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6-13)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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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에 존 엘리어트(John Eliot, 1604-1690)라는 유명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교인들에게 교회를 사임하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 이곳에 오래 계시면 우리 교회당도 웅장하게 짓고 목사관도 잘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극구 말렸습니다.
엘리어트 목사님은, “나의 사명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 곳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교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계 전도의 길을 떠납니다. 그는 80세가 되기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이 다하여 걸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흑인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읽어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제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동안 수십 년간 일하셨으니까 이제는 안 하셔도 됩니다. 좀 쉬세요.”
그러자, 엘리어트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몇 십 년간 일을 했다 해도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일세. 내가 비록 자리에 누웠으나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 힘은 아직 남아 있네. 그래서 그것을 지금 실행하는 것일세.”
그는 86세로 생을 마치는 때까지 자기의 달란트를 잘 경영하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뉴잉글랜드의 특별한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귀하게 사용됩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주님을 사랑하고 주인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잘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인데,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가 한 달란트인지, 두 달란트인지, 다섯 달란트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주신 것을 주인을 위해서 잘 충성되게 경영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기고,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누구에게 더 큰 칭찬이 있겠습니까?
능력이나 재능이상의 것을 남긴 한 달란트를 맡은 자일 것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달란트를 잘 경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경영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이래서 어떻고 저것은 저래서 어떻다고 핑계하는 사람은 많은 수확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자기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핑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거나 수확이 적더라도 핑계거리를 찾지 않는 사람에게 주인은 다음에 더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지시보다는 자기의 판단에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되어질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은 내 방법이나 법칙이 아니라 주인의 방법이나 법칙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인이 지시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주님은 주님의 방법에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서 지혜 있는 자를, 능한 자를, 문벌 좋은 자를 사용하고자 안 하십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이의를 달지 않는 대신에, 지혜 있는 자는 자기의 세상 지혜에, 능한 자는 자기의 세상 능력에, 문벌 좋은 자는 세상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계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일군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농부가 인내하지 아니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인내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을 온전히 간직할 수 없으며 소망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7-8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했고 또한 11절에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인내함으로 연단되어질 때 우리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데, 이 '소망'을 어떤 영어성경은 '하나님의 인정하심' (God's approva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시는 일군은 자원함과 열정과 항상 힘씀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권고합니다.

교회의 비교적 젊은 층으로서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되기 위하여서는 겸손과 순복함이 또한 필수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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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주를 의뢰하며 말씀에 의지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환상(幻想)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 중에 임재하심을 보고 또 스랍 천사들의 창화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5절에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사람들이 입술로--즉, 말로써 짓는 죄가 참으로 크고 많음을 알게 합니다. 입술을 조심할 수만 있다면, 입술이 정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짓는 죄 중에 70-80%는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입술로 불신앙의 말을 한다든지, 입술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든지, 입술로써 거짓 증거한다든지 함으로 얼마나 많은 죄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스랍 천사 하나를 보내셔서 그의 부정과 불의를 제하여 주십니다.
스랍 천사 하나가 화저로 (번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고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스랍(שׁרף)은 “불태우다, 불이 나다”란 동사의 뜻으로, 명사로는 “불태우는 자”란 뜻을 가집니다. 스랍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며(6:3) 하나님의 대변자들(6:6-7)로서 행동하였습니다.
스랍 천사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입술에 화저를 댄 것은 하나님이 그의 속죄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의 제사와 번제의 제사가 같이 드려지는데, 번제의 제사--즉,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결신의 제사는 죄와 허물의 회개와 사함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죄사함 받기 전까지는 온전한 헌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기 위하여 전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습니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여전히 부정한 입술로 부정한 죄를 저지르며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일군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적극성을 띠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이 아니요, 능력과 지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9-10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가 하나님께 “날 보내소서” 대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유다 백성에게로 보내시어 그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귀가 있어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 못함이요 눈이 있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교만과 불신앙이 그들의 영의 귀와 영의 눈을 막아 놓은 까닭입니다.
해서, 듣고 보는 것에 대하여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반어적(反語的)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의 귀와 영의 눈이 열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에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11-12절: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함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할 것인가’ 묻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선포할 것이지만 그 동족 유다를 사랑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이러한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리석음을 아시고 미리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는 예루살렘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유다가 황무하여질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좋으련만 세상 가운데 탐닉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그들이 붙잡고 있는 세상 신들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유다의 백성들 중 십분의 일이 의인으로 남아 있으면 좋을 것이나, 이 사람들도 환난과 곤고 중에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듯이 그렇게 베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베인 것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같이 유다의 거룩한 자들의 씨도 이와같이 남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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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군이요 구원받을 자이면 좋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어떠하든 남선교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또한 우리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믿음의 뿌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보존하는 그루터기 신앙인들이 되기를 원하며, 이 시대를 구원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치며,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는 남은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번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돌이켜 다시 흔들리거나 베임을 당하거나 끊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을 가로막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 겸손하게 헌신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참된 여성” (잠언 31:10-31)

                                          “하나님의 참된 여성” (잠언 31:10-31)


                                                                             1
잠언의 세 가지 큰 주제라고 한다면, 지혜와 부(富) 혹은 재물과 여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잠언 기자가 멀리 하라고 권고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첫째는 이방 계집, 악한 계집, 간교한 계집, 또는 음녀라고 표현한 음란한 여인입니다.
잠언 2장 16절에서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라고 했는데, 이런 여자를 피할 것은 이러한 사람은 2장 17-19절에 보는 바대로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음녀 또는 이방 계집에 대해서는 반복하여 경계하여 말씀하는데, 5장 3절에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고 했고, 5장 20절에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고 했고, 6장 24-26절에 “이것(=네 아비의 명령과 네 어미의 법)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고 했고, 7장 10, 21-22 (또 25)절에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고 했고, 또한 23장 27절에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미련한 여자입니다.
9장 12절에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도적질한 물’ ‘몰래 먹는 떡’이란 불륜한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 미련한 계집은 음란한 계집과 마찬가지로 불륜스러운 관계를 즐기는 자입니다.
요즘 한국에 성적 문란(紊亂)이 그 도를 더하여 가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십대와의 원조교제가 유행하더니, 최근에는 컴퓨터에서 채팅(chatting)을 하다가 만난 남녀들이 쉽게 관계를 갖는 것이 사회 문제이더니, 이제는 아예 결혼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배우자를 바꿔가며 성행위하는 실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한국 전체의 건전한 남녀들이나 부부의 숫자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음란과 불륜이 길거리의 여자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침투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미련한 여인에 관하여 잠언 기자는 12장 4절에서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미련한 여인, 욕을 끼치는 여인은 한 남자에게 “도울 배필”이 아니요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주는 “망하게 하는 배필”입니다.
여자는 원래 남자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인데”(창 2:23),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여인은 “나무를 갉아먹어 죽게 하는 벌레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14장 1절에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했습니다.
어진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란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아는 여인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의 역할 분담을 아는 여인이요, 남편을 어떻게 대하고 남편을 위하여 무엇을 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미련한 여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가정에서의 여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자에게 기대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여인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남자에게 유익을 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투는 여인입니다.
21장 9절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고,
21장 19절에서도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고, 또한 25장 21절에서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바가지를 적당히 긁는 것을 남자에 따라서는 매력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그러한 여인과는 살고 싶은 생각이 뚝 떨이질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의학적 조사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은 뇌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여성은 언어능력이 보통 남성보다 뛰어나며 말을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성은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언어능력이 떨어지며, 말을 하지 않고도 며칠씩 지낼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결론은 따라서 아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이해할 것이며, 남편이 말을 적게 하더라도 그것이 아내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거나 바가지를 긁는 것은 결코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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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여인, 미련한 여인과 다투는 여인이 잠언 기자가 피해야 될 여인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남편을 위하여 또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참된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하면, 유덕(有德)한 여인(11:16), 어진 여인(12:4), 지혜로운 여인(14:1) 그리고 오늘 본문의 현숙한 여인(31:10)입니다.

10절에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값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만 말하자면 그만큼 귀하다는 것입니다.
‘현숙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일(חיל)’은 ‘강하다’ ‘인내하다’ ‘확고하다’란 의미로 현숙한 여인은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현명하고 정숙한 여인’을 의미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또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인하기 때문에 힘든 일도 잘 감당합니다.

이 여인의 덕목이 여러 가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에게 믿음을 심어줍니다.
11절에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런 아내는 집안이 어려울 때 남편을 도와 함께 일을 하고 가정을 궁핍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남편에게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12절에 “그런 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가정의 살림을 돌아봄에도 부지런하고 때로는 가계의 경제를 위하여 힘든 일도 잘 감당합니다.
13-19절에서 현숙한 여인이 육체적 강인함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 밤이 새기 전에(=새벽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간품하여(=검사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손에 물을 묻히지 아니하고, 가정의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우아하고 고상한 여인의 전형인 줄 아는데, 성경은 부지런하고 가정의 안팎을 돌아보는 여인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구제의 손길을 펼쳐 궁핍한 자를 돌봐 줍니다.
20절에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했습니다.
구제가 모든 믿는 사람의 덕목인데, 이 여인은 부지런하고 사려가 깊기 때문에 자기 가족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밖으로 돌려서 궁핍한 자를 돌보기도 합니다.

다섯째는, 준비성이 철저하고 자신도 우아한 품위를 잘 지킵니다.
21-22절에 보는 바대로 모든 가족 식구들에게 홍색의 따뜻한 옷을 만들어 주었으므로 겨울이 다가와도 걱정이 없으며, 자신을 위하여서도 아름다운 방석을 짓고, 세마포와 자색의 고운 옷을 지어 입습니다.
이러한 여인을 싫어할 남성이 있겠습니까?

여섯째는, 남편을 잘 보필하여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위에 있는 자가 되게 합니다.
23절에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문에 앉는다”는 것은 재판하거나 덕망이 있는 지위에 오름을 의미합니다.
                                                   
일곱째는, 지혜를 베풀고 인애의 법을 말합니다.
가까이는 자녀들에게, 또한 멀리는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에게 지혜로 말하고, 그들을 다스릴 때 인애로 합니다.

여덟 번째는, 앞의 것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게을리 얻는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왜냐하면, 그는 집 안팎을 부지런함으로 돌보는 여인이기에 게으르지 아니하며 부지런하게 힘써 일한 것으로 양식을 삼습니다.

아홉 번째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에 따른 부차적인 것으로, 자녀들은 그에게 감사하며 남편은 그를 칭찬합니다.
28-29절에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열 번째는, 현숙한 여인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현숙한 여인의 가장 최고의 덕목은 그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30-31절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니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현숙한 여인에게와 또 우리 성도 모두에게 왜 중요합니까?
한 남편의 아내 된 여인 현숙하고, 부지런하고, 가정에서 지혜와 인애로 말하고 행하고, 남편에게 선으로 행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여호와를 경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고, 9장 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현숙한 여인과 남편의 관계는 또한 성도 전체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비유입니다.
이사야서 54장 5절에서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고 했고, 예레미야 3장 14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4-25절에서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권고합니다.

남편을 선대하며 남편을 잘 보필하는 여인은 그가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그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하나님께도 참되고 현숙한 여인이 될 것입니다.
                                                
                                                                            3
여선교회에 속한 회원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고, 생활력도 강하며, 집 안팎으로 부지런하며,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되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풍성하게 하며, 결혼한 회원들을 남편들을 선으로 대하고 잘 보필하며, 항상 자신의 고상함과 품위를 지키며, 자녀들이 있는 회원들은 자녀들을 대할 때 지혜와 인애로 대하여 항상 감사의 대상이 되며,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는데 으뜸이 되는 회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헌신하는 청년” (시편 110:3)

                                                         “헌신하는 청년” (시편 110:3)

       

                                                                           1
청년이 누구입니까?
교회 청년회의 회원입니까?
연령적으로는 40세 미만의 사람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명확히 하고 있지 않지만, 전도서 12장 1절 이하에서 보면, 아직 그에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하기 전, 아직 창조주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목소리와 기력이 있는 때를 말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청년은 육신의 나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적 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특성은 힘(strength)입니다.
잠언 20장 29절에서 잠언 기자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Strength)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기력(strength)이 있습니다.
청년의 또 다른 특성은 배우는 자세이요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든가 ‘나는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청년기를 넘긴 사람입니다.
청년에게는 크고 높은 이상(vision)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변화를 추구합니다. 요엘서 2장 28절(행전 2:17 참고)에서 “너희 젊은이는 이상(또는 환상: vision)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또 다른 특성은 순수함(purity)입니다.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이를 거부하고자 저항합니다. 청년 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에게 감격이 있으며 그의 순수한 믿음의 마음을 지키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때로는 정과 욕심에 따라 살다가 이로 인하여 고통 당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11장 9절에서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하여, 이 세상에서 정과 욕심을 좇는 삶의 결과가 심판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9장 16-22절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에 보면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관하여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 있게 그 모든 것을 그가 어릴 때부터 지켜왔다고 말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가’라고 의기양양하게 반문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태 19:2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 그 청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고, 관원이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부자이며 청년이며 관원임에도 하나님께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시편 110:3
새벽이슬은  요란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깊은 밤, 새벽이 되려는 시간에 조용하게 산천 초목 위에 촉촉이 내려 생명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슬은 생명과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곳 투산과 같이 한 낮에는 햇볕이 매우 뜨겁기 때문에 식물들에게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낮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새벽이슬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호세아서 14장 51절에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셔서 백합화같이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시고 백향목같이 우람하게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청년을 새벽이슬에 비유한 것은 그렇게 조용하고 촉촉하게 교회라고 하는 초목에 내려 교회에 생명을 주고, 교회가 성장하게 하고, 교회가 복음의 꽃을 피게 하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거룩한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새벽 이슬 같이 깨끗한 주의 청년들은 옛사람의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와 온갖 불의와 정욕으로부터 깨끗합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언어와 행실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9장 9-11절에서 시편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그 말씀을 따라 행실을 삼가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구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은 “(혼탁한)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롬 12:2) 할 것입니다.

주의 청년들은 “즐거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업에서 열심을 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 그 가운데 즐거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헌신이 아니며 하기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과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께 자기의 시간과 몸을 기쁨으로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시는 청년과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고 함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의 동참은 바울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그들을 동참케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들의 구제 또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믿는 사람의 이웃 사랑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내어주실 때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 같이, 우리들의 헌신은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 그의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해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헌신의 순서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헌신하실 때 신실함(faithfulness)으로 하신 것같이 우리의 헌신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헌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Sunday, March 25, 2012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에스겔 48:30-35)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에스겔 48:30-35)
       

                                                                          1
'China Soul for Christ Foundation'(그리스도를 위한 중국 영혼 재단)이란 단체에서 내놓은 “The Cross-Jesus in China"(십자가-중국에 계신 예수)란 제목의 영상물은 4부작인데, 1부는 ‘생명의 샘’(The Spring of Life), 2부는 피의 씨’(Seeds of Blood), 3부는 ‘쓴 잔’(The Bitter Cup)이고, 4부는 ‘가나안 찬송’(The Canaan Hymns)으로 샤오민(Xiao Min, 小敏)이라고 하는 중학교를 중퇴한 음악적 훈련이 없는 10대 소녀가 어떻게 천 곡에 가까운 아름다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China Soul이 3년에 걸쳐서 제작하였다는 이 영상물(映像物)은 1949년에 70만 명이던 중국의 기독교 인구가 현재 7천만 명 또는 1억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가정교회가 당한 핍박과 그 핍박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가정교회들이 부흥될 수 있었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영상물이 중국 지하교회들에서, 또한 한국과 미국 등에서 급속도로 보급되며 가정교회의 실상이 알려지자 중국 당국에서는 당황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북한에도 계시며 믿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억압된 가운데서도 자유하게 하시며 평안하게 하십니다.

엘리위젤(Eli Wiesel)의 자전적 작품 ‘밤’(Night)에서 그는 그가 어린 시절 나치 수용소에서 목격한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그 중에 한 어린아이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나는 그 어린아이의 죽음 가운데, 유대인들의 고통과 절규 가운데 함께 있노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도 그저 아득히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항상 거기 계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Jehovah is there)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저 저 멀리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기 가까이 계셔서 나의 슬픔과 고통을 보시고, 아시고, 그 중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21편 1절 이하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고 찬양합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도우시며 지키시기에 어떠한 환경도 그를 상케 하거나 해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래,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에녹과 동행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시고,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하셨는데, 그는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 엘-엘욘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16장 13절에 엘-로이 곧,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17장 1절에 엘-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청세기 21장 33절에 엘-올람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창세기 22장 14절에 여호와 이레 곧,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여호와이심”(출 3:14)을 알게 하시고,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출애굽기 15장 26절(또한 민수기 12:13; 시편 30:2)에 여호와-로페카, 너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요, 출애굽기 17장 6절에 여호와-닛시 곧 깃발, 승리되시는 하나님이요, 출애굽기 31장 13절에 여호와-므카디슈켐, 곧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 기드온에게는 그의 사자를 통하여서 그가 여호와-살롬 곧,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사사기 6:24), 다윗에게는 여호와-로이 곧 ‘나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보이시고(시편 23:1), 예레미야에게는 여호와-치드케누 곧, 우리의 의되시는 하나님을 보이셨습니다(예레미야 23: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의 택하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알게 하시는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를 바라보기를 원하고 그에게 간구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 또는 천사를 통하여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에는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 이다’(=I Am)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6:35, 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6:51),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고 하심으로 그의 ‘여호와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2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여 주시는데,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여호와-삼마의 하나님, 곧, 항상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은 남방왕국인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침략(侵略)당하고 유린(蹂躪)당하던 시대에 산 선지자였습니다. 북방왕국인 이스라엘은 이미 120-130년 전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여 이들에 의하여 피가 더럽혀집니다. 이들의 후손이 예수님 시대에 차별 당하던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주전 605년 바벨론의 1차 침입 때 선지자 다니엘은 이미 포로로 붙잡혀가고, 에스겔은 2차 침입 때인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586년에 유다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예속(隸屬)됩니다.

에스겔보다 먼저 끌려온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궁 가까이에 머물며 궁정선지자가 된 것에 비하여, 에스겔은 유대인들과 같이 거하면서 주전 593년에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이상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됩니다.
에스겔은 1-24장에서 아직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였는데, 40-48장에서는 성전이 재건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을 이상 중에 보고 예언합니다. 이 성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성전이 광야에 천막으로 존재하였는데 솔로몬 때에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불순종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무너져 내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서 떠났다고 했습니다.
칠십 년 뒤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조서가 선포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했을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하여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러나 이 스룹바벨 성전의 모양은 에스겔에게 보이신 에스겔 성전의 모양과 다릅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 스룹바벨 성전에 대체한 헤롯 성전이 지어지지만 이 헤롯 성전의 모양도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에 건설된 성전의 모양과 다릅니다.

에스겔서 43장 2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유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함으로 성전을 떠나셨던 여호와의 영광이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보는 성전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은 43장 7절에서 에스겔에게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성전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회복될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그 모양이 흡사한데, 차이는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은 도시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그 도시 안에 따로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1절을 보면, “그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생활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를 모든 곳에 나타내실 그러한 도성입니다.

에스겔서 본문 48장 3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회복될 성읍-새 예루살렘을 보이시고,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항상 거기 계시다’라는 뜻인데, 이는 유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신 것과 같이 아니하시고, 항상 그 성전에 거하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시고 도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늘뿐 아니라 음부에도 계시고, 육지와 바다 끝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 7-10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종말에 새 예루살렘-곧 새로운 낙원-이 우리에게 회복되기 전에, 자신의 몸이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메시야 오시기를 갈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시고, 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 속에서 ‘항상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 삼마의 주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과 약함과 유혹을 담당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우시고 격려하시기 위함이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 18절에서 “자기(=그리스도)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고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도우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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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많은 경우에 ‘여호와 삼마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성전인 우리의 몸’(고전 6:19)을 떠난 까닭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영으로 거하고 계신 ‘여호와 삼마의 주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항상 거기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고 간구드릴 때,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그의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복 수 있게 하십니다.

성도의 평안과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 몸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으로 환난 당함도 또한 은혜인 것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 우리가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자 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 때에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 도종환은 그의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들어있는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란 시에서 ‘거기 계시는 여호와-삼마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장미의 문을 지나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오월꽃들의 단내와 함께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이 가심덤불 속에서 피어나듯
고통과 형극의 길 위에서 당신은 아름답게 계십니다.
우리가 처음 당신을 만난 것은
절망의 골짜기를 헤매일 때였습니다.
어둠 건너편에서 당신은 환하게 계시었습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다 쓰러져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리 바로 위에서 함께 울고 계시는
당신의 눈물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고 바라처럼 떠돌다
어둔 숲에서 잠이 깨었을 때
아침 햇살과 함께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당신은 우리에게 걸어오시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손발이 묶이어 철창에 갇히고
가진 것을 모두 다 잃었을 때에도
당신은 그 음습한 감옥의 벽에 함께 와 계시었습니다.
이제 황량한 들을 건너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모이고
거친 들판의 모퉁잇돌 하나를 주워
그 위에 땀과 눈물로 당신의 집을 지을 때
당신은 여기 오시어
머릿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함께 벽돌을 쌓으십니다

당신의 집에 모여 올리는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들이
우렁차게 광야를 향해 떠날 때
그곳에도 항상 당신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가시덤불 속에서 오월 장미가 피면
장미의 단내를 딛고 당신은 항상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가실 것입니다.

‘항상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며 평안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February 26, 201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차든지 더웁든지” (계시록 3:14-22)

       
                                                                           1
사단이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은 강공책이 아닙니다.
들어보면, 가장 우리를 위하는 길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너무 힘들게 교회봉사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오히려 목사님한테 지적이나 당하지 않나요?”
“쉬엄쉬엄 하세요. 신앙도 좋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하잖아요?”
“남들보다 특별히 튈 필요 없어요. 남들 하는 만큼만 하세요. 그러면 족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오늘은 쉬고 내일 하세요.”
사단은 무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 신앙의 뜨거움을 식게 하고 미적지근하게 만듭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64㎞에 위치한 도시로서, 골로새 및 히에라볼리와 함께 비옥한 루커스 계곡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이 도시는 주전 3세기(BC 261-247년경)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2세가 건설한 도시로서,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백성의 정의)"로 명명했는데, 에베소 해안으로부터 아시아 내륙으로 뻗은 대로마 도로가 그 중앙을 지나가고 있어서 군사 및 무역과 통신의 요지인 동시에 검정 색 양모의 생산지로 당대 제일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일찍부터 은행제도가 생겨날 정도로 금융 자산이 대단하였고,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으며, 눈과 귀에 효험이 있다는 고약도 생산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가장 취약점은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인데, 약 10㎞ 떨어진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도 온천과 지하수에서 흘러나온 것이 뒤섞여서 항상 미지근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이단사교의 바람도 별로 없고, 핍박과 환난이 별로 없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터라 자연히 그 신앙도 나태해지고, 그 도시의 물의 미지근함만큼이나 미지근해지고, 잠자고 말았습니다.

                                                                               2
요한이 열거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빨리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와 현대의 교회들을 향하여서 세 가지로 권고하시는데, 첫 번째로,                                                    

14-16절에서는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고 하시고, 두 번째로 17-19절에서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실상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세 번째로 20-22절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님을 가르켜 "아멘이시요"하는 말은, 주님은 진실하시며, 참되시며,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아멘”은 또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9-2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②"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시는 일에,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시는 일에, 진리를 증거하시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요:44,요18:37,요1:18,요8:18)

요1:2-3에-"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인하여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 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다른 교회를 가만히 보면/ 처음에-적든 크든 다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만은 칭찬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책망입니다. 왜 책망만 들었을까?
우리 교회는 돈도 많다, 우리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리고 그 교만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히 했고, 그래서 결국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차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수크로스"라고 하는데,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즉,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는, 성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웁다"는 말은 헬라어로 "제스토스"라고 하는 데, 이것은 물이 펄펄 끓어오르듯이, 열렬한 신앙, 적극적인 신앙, 영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신앙, 열심으로 가득찬 신앙, 성령 충만한 신앙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딱 부러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안믿든가 해야 하는 데-이건 도대체 믿는 건지, 안 믿는건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인이고, 어떻게 보면 교인 아니고-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예수를 믿으려면 딱 뿌려지게 믿든가/ 아니면 아예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되든가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더웁지 못할 바에야 차라고 하십니다. 차라는 말씀은 차라리 등을 돌려버리라는 뜻입니다. 아주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상태가 차게 되는 것을 원해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에서 주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을 때에 하나님은 말라기서 1장 10절에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는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더웁지, 아니하면 차갑기를 원하셨는지 아십니까?
아예 처음부터 예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전도하기가 더 쉽습니다. 힘이 덜 듭니다. 그런데 어정쩡한 사람들/ 교회 몇 번 나왔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 옛날 교회 열심히 나왔다가 시험 들어 안 나오는 사람들/- 정말 속 썩이고, 애 먹입니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는 지리적으로 찬 생수가 나오는 골로새와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지역에서 흘러오는 물은 라오디게아에서 언제나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비유로 들면서 그들에게 차든지 더웁든지 확실하게 크리스천의 자아를 가지고 살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상태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까?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여기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은 결국 구원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결론적으로 주시는 말씀은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잘 하라는 말입니다.
이왕 예수 믿는 것-뜨겁게, 남이 보드래도 좀 믿는 것 같이 믿으라는 말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고대 국가였던 프리지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은행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안과(眼科)학과 직물 산업이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성공'과 '의료의 발달'과 '환경의 부유함'은 참된 영적인 상태를 가리웠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당시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그러니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별나시게 교회 다닐 필요가 없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②너무 평안해서 그랬습니다- 다른 교회처럼 황제예배의 박해도 없었습니다./ 에배소 교회처럼 니골라 당의 위험도 없었습니다./ 서머나교회와 같은 박해도 없었습니다./ 버가모교회처럼 발람의 교훈도 없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자칭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유혹으로 인한 괴로움도 없었습니다.
도전 받을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싸움을 할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순교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옥에 갇힐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사데교회처럼 이 교회도 신앙생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돈, 부요함과 평안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게을려집니다. 나태해 집니다.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도 그저 되는 대로/ 기도도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고/ 헌금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하여 '네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지적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영적인 실체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물질 세계를 보는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을 바라봅니다. 산과 바다 등이 어떻게 생겼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닫힌 사람은 물질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도 이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보려면 영적인 눈이,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열려집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영적인 눈이 닫혀진 사람은 신앙생활이 답답하고 힘듭니다. 긴가 민가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러진 사람은 신앙 생활이 확신 있고 활력이 넘치고 담대합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적인 눈의 뜨임 받음이 필요하고 영적인 귀가 열림이 필요하고, 영적인 풍요로움이 나타나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신앙의 모습을 바꿔갈 것이 아니라 불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금과 같이 단단한 신앙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거룩함의 옷을 입어 우리 옛 사람의 수치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이 모습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신다 (19절).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히 12:4-11).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회개하고 열심을 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결과를 약속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다는 것은 가장 흔한 일상 생활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의 회개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하나님께 열어드리는 것이며, 그리할 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열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은 주님의 주되심을 100%인정하고 순종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이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 있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강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문밖에서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스스로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러한 크리스천의 열심 있는 삶은 이 땅에서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가장 흔한 일까지 예수님과 나누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까지 함께 나누는 관계이다 (21절). 주님은 그 영광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열심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계 22:5).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은 헛된 가치들로 꾸며댄 위선을 벗어버리고, 깨어 있어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귀가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믿음이 미지근한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시며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들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 안에 영으로 거하시어 그들의 삶을 지켜보시며 변화되어지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 (민수기 21:4-9)

장대 위에 달린 놋뱀 (민수기 21:4-9)


                                                   1
고대로부터 뱀은 악령 또는 사단과 교통하므로 교활과 저주의 상징으로 뿐 아니라 치병(治病)과 예언(豫言), 축사(逐邪), 그리고 액운(厄運)을 막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해로운 동물을 쫓는 데는 보다 치명적인 독을 지닌 동물이 이용되는데, 이집트에서는 뱀 부적을 부치면 뱀을 쫓는다고 여겼습니다. 실제 그리스, 로마, 아랍, 미국 인디언, 아비폰(Abipones), 통가 등지에서는 뱀에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한다고 합니다.
아테네(Athen)에서는 갓난아이 이마에 뱀 부적을 붙여서 뱀 악마의 농간을 막는다고 합니다.

뱀이 치병의 능력이 있다고 믿은 증거로 미국 인디언들과 난디(nandi)에서는 의사가 들고 다니는 주머니를 뱀가죽으로 만들고 치병의 권능을 뱀으로부터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멜라네시아의 만스르(Mansren) 족에서는 뱀 제의가 있는데 여기서 뱀은 만병통치의 능력을 지닙니다.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어스 역시 뱀이고 셈족, 마다가스카르의 의신 역시 뱀이어서 의사는 늘 뱀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요한계시록에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는데 그 중에 버가모 지방은 그리스 신화의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인 뱀 형상을 한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있는 곳이라 버가모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폭이 20미터 길이가 800미터나 되는 웅장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 길가로 대리석 기둥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병원과 의과대학과 사제들이 있어 당시에 유명한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뱀이 껍질을 벗듯이 병자가 고통의 껍질을 벗고 치료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이 뱀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이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군의관의 뺏지는 지팡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앰뷸런스 차에 표시된 그림,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뱀은 원죄(原罪), 간교의 상징, 재탄생, 생명, 영생의 상징 등으로 분석된다고 합니다.
꿈에 뱀이 나타남을 태몽(胎夢)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뱀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관련하여 아기를 갖기를 원하는 불임 여성은 그의 신전을 찾아가고 거기서 꿈에 뱀을 보면 임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습니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再生)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불사(不死)재생(再生)영생(永生)의 상징으로 무덤의 수호신, 지신(地神), 죽은 이의 새로운 재생과 영생을 돕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2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애굽에서 나와 시내 산에서 일년 가까이 머물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들어갈 땅 가나안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으나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보고에 따르면, 가나안 거민들은 장대하여 그들이 감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정탐꾼들이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삶을 살게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에 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 대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가 당을 지어 모세에게 대항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시어 그들을 삼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사르는 불로, 때로는 염병(染病)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은 어리석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 땅을 지나 지름길로 가고자 에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그들은 가데스에서 호르산에 이르고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에돔 땅을 둘러 동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백성들의 불평이 드러나지기 시작합니다.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조그마한 고통은 잘 견디지 못하면서 과거의 어려움은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던 애굽 땅은 그들에게 풍요와 자유의 땅이 아니라 빈곤과 억압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신음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까닭에 모세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길을 우회한다고 하여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그들은 참으로 우매한 백성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었더니 왜 물에 빠져죽게 놔두지 건져내었느냐?” “보따리 내놓으라고 항의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함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생활할 때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싫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숨쉬는 공기에 대하여도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광야의 행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기는커녕 왜 이런 고생을 하게 하셨느냐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으로 따진다면 골백번도 멸망당해 마땅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가벼운 징계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의 불평이 하늘까지 치솟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십니다. 해서,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뱀들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무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러다간 살아남는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다급해진 백성 중에 얼마가 모세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한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물리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기 위하여 뱀들을 그들에게서 떠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약간은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백성들의 불평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적도 있지만,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백성들이 그들을 위하여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자 두 말 없이 하나님께 중보기도합니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저 치료하여 주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징계의 저주를 저주의 상징인 뱀을 통하여 치료하심입니다. 저주를 저주로 제하는 치료방법입니다.
뱀에게 물린 상처를 뱀살을 발라 치료하는 민간요법도 있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악성종기의 죽을 병에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병이 낫겠다고 선포하셨지만, 그 당시의 민간요법에 따라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종처(腫處)에 놓게도 하십니다(왕하 20:7).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놋으로 뱀을 만들고 장대 위에 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치의 틀림도 없습니다. 겧갭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궛 했습니다.
놋뱀을 쳐다봄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사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4)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4-15에서 모세의 놋뱀 사건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의 사건에서 장대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요,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사람들을 위하여 저주거리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저주에서 풀어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거리가 되신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3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까?
우리를 죽음의 저주, 율법의 저주, 사단의 저주에서 살리시기 위함이심입니다.
어떻게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놋뱀을 바라봄으로 죽음의 저주에서 구원받았던 것같이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믿음입니다.
생명이요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저주가 되시사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십니까?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해서 여전히 저주 아래 놓인 자의 삶이 아니라 축복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기쁜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