᾳ)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로서 우리로 하나님의 참 일꾼 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자비함”(in kindness, ἐν χρηστότητι) 또한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로서 하나님의 일꾼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힘써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자비는 사랑의 표현으로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돕는 일을 하게 합니다.

성령의 감화”(in the Holy Spirit,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의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이요 한결같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감화하시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엡 5:18).

거짓이 없는 사랑”(in genuine love, ἐν ἀγάπῃ ἀνυποκρίτῳ)은 겉모습만의 사랑이 아니란 뜻입니다. 남의 슬픔을 보면서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며, 남의 성공을 보면서 겉으로는 축하하지만 속으로는 시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 수 있을 때”(롬 12:15) 우리에게 거짓 없는 순전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우리를 오래 참게하고, 온유하게 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며, 무례히 행치 않게 하며, 악한 것을 구치 않게 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게 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합니다(고전 13:4-6).

7절: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진리의 말씀"(in truthful speech, ἐν λόγῳ ἀληθείας)이 우리의 공격무기가 됩니다(엡 6:17 참고). 세상에 속한 것이 거짓투성이라고 하더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는 거짓된 것과 타협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라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in the power of God, ἐν δυνάμει θεού) 머물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무식자요, 겁쟁이요, 이기주의적이었던 제자들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담대함과 권세를 갖게 된 것은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 까닭입니다(행전 1;8, 2:1-4).

의의 병기로(with the weapons of righteousness, διὰ τών ὅπλων)로 좌우하고”라고 함은 ‘성령의 검인 진리의 말씀을 들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믿는 성도들이 불의와 죄와는 결별을 고하고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8-10절에는 세상사람들의 눈에 비췬 크리스천의 모습과 하나님과 바른 성도의 눈에 크리스천의 모습을 대조하여 놓았습니다.
 
8절: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이 땅에서의 바른 성도의 욕된 것의 연속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욕된 것 같이 비춰질 때도 억울해하거나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범죄자중에 하나로 취급당하시고 강도들과 하께 십자가의 저주아래 놓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종국은 하나님의 영광나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판단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성도는 때로는 외골수요 비타협적이요 도무지 상종할 수 없는 존재들로까지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교인들에게 욕을 먹거나 악한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해서 분개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라고 함은 때로 크리스천이 증거하는 복음은 황당하게 들리며 속이는 말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은 세뇌(洗腦)이지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성경의 약속들을 체험하게 될 때 그 말씀이 참된 것임을 밝히 알게 됩니다.

9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진실 되게 소문내지 않고(오른손의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자기의 하는 일에 대하여 나팔을 불기에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당한 일들이 하나님께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되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는 그러한 무명한 성도가 유명한 자가 됩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이르매 하나님께서 기쁜 얼굴로 이름을 부르시며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교회에 핍박이 일 때 바른 믿음을 지키는 성도는 죽음 앞에 노출됩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 뿐이요 그의 영혼은 영원히 살림을 받을 것이며 몸도 아울러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바울이 그랬듯이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겉모양으로만 종교행위를 하는 참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자기 멋대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환난입니다. 그는 이로써 죽임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머물 곳도 없고,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하였습니다. 의식주(衣食住)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고, 또 가는 곳마다 핍박이 심하니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가 참으로 불쌍한 자요 근심이 많은 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3:1, 4:4; 살전 5:16)로 권면합니다.

바울이 가난한 자 같으나, 그는 복음의 풍성한 것을 나누어주어 많은 사람들을 부요케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진수(眞髓)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나라와 그 기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은혜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때는 내일이 아니라, 모래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우리의 할 일을 마친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힘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동안에 열심으로 감당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감당하되 우리의 탐욕과 자랑과 이기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군의 사역에 거리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욕됨이요, 악함이요, 속이는 자요, 참람한 자요, 무명한 자요, 죽은 자요, 징계를 당하는 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상사람들의 판단에 예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자로 비춰질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군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때로는 환난을 당하고, 때로는 궁핍을 당하고, 때로는 곤난을 당하고, 기타 다른 어려움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은 믿음과 신실한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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