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9, 2012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네 가지 호칭들” (베드로전서 2:4-10)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네 가지 호칭들” (베드로전서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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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터키의 한 청년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다가 예수님을 그 마음에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당국에 들켜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심문하는 사람에게 청합니다.
“제게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질문인데?”
“일전에 제가 어디를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옆을 보니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두 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길을 물어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야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그런 줄 아시면서 당신은 왜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 누가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라고 했나?”
“이슬람에서 믿고 있는 마호메트는 죽은 사람이요 제가 믿으려고 애쓰는 예수님은 산 사람입니다. 어찌 죽은 마호메트를 의지하겠습니까?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이 뻔한 노릇인데 바른 인도자를 찾아가는 저를 왜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그러자, 그 취조관은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에 이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영광스런 지위와 호칭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크리스천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스러워진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옛날의 추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옛 습관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의 모습으로, 비방하는 자의 모습으로, 탐욕에 찬 모습으로, 땅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 바로 알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 여겨진 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바로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돌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신령하고 산 돌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하심과 흠 없으신 모습을 회복하고 그를 본받는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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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4절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산 돌(Living Stone)이라고 했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있지만 돌이 주는 이미지(image)는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표현할 때에 은유로 ‘반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우리를 지탱하시고 또 보호하시는데 든든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반석 또는 돌이라는 표현은 또 변함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산 돌(Living Stone)'이라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셔서, 교회의 기초석(基礎石)으로 교회를 떠받들어주고 계실 뿐 아니라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집을 일생을 거쳐 신령한 자료로 지어가고 있는 우리 각자의 믿음의 기초석, 반석으로 우리를 지탱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라”(Come to Christ, the Living Stone)고 했습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함은 첫 번째는 그를 통하여 구원 얻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5절에 기록된 대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신령한 건축자료인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쌓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은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신앙생활이 이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안내하는 천사가 그를 그의 집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그 집의 담에도, 벽에도, 또한 천장에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습니다. 해서, 천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천국에서 저의 집이 화려하고 견고할 줄 알았는데, 왜 여기 저기에 부실 공사한 것 같이 구멍이 나있는 것인가요?”
“아, 저것들 말인가요? 그것은 당신이 지상에서 살 때에 신령한 집을 지어나가는 일에 게을리한 날들이지요. 만일 당신이 매일 매일 단단하고 좋은 믿음의 자료를 사용하여 신령한 집을 지어나갔더라면, 구멍 뚫린 곳이 없이 말짱할 텐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몸부림칠 때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남은 삶에서만은 매일매일 믿음의 신령한 집을 지어나가겠다고 결단합니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 드리는 일은 제사장들만 감당하였는데,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가 제사장으로 우리의 제사를 직접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분되고 귀한 마음의 중심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죽은 짐승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제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음과 인격과 삶 전체로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는 대로, 신약백성의 신령한 제사는 삶으로 드리는 영적 제사입니다.
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신령한 집을 세우는 일은 같은 일로 우리의 구분되고 거룩한 일상의 생활입니다. 교회에서만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만 신령한 자재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6-8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6-8절은 이사야 28장 16절, 시편 118편 22절과 이사야 8장 14절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반석’이 구원(Salvation)이라고 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놓여 있습니다.
이 반석을 믿고 바라보는 자에게는 이 반석의 문이 열리고 구원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반석을 무시하고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아무도 이 반석에 나있는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요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님을 따라 신령한 산 돌이 되어야 합니다. 산 돌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매일 믿음의 신령한 집을 지어가고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9절에 열거된 네 가지의 명예로운 호칭들을 얻게 됩니다.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첫째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신 족속으로 삼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축복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얻은 자는 택하신 족속이 됩니다.

둘째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왕은 다스리는 권한만을 부여받고 제사 드리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사무엘과 약속한 일주일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으매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렸을 때 그는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드렸을 때, 사무엘은 사울을 향하여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삼상 13:13)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왕의 통치하는 권세와 아울러 제사장의 제사 드리는 모든 권한까지도 부여받았습니다.                                                   

셋째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다스리심이 미치는 영역입니다.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역사할 때 성도의 생활이 거룩한 나라요, 성도의 가정이 거룩한 나라요,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거룩한 나라요, 성도들로 구성된 사회가 거룩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넷째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방인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짐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 1장 10절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또한 호세아서 2장 23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모세를 통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이 영광스런 호칭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 보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所有)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祭司長),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내세우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축복의 약속은 이방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시는 영광스러운 호칭들을 계속 간직하기 위해서는,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基礎) 위에 신령한 집을 짓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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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반문하셨는데, 요즘 교회는 믿음을 너무 싸구려로,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1장 20-21절에 기록된 바울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옳도다 저희(=이스라엘)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이스라엘)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 하시리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자녀들이 매일 매일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나가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곧, 매일 매일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Sunday, February 12, 20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거룩한 산 제사” (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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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목숨을 걸지 않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환난과 역경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을 지녔던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못될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에 살던 성도들은 많은 숫자가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몰려 살았습니다. 로마정부의 눈을 피해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지하묘지에 숨어들어서 그곳에서 단체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로운 찬송의 노래도 아직 없었고 성경의 말씀도 아직 없었지만 예수님의 인간구원과 부활을 찬송하고 이를 증거함이 그들의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귀하고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의 좋은 가정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찬송하고 증거함이 귀한 삶인 까닭에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타콤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들을 봅니다. 최후의 만찬의 벽화가 있고 또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린 벽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오늘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소아시아 터어키의 갑바도기아라고 하는 곳에는 평지에 작은 언덕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각 언덕들에 굴이 파져 있습니다. 멀리 서 보면 언덕들이요 가까이 가보면 동굴들입니다. 어떤 동굴은 8층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주님께로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한 굴에 보통 2만명씩 해서, 많은 때에는 이 갑바도기아의 언덕 동굴들에 200만명까지 몰려 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 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정부의 박해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생활을 유지해가기 위하여 평지에 씨를 뿌리고 가꿉니다. 그러다가 로마정부에서 이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생활을 한다는 정보를 제공받고 군대를 보내면 밭을 가꾸던 사람들은 제빨리 양떼 속으로 몸을 굽히고 숨어듭니다. 그리하면, 멀리서 보기에 깜쪽같이 사람은 없고 양떼로만 보이게되어 그냥 돌아간 예가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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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으로 시작하여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통한 제사를 셋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1-2절). 둘째는, 우리의 변화로 인한 우리가 지체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변화입니다(3-13절).
셋째는, 교회의 변화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9-21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신 공자님의 가르침과도 일치가 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없이 교회가 변화되지 않고, 교회의 변화없이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가 받는 앞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8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말씀드렸듯이 9-11장은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한 장들이므로 괄호안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교리의 마지막 부분인 8:31-39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被造物)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큰 것을 알 때 우리의 결단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여전히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 안 사람입니까?

‘그러므로’는 또한 9-11장의 전체를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비밀의 경륜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전히 세상 가운데 세상과 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12장의 첫부분을 시작하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고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함은 나 바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는 뜻입니다.

"너희 몸"에서 몸(σώμα)은 우리의 바깥사람인 육체가 아닙니다. 이 몸은 우리의 자아와 인격--곧 전인체(全人體)를 의미합니다. 곧, 우리의 삶(life)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산 제사“(living sacrifice)라고 함은 우리의 전인격체로서 드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구분되고 귀한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첫 소산과 온전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구분되지 않고 불완전한 짐승으로 제사드렸을 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중심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직 외형의 제사만 드렸을 때, 하나님은 호세아 6: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때를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를 계속드려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때를 따라 제사의 종류별로 제물을 준비하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린 바 되어서 우리의 과거죄뿐아니라 현재죄와 미래죄까지 다 사하여 주신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회개하는 마음과 입술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죽은 짐승으로 드렸던 것이라면, 신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여,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마음으로, 인격과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첫째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당하여, 혼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평상의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영적예배입니다.

2절은 1절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영적 예배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1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2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3변화를 받아” 했습니다.
나의 사는 모습이 세상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내가 속한 교회는 변하지 않고 세사의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고, 내가 속한 교회가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강물을 따라 헤엄쳐 내려가는 다수의 물고기들과 구별되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흐르는 강물을 헤치고 올라가는 소수의 물고기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일에 관심을 갖고 살며 불확실한 하늘나라의 일에는 등한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되어지는 일은 좀 모르고 어리석어도 하늘나라의 일은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며, 둘째, 마음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며, 셋째, 해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주장(主張)과 의(義)와 만족(滿足)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해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인정해줄 때는 신이 나서 교회생활을 하고 믿음이 좋은 것 처럼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을 때는 믿음이 뚝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한 경배(敬拜)와 찬양(讚揚)의 제사는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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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꺼리가 됩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안있어 그의 비서실장이 그에게 말합니다: “각하, 이번 일요일 오전 10시에 첫 번째 각료회의가 있습니다. 의제는 국가 비상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른 개인적인 스케쥴을 마련하지 마십시오.”                                          
가필드대통령은 점잖게 대답합니다: “비서실장,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날에 어떤 분과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반문합니다: “아니 각하,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보다 더 중대한 약속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약속을 다른 날로 돌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매 주일 오전 10시 30분에 하나님을 만나뵈러 가는데,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각료회의는 다른 날로 옮겨졌고, 가필드 재임시에는 주일 날 다른 모임 스케쥴을 잡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시작은 작은 일을 지킴에서 비롯됩니다. 주일예배 참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더 크고 어려운 약속은 아주 쉽게 쉽게 어길 수 있고, 어기면서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휴가를 맞이하여 여행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도, 타지에서 교회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거룩한 산 제사, 영적예배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출발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의 과정에서 아름다운 작은 믿는 성도들의 미담(美談)들을 만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Saturday, February 4, 2012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19-29)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19-29)


1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어릴 때였습니다. 어느 해 여름 날 학교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더니 별안간 벼락이 떨어져 함께 가던 친구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너무나 놀라고 슬퍼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 순간이 아닌가? 육체는 한 조각의 종이 부스러기와 같지 않은가? 영원히 사라져 자취가 없으니 도대체 지상에 있는 명예가 무엇인가?”
커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후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만년에 루터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됨을 알고는 한참 명상에 잠겼다가 눈을 뜨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사망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저도 어릴 적에 가까이에서 죽음을 목격하였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진해(鎭海)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함께 길을 건너는데 해군트럭이 그 아이를 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머니도 쓰러지고 아이도 쓰러졌는데, 그 아이는 피바다를 이룬 상태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해군트럭은 아이를 치고 쏜살같이 어디로 뺑소니쳐버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거의 실성한 상태로 대성통곡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저도 그때 네다섯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엄습하였습니다.
“사람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에 유익한 것이 많이 있지만 공자님은 죽음의 문제에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더 더욱이 없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자로가 공자님에게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겠습니다”라고 할 때 공자님은 솔직하게 “아직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논어 선진편).
석 가모니도 생노병사의 문제와 윤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양하였지만 그가 얻은 답은 열반(涅槃, Nirvana)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은 존재의 정지--불꺼진 창과도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인데 수행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또한 죽음과 이 후의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답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첫째는 이 세상에서 축복 받기 위함이요 둘째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만일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기에, 죽음 후에 심판대에 서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의 죽음의 판정은 그 사람의 뇌가 활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활동을 중지하였는가와 그 사람의 심장이 박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박동을 멈추고 있는가로 결정합니다.
심장이 박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뇌의 활동이 중단되어 있으면 뇌사(腦死) 판정을 내리고 뇌가 활동을 정지한 상태에서 심장의 박동만 있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은 것을 또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과 죽은 자들은 의학적인 판단이거나 일반 사람들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를 말씀하고,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구상에 60억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중에 50억 이상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들이요 따라서 죽은 자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죽은 자들을 살게 하는 생명을 전하는 일이기에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감당할 일입니다.

2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과는 구분된 독자적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가 행하신 일을 사람들의 더 가까이에서 행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은 그는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보이시고 행하시기를 원하신 일이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부활의 하나님께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신 것 같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도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육체로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누구를 살리는가 하면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시기를 원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에게로 가까이 나아와 그를 바라보고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22-23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의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다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생을 사셨고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신 까닭입니다.
사람의 성품을 갖고 사셨기에 또한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거 죽어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교만하게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영생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영생을 얻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만큼 말씀에 관하여 무지한 까닭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다니는데 말씀은 듣지 않고 늘 자기의 생각대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하고는 무관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봐야 우리에게 영생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붙잡는 사람에게 이미 영생의 약속이 주어졌는데,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으십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서 예수님은 반복하여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서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된 상태이며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면”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면”은 “내 말을 믿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킴으로 죽음-하나님과의 분리를 영원을 보지 않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들이란 생명이 있는 것 같지만, 기실은 없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의 삶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듣는 자들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6-27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해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22절 말씀을 반복함입니다. 아들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심은 그의 인자(Son of Man) 됨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들 가운데 삶을 살아가셨기에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인자(人子)란 표현은 구약에도 나오는데 에스겔서에는 ‘사람의 아들’의 뜻으로 에스겔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호칭이요 다니엘서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5장 13-14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께 생명과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기한이 다 차고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임하실 때입니다.
그 때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릴 터인데,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함과 선함의 기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나아와 그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선한 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부활될 것인데, 선한 자 곧 믿는 자는 영원히 살기 위하여 부활할 것이며, 악한 자 곧 믿지 않던 자는 심판 영원한 죽음을 위하여 부활할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 가운데 놓이는 것입니다.

3
영생을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고백을 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그 사람에게 이미 영생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영생을 얻은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만 영생을 얻은 기쁨으로 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보리떡 이십 개의 기적" (열왕기하 4:42-44)

"보리떡 이십 개의 기적" (열왕기하 4:42-44)


1
사람들은 흔히 연령이나 사회적 통념으로 자기의 한계를 정합니다. ‘나는 70이 넘었으니까, 사회의 인식이 70이 넘은 사람은 노인이라고 하니까 나는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어.’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선교지에서 활동할 수 있고 없음은 하나님의 판단에 달린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활동할 기회를 주시면 80이 넘어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거두시면 30-40의 청장년의 나이에도 활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 세는 그 당시의 연령기준으로도 젊지 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120세를 살았는데 그의 나이에 3분의 2를 산 80세에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나이로 따지면 55-60세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매 120세에 이르기까지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한 교회를 은퇴하시고 1992년부터 러시아 선교사로 현재까지 활동하시고 계시는 김재광 목사님은 올해 84세가 되시는데 여전히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교회 밖 다른 분야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노년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사람들이 종종 눈에 뜁니다.
언젠가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84세의 노인이 마라톤 전구간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60이 되기 전까지는 골골하던 사람인데 의사와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고 동아마라톤에까지 출전하고 완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禪) 불교의 대가들 가운데도 대가인 차오추우는 60세의 나이로 선 불교에 입문하여 도를 쌓아갔습니다. 20년이 지난 80세에 마스터가 되었는데, 그 이후 40년을 더 활동하면서 선 불교에 한 획을 긋는 대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화가 중에 한 사람은 60세가 넘어 그림을 시작하였는데 미국의 화가들 중에 가장 유명한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miracle makers)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능력을 바라보고 믿을 때 보통사람인 우리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이 나타나집니다.
구약의 사건들은 많은 경우에 신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예표(豫表)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평강의 왕과 의의 왕 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건은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요 평강의 왕, 의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신약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사건의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 올라 번제로 드리는 사건은 장차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모리아의 한 산인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번제로 드리는 사건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사건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을 신약백성들이 힘입는 사건의 예표입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사건은 신약의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한 사건의 예표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은 성도들이 장차 영적 가나안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건의 예표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일으킨 사건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 사건, 마리아와 마르다의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일으키신 사건의 예표입니다.
엘 리사가 오늘 본문에서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을 먹이고 남긴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사건과 일곱 개의 떡과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사건의 예표입니다.

2
아벨므홀라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는 열두 겨리로 밭을 갈던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를 부르실 때에 그는 소를 버리고, 한 겨리 소를 취하여 잡아 그 고기를 백성에게 나눠주고 엘리야를 좇았습니다(왕상 19:16-21).
엘 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 끝까지 그를 따르며 “갑절의 영감”을 구하여 얻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계승하여 구국과 애족의 사역을 감당했던 선지자로 구약의 어느 선지자들보다도 신비한 기적을 많이 경험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자연적인 사역을 크게 나타낸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사가 행한 많은 이적들 중에 대표적인 것들로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너고(왕하 2:13-14); 불결한 물에 소금을 쳐서 좋은 음료를 만들었으며(왕하 2:20); 벧엘로 가는 길에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하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수풀 가운데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는 일이 일어나고(왕하 2:23-24);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모압 왕과 싸울 때, 물이 없어 고생하매 물을 내어 그 지경에 가득하게 하였으며(왕하 3:9-20); 선지자의 죽은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팔아 채무를 갚게 하고 남은 것으로 그와 두 아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였으며(왕하 4:1-7);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할 때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죽으매 다시 살리고(왕하 4:8-37); 우물물의 독을 제거하였고(왕하 4:38-41);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을 먹이고 남았으며(왕하 4:42-44; 비교: 마태 14:13-2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었고(왕하 5:1-14); 그의 종 게하시가 나아만의 재물을 탐하매 그의 몸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였으며(왕하 5:20-27); 그의 생도 중에 하나가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졌으나 물에 떨어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고(왕하 6:1-7);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 하여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그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고(왕하 6:17);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 하여 사마리아 성 중에 있음을 보게 하였으며(왕하 6:18-20);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납니다(왕하 13:2-21).
42절: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오늘 본문의 기적은 엘리사가 길갈(Gilgal)에 있을 때 행하여진 것입니다.
길갈 지방에 커다란 흉년이 먹을 것이 없던 때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본문의 앞서 38-41절에 나오는 사건인데 엘리사가 그 사황 게하시에게 그의 생도들을 국을 끓이라고 명할 때 그 안에 건더기가 없으므로 생도들 중에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野藤) 덩굴을 발견하고 거기에 달린 들 외(wild gourds)를 따다가 국에 넣어 끓인 후에 생도들에게 먹게 하는데 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서 엘리사는 어떤 가루를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솥에 넣었더니 독이 없어졌습니다.
그 사건이후 얼마가 지난 어느날 바알살리사(Baal-Shalishah)에 사는 한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곧 보리떡 이십과 채소 한 자루를 갖고 엘리사를 찾아와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함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가뭄이 극심하여 먹을 것을 얻기 어려웠던 시기라 이것은 감사할 일이지만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는 한 사람의 몇 끼 식량밖에 되지 않는 분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잠언 3장 9-10절에서 잠언기자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넘치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 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일조 드린 만큼 삶에서 부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축복을 선포하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엘리사를 찾아와 처음 익은 열매를 그에게 드린 사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고 믿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시골교회에서는 지금도 목회자에게 성미(誠米)를 갖다 드립니다. 목회자의 삶도 어렵지만 교인들의 삶도 어려운 가운데 쌀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드리는데 이것이 한국의 시골 교인들에게 있는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고 목회자를 선대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기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를 사환 게하시에게 명할 때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말합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생도의 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여서 이런 무리한 말을 한 것일까요?
그는 자기의 생도의 수가 백 명이나 되는지 알았지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과 약속을 믿고 바라본 것입니다.
빈들에서 그의 가르치심을 들으러 모인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어린아이가 자기 점심으로 준비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43절: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의 사환이 반문합니다: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사실 믿음이 별로 없던 게하시에게는 그의 주인의 명령이 터무니없이 들렸습니다. 어떻게 보리 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가 일백 명의 식량이 되겠습니까?
사람의 계산으로는 게하시의 반문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합리적인 계산과 사고가 하나님께는 불신앙이 될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계산이 하나님의 약속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생각과 계산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반응도 비슷하였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어떻게 이것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까?’라고 하는 불신앙과 불평의 목소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엘리사가 그의 하인에게 대답합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는 말을 반복한 후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알게 합니다: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항상 차고 넘쳐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차고 넘쳐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요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44절: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부대를 백 명의 생도들에게 베풀었을 때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보리떡 이십 개를 어떻게 나눠줬는지 확실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사람의 생각에 영 부족할 것 같은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부대로 백 명의 무리에게 배불리 먹게 나눠주고도 남은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적은 장차 예수님께서 베푸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기적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나눔의 놀라운 기적과 풍성함을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3
엘리야는 평범한 농부였으나 그가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의 토지와 열두 겨리의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를 좇아갔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는 그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그가 구하여 얻은 갑절의 영감을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농부 출신인 엘리사를 통하여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을 먹이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눔의 기적과 은혜를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

"타협하지 않는 믿음" (다니엘서 3:13-30)

                                         "타협하지 않는 믿음" (다니엘서 3:13-30)

 
 1
우리는 미국과 한국에서 여자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자가 한 나라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여전히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말씀대로 설교하기를 원하며, "아내 된 자는 남편 된 자에게 순복하라"(엡 5:22-24; 골 4:18; 벧전 3:1)는 말씀대로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해서, 요즘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하듯이 여성 교우들이 남성 교우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곳에서는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목회자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고리타분하게 보여지더라도 말씀에 충실하게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안전한 믿음의 생활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현대의 많은 교단과 교회들이 진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것은 저래서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다보면,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기준이 흔들리고 우리의 삶의 기준도 흔들리게 됩니다. 해서, 성경을 포함한 모든 기준이 상대적이요 시대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현재의 위험한 사조(思潮)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빠져들게 됩니다.

동성연애를 옹호하며 동성연애자들--동성연애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목사나 장로의 안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들이나 목사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성연애의 죄는 그 당시에는 죄로 규정되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성향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동성연애성향을 가진 사람이 동성연애를 하고 그들의 혼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장로나 목사의 안수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해서, 미국 특정 교단에 속한 어떤 교회들, 성공회에 속한 어떤 교회들, 캐나다 장로교회에 속한 어떤 교회들에서는 이미 동성연애자임을 밝힌 사람들에게 목사나 교회 중직의 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침묵』(沈默, Silence)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17세기 일본이 무대인데 신앙심이 돈독하고 덕망이 높다는 명성으로 젊은 사제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했다는 소식이 일본으로부터 포르투갈에 전해집니다. 이 변절의 소식을 들은 젊은 사제 세 명이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일본 땅을 찾습니다. 그중 한 사람 마르타 신부는 병으로 중도탈락하고 가르페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인 신자들이 모여 사는 도모기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잠입합니다. 가르페 신부는 일본관리들에 붙잡혀 바닷가에서 장대에 매여 밀려드는 바닷물에 수장을 당하고,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요세페 캘러라고 하는 실존인물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함)도 붙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강요받습니다. 일본관리는 그를 고문하고 죽이는 대신에 일본인 신자들을 고문하며 그 처절한 절규를 로드리고 신부로 듣게 합니다. 그리곤, 그에게 속삭입니다: "저 연약한 믿음의 일본인 신자들이 불쌍하지 않냐? 네가 그저 한번 예수의 성상을 발로 밟기만 하면 저들을 놓아줄 것이다. 그저 한 번 성상을 밟아라."
로드리고 신부는 갈등합니다. '그래 나는 이미 주님께 내 생명 전부를 드리기로 작정했으니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저 일본인 신자들은 나 때문에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저들을 위해서 배교(背敎)해야 하지 않을까?'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님의 성상을 발로 밟으면서 다시 자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비록 나의 발로 예수님의 성상을 밟지만 예수님도 내 마음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야. 그저 이번 한 번 뿐이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그러나, 이 음성은 기실은 그 자신과 타협하기 위한 그의 마음의 음성일 따름입니다.
일본인 관리들은 로드리고 신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게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의 관리들에 이용당하며 약한 신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배교에 배교를 거듭한 것 같이 그도 약한 신자와 새로 잠입해 들어오는 외국신부들의 색출과 설득의 명분으로 이용당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사단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까지 우리를 그 발아래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사단은 또한 합리적이요 논리적이요 다수의 의사라는 미명으로 우리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2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궁에서 환관장 아스부나스에 의하여 교육되어진 세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하나야와 미사엘과 아사랴였습니다. 후에 그들의 이름은 바벨론식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해서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칭하고, 하나야는 사드락이라, 미사엘은 메삭이라,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궁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다름아니라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예언케 하신 대로 유다의 왕족 또는 귀족으로 바벨론 왕의 궁에 환관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응한 것입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았을 때, 당시에는 작은 나라였던 바벨론의 사신이 문병(問病)차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를 얕잡아보고 자랑삼아 보물고와 내탕고와 군기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열왕기하 20장 17-18절과 이사야서 39장 6-7절에서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실 때,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50년 가량 흘렸을 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어김없이 이행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잘 해석하여 준 까닭에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다니엘의 요청에 따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육십 규빗(=약 27미터)이고 넓이가 여섯 규빗(=약 2.7미터)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다고 했습니다(3:1).
그리고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백성들과 이방인들에게 금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고 경고합니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소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12절).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그의 앞에 끌어오게 하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짐짓 절하지 아니하였느냐?" (14절).
"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금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5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대답합니다: "왕이 만일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시면 우리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우리를 그저 격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그대로 죽게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7-18절).
2세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붙잡혀 그 지방의 총독 앞에 섰을 때, 총독은 폴리캅으로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케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회유합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대답할 때 "나의 주님이 팔십육년 동안 나를 사랑하시며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내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총독은 불을 준비하여 폴리캅을 살라 죽이고자 했지만 불이 그의 몸을 사르지 못합니다. 결국에 옆구리를 찔러 죽이지만 죽음의 위협 앞에 떳떳하였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굴복하거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대답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풀무를 평일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여 그들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고 명합니다.
그 풀무의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속으로 던지기 위하여 그들을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풀무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분명히 결박하여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은 사람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렬한 불 가운데 타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결박이 풀려있고 또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번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시어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신 것이며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 '신들의 아들과 같은 사람'을 어떤 성경학자들은 성자 하나님의 구약에서의 나타나심이라고 믿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에 서서 그들을 불러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28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자고한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함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들이 만일 느부갓네살의 위협과 회유 앞에 굴하였다면 그들은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입술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부름도 없었을 것입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袴衣)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편 5-6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 울은 로마서 8장 31-34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입으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8절).
그리고 조서를 내려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대하여 망령되이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당하기를 즐겨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시며 모든 위험에서 건지시며 그들을 높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의를 위해서 고난 당하며 핍박 받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0-12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평안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평안의 시대와 평안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믿음,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가 핍박과 환난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평안의 시대에는 주변에 비성경적인 것이 많지만 그저 눈을 감고 지나쳐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것이며”(벧전 4:7) 무엇이 바른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믿음인지 늘 살피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들이 많이 가는 넓은 길이 편하고 안전한 길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가기를 원치 않으시는 길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길은 무엇인가 늘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 진리의 길, 좁은 길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인도함 받는 교우 되기를 축원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 3:13-2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 3:13-22)


1
켄트 키스(Kent M. Keith, 1949-)라고 하는 시인의 “Paradoxical Commandments(역설적 명령)”라고 하는 시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바르고 선한 삶을 살면 세상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이라거나 단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성경 속에서 뿐 아니라 대부분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자와 부처의 가르침에도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道德經) 8장에서 가장 으뜸의 선(上善)을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善) 가운데 가장 으뜸의 선(善)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하여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다투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불교의 가름침에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基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악한 일은 짓지 말고/선한 일은 받들어 실천하라/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뜻입니다.
「경 덕전등록」이 전하는 이 일화는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도림선사(道林禪師)의 대화에서 유래한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칠불통계란 석가모니 이전 과거 칠불(비바시불■시기불■비사부불■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이 한결같이 당부한 훈계로, 곧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말합니다.
시인 백거이가 “어떤 것이 불법(佛法)입니까?”라고 묻자, 도림선사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대답했습니다. 백거이가 그것은 세 살 짜리 아이도 알겠다고 빈정대듯 말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짜리 아이도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1703-1791)는 선을 행하는 삶에 대하여,
“Do all the good you can, By all the means you can, In all the ways you can, In all the places you can,
At all the times you can, To all the people you can, As long as ever you can.“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순간까지“)라고 권고했습니다.
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시편기자를 위시한 성경기자들이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찬양한 것같이 우리 믿는 사람의 선의 기준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善)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던 이 선한 양심이 그들의 타락함으로 인하여 상실되어지고 다만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인 간의 본성에 대하여 순자(芛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고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타락하기 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양선(良善)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 선한 마음은 배우지 않고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 경에서 말씀하는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지으실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주신 모습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최초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21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힘씀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이 선한 양심으로 선을 행할 때 그와 동행하시고 하늘로 들림 받게 하시고, 카인 대신에 선인(善人) 아벨을 택하시고, 악한 세대에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물 가운데 구원하시고, 패역한 세대 중에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와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선한 양심을 가지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 시몬은 히브리어 샤마아(עמשׁ)에서 유래된 단어로 “들었다” 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아람어로는 게바, 헬라어로는 베드로--“반석”이란 뜻의 이름을 주십니다. 즉, 이는 예언적 축복이신데 “반석과도 같이 든든한 그의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신앙고백(信仰告白)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믿는 이들의 믿음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이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기는 하였지만 “의를 위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감당할만한 담대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매, 주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난받고 순교 당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폭군 네로(Nero: 54-68)였습니다.
베 드로는 하나님께서 이 악독한 네로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더욱 더 믿음 위에 견고히 서게 하심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난은 믿는 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애매한 고난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끔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고 행하는데도 오해를 받고 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기억하고” 참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오?” 합니다. 여기에서 선(善)이라 하면 인간의 윤리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을 행할 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가할 수는 있으나, 혹은 죽일 수도 있으나, 우리의 속사람--영(靈)은 해(害)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患難)이나 곤고(困苦)나 핍박(逼迫)이나 기근(饑饉)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確信)하노니 사망(死亡)이나 생명(生命)이나 천사(天使)들이나 권세자(權勢者)들이나 현재(現在) 일이나 장래(將來) 일이나 능력(能力)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14절에서 베드로는 “의(義)를 위하여 고난(苦難)을 받으면 복(福)있는 자니”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과 상통(相通)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도, 두려워하거나 소동치 말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나 주위 사람이 “너는 어찌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망하지않고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물어볼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에 고난(苦難)을 받으시면서도 소망(所望)을 갖고 있는 이유(理由)를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대답할 때,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苦難)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榮光)과 족히 비교(比較)할 수 없기에 소망(所望)을 가지고 장차의 영광(榮光)을 기다리며 인내(忍耐)한다”고 합니다.
아주 바른 대답(對答)입니다.
그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불의(不義)한 자들에 의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사(天使)들과 권세(權勢)들과 능력(能力)들을 순복(順服)시키시는 승리(勝利)하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서 고난당할 때에도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까지 선행으로 대할 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목자장(牧者長)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榮光)의 면류관(冕旒冠)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삼일동안 음부에 머무셨었으나 그의 부활(復活)하심을 통하여서 살아있는 자나 죽어서 옥(獄)에 갇혀있는 모든 자의 영들에게 그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宣布)하셨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신 것 같으나 부활하심으로, 참으로 승리하심을 모든 자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肉體)로는 고난 당하고 죽으나, 영(靈)으로 영원(永遠)히 사는 길은 세례(洗禮)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구원방주(救援方舟)를 예비하셔서 물세례를 통하여서 살게 하시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하신 것처럼, 세례를 통하여 우리 영(靈)이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洗禮)를 통하여 우리는 죄(罪)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 우리는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당하신 그 고난 당함을 두려워하거나 원망치 않고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선행으로 대할 때,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16절).
바울도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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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종종 너무 근시안적(近視眼的)이고 피상적(皮相的)이며 얄팍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의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주위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더 의식(意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고 하셨는데, 나의 선행(善行)을 선전(宣傳)하기를 원합니다.
우 리는 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세상의 이(利)를 위하여 고난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怨望)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늘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복을 누리기 원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피해가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한 식민지 총독(總督)이었던 플리니(Pliny)의 황제(皇帝)에게 드리는 보고서에 의하면, “초대교회 어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 잡혀 십자가 상에 순교(殉敎)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주어 순교당할 것을 자청(自請)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생각할 때 “십자가에 순교 당함이 천국행 보증수표”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인내하고 소망을 갖고 선한 양심을 갖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부러 가난에 처하고, 세상에서 실패(失敗)하고, 일부러 고난을 자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도, 세상에서 실패할 때도, 핍박받고 고난 당할 때도 소망을 갖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대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영에 속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종류의 고난--특히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 가운데도 승리(勝利)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로마서 5:6-11)

"우리가 연약할 때에" (로마서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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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 Kang이라고 하는 중국인 목사님과 Ethel R. Nelson이라고 하는 방콕 선교사 출신의 미국인이 지은 책 『The Discovery of Genesis』(1979)라고 하는 책에 의하면 한자어의 형성이 창세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관련하여 의롭다고 하는 의(義)자를 보면 양(羊) 밑에 나를 뜻하는 아(我)가 있습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를 놓을 때 의로와질 수 있다는 해설이 가능한데 4,500년 전 사람이 이것을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我)자가 손(手)과 창(戈)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림으로 의로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해당하는 노아의 홍수이전(antedilluvian) 기록으로는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양(羊)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농산물(農産物)을 제물로 드린 가인이나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이나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까닭은 그들의 부모 아담과 이브의 범죄(犯罪)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그들의 죄와 허물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를 열납치 않은 이유에 대해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는 아벨은 첫 수확물인 양을 정성껏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첫 수확물을 드리긴 드렸지만 구분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드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기뻐하시지 않은 까닭을 달리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같이 이들에게도 죄와 허물이 사함받기 위해서 양(혹은 다른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드리라고 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물리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의 모형을 따라서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인간을 위해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 인간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좇은 이스라엘의 양을 제물로 삼는 제사가 어린 양 제사의 모형이요 예표가 된 것같이 한자 의(義)는 원래 손에 창을 들고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의로와짐을 뜻하지만, 이 글자 안에 예표적으로 우리 각 사람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꿇어 엎드릴 때 의로와지게됨에 예표요 모형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나이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한 산에 올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사건일 것입니다.
물 론 하나님의 의도는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애지중지하는 이삭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번제물로 바칠 수 있을지 보시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게 합니다.
어떤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믿음을 갖고자 하던 사람은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성경 속에 나오는 이 이야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은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셔서 나의 자녀를, 나의 전 재산을, 나의 전 사업체를, 나의 지위를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나?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렇게 할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또 다른 의도는 무엇인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그저 하나님을 얼마나 보시기 위하여서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는 사건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더 큰 사건의 모형(Type)입니다.
무엇입니까?
아 브라함은 경건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이던 모든 인생들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리아의 한 산 곧 예루살렘의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한 예표(豫表)라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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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송이 있지만,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으시되 자신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신 인생들을 위한 죽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상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만을 놓고 세상사람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어 머니 마리아와 육적 아버지 요셉이 호적하러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멀리 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까지 내려가고 베들레헴에 도착해서는 해산이 임박하여 여관도 구할 수 없어서 마굿간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으셨습니다.
또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서 나름대로 무언가 해보겠다고 3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무식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하나님을 참람케 하는 자라는 죄명을 쓰고 33세에 저주의 상징이라는 십자가형에 처하여졌으니 얼마나 그 인생이 기구한 것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 나, 그러한 낮은 데서의 탄생과 십자가상에서의 저주받으신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것도 한 친구를 위한 죽음이 아니요 한 세대가 아닌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태어나시고 사람 가운데 거하시고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시작되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원대한 인간구원의 계획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대강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그의 죽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적격자였는지 세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고 했고,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했으며,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When we were still weak or powerless)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강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권능이 있을 때가 아니라 능력이 없을 때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떠했나 하면 경건치 않은 자(ungodly)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은 없다 부인하는 자도 있었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자를 핍박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연약하며 불경건한 모습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에 우리를 의로 여기신 것은 우리가 강건하기 때문도 우리가 경건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약하고 불경건하였지만, 그의 은혜로 우리로 주님께로 가까이 나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허락하시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7-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인줄도 모르고 살 때 하나님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을 위해 미리 마련하신 속죄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위한 죽으심과 우리 인간의 인간을 위한 죽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인간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과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드물거나 혹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의인이나 선인은 자기의 친한 친구이거나 가까운 친척일 것입니다. 불의한 자나 선하지 않은 사람--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더라도--을 위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불의할 때에 경건치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선하지 못한 우리의 죄를 위해 미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9-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함을 얻을 것’입니다: 9절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했고”; 10절에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復活)하심은 우리 인간의 과정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시고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살아나신 것 같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신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인간이 살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의로와질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와짐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영원히 함께 사는 구원함에 이를 것입니다.
구원(救援)은 9-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를 그 마음 가운데 느끼고 사는 사람은 현재에도 그 구원의 기쁨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는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한 대로, 성령의 인치심이 장차 일어날 사건인 구원의 확실한 보증, 약속이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역사하심을 느끼십니까? 약속을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해서, 성령의 인치심을 얻은 우리는 구원이 미래의 사건이지만 ‘구원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1-2절의 말씀을 요약·반복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和睦)은 1절의 화평을 대신한 말로서 그리스도의 화목제사의 결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워할 이유가 있습니다.
3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우상과 짝할 때에는 연약한 자의 삶을 살아갔는데,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으로 여러분을 대신하여 속죄제와 화목제가 되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삶으로서 증거하시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명기 10:12-22)


1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1908~67)의 연시(戀詩) <행복>에 나오는 내용인데, 시조시인인 정운 이영도씨에게 보낸 수많은 연애편지의 모음을 출간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책 중에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시조시인 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여인으로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뒤이어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유치환은 이영도에게 그의 마음 전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서른 여덟 살의 유치환은 스물 아홉의 청상 과부 이영도를 행하여 사랑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당시의 유교적 전통의 규범을 깰 수 없기에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영도에게 유치환은 거의 매일 편지를 쓰고 시를 써서 보냅니다.
20 여 년 동안 5천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불타던 유치환의 사랑은 1967년 2월 13일 부산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끝이 납니다. 이영도가 소장하였던 유치환의 연애편지들은 그가 타계한 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짝사랑이든지 쌍방의 사랑이든지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우리는 더욱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생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사랑을 함으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함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므로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인생의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원하시고 허락하시는 행복의 비결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행되어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에 할례(割禮)를 받는 것입니다.
창 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족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쌍방계약)을 맺기를 원하시는데, 그 언약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가속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인 것 같지만 인생들을 축복의 말씀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자에게 중요한 재생산 기관(reproduction organ)의 표피(foreskin)를 베는 행위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 즉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림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지만, 만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시’의 할례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과연 아브라함의 할례가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심입니다.
아 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삭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고자 함으로써 그의 할례가 유효한 것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고, 그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리고 창세기 22장 16-18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그의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은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는’--즉 메시야가 그의 씨로 임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곧 하나님의 구원함에 이르는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그가 할례의 언약을 따라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림으로 얻어진 것인데,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12-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말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을 사랑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까?
13절에 이른 대로, 우리 각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복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준행하였기에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NLT: "Therefore cleanse your sinful hearts and stop being stubborn.")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께 헌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결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는 않고 자기의 육체에 있는 할례의 표시만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와 같이 자기의 육적 할례 받음을 자랑하는 유대인 할례당에 속한 사람들에게 표피 조금을 베고 그같이 자랑할 것이면 아예 잘라내고 더 자랑하라고 그들을 책망합니다(갈 5:12).
할례는 하나님께 그의 마음과 삶의 가장 중요한 드리는 것이며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할례를 자랑하며 전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할례의 신약적 표현은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부, 성자와 성령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드리겠다는 결단이요 헌신인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세례의 효력을 상실한 채의 삶인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circumcise your hearts)고 말씀함은 진정한 의미의 헌신과 결단을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신 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요”라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예레미야 6장 10절에서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 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보다는 그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즐겨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곧 진정한 결단이요 헌신임을 선포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circumcise the foreskin of your heart, cleanse your sinful hearts)은 “마음의 표피”를 도려낸 사람인데, 여기서 “마음의 표피”란 교만한 마음, 완악한 마음, 자고한 마음 등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목이 곧고 자고함”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된 마음을 도려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데, 이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7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 신이시요 주들 중에 주시요, 크고 능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만유의 주님 되십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장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위에 그는 사람들의 중심을 보시고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8-19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살 때 나그네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 리 인생들이 평생에 어떤 삶을 살지는 다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불행해질 수도 있고, 현재는 남편이 있는 사람이 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주변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동정이나 동냥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웃 사랑함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행복하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20절에서 모세는 12절에서 역설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그에게 친근히 하라-곧 그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맹세는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닌 오직 그의 이름에만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21-22절: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가 여호와를 사랑할 것은 그는 우리의 찬송이시요 우리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고 두려운 일이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처음 애굽에 내려갈 때는 70인밖에 되지 아니하였지만 그 자손들이 430년 후에 애굽을 나올 때는 남자 장정만 60만이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을 계수하면 족히 200-300만이 되고 또한 많은 가축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200-300만의 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세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7절에서 주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3
인도 태생의 예수회 사제인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1931-1988)가 쓴 "종교박람회"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한 친구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래 자네 요즘 교회에 다닌다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잘 알겠구먼! 그래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분인가? 어디서 태어났나? 몇 살에 죽었지? 무슨 일을 했나?"
그러자 교인이 된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니,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난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었지. 그러나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 사실 나는 얼마 전에 술주정뱅이에다 빚까지 지고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산산조각이 났던 우리 가정도 화목해졌지. 이게 모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나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야. 이 사실만은 나도 알고 있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므로 우리의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 전부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하여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포함한 이웃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욱 행복하여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라디아 2:15-21)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라디아 2:15-21) 


1
독일의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신앙적인 완전을 추구한 사람인데 선행과 고행을 통하여서도 마음에 평안은커녕 죄사함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피가 흘러도 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내리던 그에게 문득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후에 “나는 다시 태어나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였고, 이 말씀을 붙잡고 면죄부(免罪符)를 팔고 있던 타락한 카톨릭 세력에 맞서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저술한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를 발견하고 설교하였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기독교가 혼탁된 정치와 화합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설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대신에 바울을 반대하던 초기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복음인 ‘믿음 뿐 아니라 율법과 할례’의 교리를 약간 변형시킨 ‘믿음, 선행과 영세’라는 카톨릭의 구원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행이 부족하여 죽어서 아직 낙원에 이르지 못하고 연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 자녀들이 면죄부를 살 때 연옥에서 옮겨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만,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을 회개할 기회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윤리’에 근거를 두고 구원을 판단합니다. 따라서,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의 ‘봉사’를 구원의 근거로 착각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이 여겨지고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시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시험꺼리로 교회 봉사를 뜸하게 하고 있을 때에는 구원의 확신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였는데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습니까?
이러함에도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함이 믿음입니다.
아직은 그 약속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도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우리의 바라는 것들이 우리의 ‘고백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reality)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proof)라”(히 11:1)고 말씀하는데, 나의 바라는 것이 구원일 때 믿음은 이를 실현되게 하는 힘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안디옥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냐 아니면 할례(또는 세례)나 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dietary law)를 포함하여 율법을 지켜 행함도 필요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나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흔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구분하여 말하는 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면에서 ‘죄인'(sinners)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취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주장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설령 유대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요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 죄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칭(自稱)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의 율법 지킴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4편 3절과 143편 2절에서, 그리고 이를 인용한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한 대로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한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이라고 번역한 구절의 헬라어 성경 원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υ Χριστου)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한글 성경과 같이 사람(=우리)이 믿음을 고백하는 주체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고백의 대상으로 보는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체가 됨이십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신실하심,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이신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해석함이 무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믿음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칭의와 구원의 길(=방법)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밝힌 대로, 율법은 다만 유대인들에게도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함으로써, 율법이 구원을 위한 부차적인 조건도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평생에 율법을 지키거나, 윤리적이거나, 선한 삶을 살거나,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3)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4)고 말씀하십니다. 그 강도는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면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 죄인과는 달리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여서 율법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판단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그들로 죄 짓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계속 지키거나 버리거나를 불문하고 그들 유대인들도 원래부터 (이방 죄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죄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완전한 율법 지킴으로 의로와지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는 까닭입니다.
18절: 만일 우리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복음으로, 할례나 식사 규례(dietary law)나 기타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있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선언한 사람입니다.
하기에, 야고보가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도 좋다고 권고할 때 이를 바른 것으로 여겼었고, 베드로가 유대인의 식사 규례를 버리고 이방인과 식사 자리에 같이 어울림을 옳게 여겼었습니다.
 베드로가 버렸던 식사 규례를 야고보에게서부터 온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다시 세우고자 했을 때, 이를 외식하는 행위로 여겨서 그를 면책하였던 바울입니다.
따 라서, 그는 그가 헐었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와짐’을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의롭게 되는 한 방법으로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고 세운다면 이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역설(力說)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전에는 율법의 절대성과 온전성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후에는 율법은 그에게 칭의와 구원을 줄 수 없고 다만 그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수단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갈 2:16, 3:22; 롬 3:20).
바울이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씀함은 (칭의를 위한) 율법의 효력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고 함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나의 죄와 죄인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이 깨닫게 하는 죄를 향하여 죽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향하여 살기로 작정합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절은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Χριστῷ συνεσταύρωμαι)에서 헬라어 ‘순에스타우로마이’(συνεσταύρωμαι)는 현재완료형으로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나니”입니다. 일회적(一回的)인 못 박힘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못 박혀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συνεσταυρώθη)의 헬라어 시제는 부정형(aorist) 수동태로 일회적(一回的) 사건을 가리킵니다. 죄의 종노릇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갈 5장 24절 참고).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역사하시기 위하여서는 매일 매순간 ‘나의 (죄에 노출되기 쉬운) 자아’를 못 박는 작업을 반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의 자아도 매일 매순간 죽기에 나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주장도, 생각도, 고집도 모두 죽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안에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위해서 간구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 때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의 삶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의 고백이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추가로) 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의 공생애도 헛되고 죽음은 더 더욱이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할례(=세례)로 말미암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믿음은 우리의 수고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 믿음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4-5절에서 바울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므로 우리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노라.”고 신앙고백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Friday, February 3, 2012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16)



성경말씀: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어느 태산을 유람하던 공자가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졸라매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영계기 노인을 만났다. 공자가 노인에게 묻는다: “선생께서 즐거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영계기 노인이 대답한다: “나의 즐거움은 많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때에 모든 것들 중에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내었는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첫째 가는 즐거움이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빛나는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미 90세가 되니 또한 즐거움이요, 가난하게 사는 것은 도를 닦는 이에게 당연히 있는 일이요,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당연한 종말이오, 그러니 이제 나는 당연히 있는 일에 처하여 살다가 명에 죽게 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으며, 기도가 있으며, 감사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기뻐할 일이 생길 때만 기뻐하고, 당장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하고, 내게 좋은 일이 벌어질 때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지 않는다.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을 그들은 핍박과 가난 가운데 있었다. 이러한 권면을 하는 바울 자신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쫓기며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와 같이 권면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권면을 들으면 교인들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목사님, 목사님, 기뻐할 건덕지가 있어야 기뻐하죠. 매일 가운데 쪼들리고 낙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어떻게 기뻐하겠어요?” “아니, 내가 이렇게 병들었는데, 나의 수족조차 제대로 움직일 없는데 어떻게 기뻐하란 말씀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평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기뻐하라 말씀하는 대신에 고통 가운데, 부자유함 가운데, 소망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도들을 향하여기뻐하라 말씀한다. 뿐만 아니라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 설명한다. 세상의 평안함과 안일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기뻐하라 함은 세상 누구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수(眞髓) 없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기쁨이 넘침은 우리가 세상의 극한 행복 가운데, 유복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이신 주님의 영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질 것이 확실함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넘치는 기쁨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기 때문에 기쁨이 넘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이름을 내고, 지위가 높아지고, 명예를 얻기 때문에 기쁨이 넘치는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고 기록한 곳을 찾을 없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믿는 사람에게 넘치는 기쁨은 무엇인가?
우리의 환경(環境) 변한 것이 없고, 우리의 곤고는 여전하고, 우리를 둘러싼 가난과 고통과 병듦과 늙음의 환난(患難) 여전하여도, 내가 세상에서 귀한 것으로 여기던 모든 것은 상실하여도, 내가 주님을 얻고, 주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 가운데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내게 있기에 나의 기쁨은 항상 넘쳐난다.
우리에게 순간 순간 걱정과 근심, 고통과 슬픔이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충만하기에, 나의 모든 걱정과 근심과 고통과 슬픔의 상처들을 씻어준다. 해서,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가 있다. 투산 한인장로교회의 성도 사람 사람마다항상 기뻐할 있는주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