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6, 2016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 (에베소서 4:1-6)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 (에베소서 4:1-6)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
공자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제자의 수가 7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자공은 재능이 뛰어났고 안회는 덕과 학문이 뛰어났습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보면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묻습니다: “자네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자공이 대답합니다: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데 불과합니다.”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 자네는 안회만 못하지. 나와 자네 모두 안회만 못하다네.”
공자가 끔직히 사랑한 이 안회라는 제자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41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공자는 옹야(雍也)편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하며 그를 회상합니다: “안회는 학문을 좋아했고, 화가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었건만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어 지금은 없으니, 그 외에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제자를 아직 듣지 못하노라.”
안회가 공자의 모든 제자 중에서 학문이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학문을 남달리 사랑한 까닭입니다. 공자가 그의 스승이었지만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에 대해서 시샘하기 보다는 그의 학문 사랑함을 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제자로서 우리의 연구하는 학문은 바로 주님입니다.
안회가 유교의 학문에서 뛰어났던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학문에서 뛰어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학문의 대상인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대할 때 가능합니다.
세상의 학문은 머리로 깨달아 진보가 있지만, 주님을 아는 학문은 마음으로 깨달아 진보에 이릅니다.
목회자보다 더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시고 목회자보다 더 그리스도를 아는데 (경험하는데) 뛰어나시기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작은 도시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어느날 낮시간에 교회를 돌아보는데 본당에서 어느 여성도님이 기도하는것인지 묵상하는 것인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연신 옷소매로 눈을 훔칩니다. 그 다음 날에도 비슷한 시간에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그 성도님을 발견합니다.
며칠을 지켜보던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성도님이 아마 큰 근심꺼리가 있어서 저렇게 눈물짓나보다. 저 분이 왜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물어봐야겠다.” 해서, 밖에서 그 성도님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성도님이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나올 때 목사님이 인사를 건네면서 눈물 흘리는 사연을 묻습니다.
그 여성도님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아유, 목사님이 다 보셨군요” 하면서 큰 근심있는 사람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목사님께 사연을 말합니다: “제게 무슨 걱정꺼리가 있어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제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주님이 계시는 전에 이렇게 찾아와서 가만히 앉아있노라면 제 마음에 감동이 오고 저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를 한없이 느낀답니다.”
목사님의 눈에 비췬 그 남루한 중년 여인의 삶에 그렇게 큰 세상축복이 있는 것 같지 않건만 그 여인은 주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고 기쁨의 눈물 흘림이 목사님께 부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성도님이 간 다음 목사님은 본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 성도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십시오. 주님을 생각만 해도 은혜가 넘치고 눈물이 흐름을 저도 경험케 하옵소서.”

소망 중에 이 세상이 지나고 다음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거기에는 목사도 없고, 장로도 없고, 집사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성도로 통합니다.
어린아이도 없고, 노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병든 자와 불구자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건강하고 거룩한 자녀입니다.
소망 중에 이 세상에서 함께 한 마음과 한 몸으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같이 한 형제·자매들과 그곳에서 이웃하여 살며 ‘거룩 거룩’ 주님을 찬송하며 경배하며 이 세상에서는 시간과 환경의 제약으로 나누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을 더 이상 밤과 어둠이 없는 그곳에서 생명수 강가에 앉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천국의 삶은 질투가 없고, 분냄이 없고, 갈림이 없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에 속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합니다.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의 현재의 처지는 갇힌 자의 상태입니다. 그가 갇혔을지라도 주 안에서 갇혔다고 표현하고, 자유한 자의 삶을 살더라도 그의 삶은 주안에서의 자유한 삶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연합인 교회가 하나되는 첫 번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주님과 우리가 하나되기 위함이요, 그보다 앞서 성도와 성도간에 하나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되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열거합니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謙遜)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세이요, 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갈릴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온유(溫柔)를 정의할 때, “온유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나 방해를 받아도 분내거나 원한을 품지 아니하고 반동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래참음은 자신에 대해서는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는 힘이며, 남을 대해서는 받은 피해나 손해에 대해서 복수나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용납은 남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고 기억하지 않는 태도인데 오직 사랑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며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나열했는데 이 아홉가지만이 성령의 열매가 아니며 이외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갖는 것이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겸손의 마음과 사랑에서 이루어지는 용납의 마음도 성령의 열매라고 할 것이며, 성령의 열매맺는 생활을 할 때 교회는 하나되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것입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평안(Peace)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마음이 다른 사람과 불화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될 수 없으며 하나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우리 안에서 느낄 수 없습니다.
교회에 각기 다른 종류의 인격과 감정과 주장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와같이 제각기 다른 지정의를 가진 겉사람들만의 연합이라고 한다면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겉사람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을 다스리시는 성령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에 양보할 때 교회는 동일한 목적과 사명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평안의 줄”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말씀함으로, 여러 가지 다른 은사도, 직임도, 또한 사역도 한 성령 안에서, 한 주님 안에서, 한 하나님 안에서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결국 성령과 주(=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가 하나이심을 표현하여 삼위일체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4-6절에서도 동일한 근거를 발견합니다.
 
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절에 성령에 대해서, 5절에 주님-곧, 그리스도에 대해서, 6절에 하나님--곧 아버지에 대해서 하나이심을 말하고, 결국 이 삼위(Three Persons), 세 분이 하나이심을 강조합니다.

4절에 “몸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몸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몸이 하나되게 하는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말씀하심은 1절의 반복으로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같이 우리도 하나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됨이 부르심을 듣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서로 갈림이 아니라 각 몸의 지체인 성도가 연합하고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온전한 한 새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5절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에 따라, 교파에 따라 각각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십니다.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누구에게 속한 자라 서로 주장할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반문합니다.

“믿음이 하나라”고 함은 우리의 고백하는 믿음이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 고백하는 동일한 믿음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바울을 믿는 믿음이고, 저 사람의 믿음은 베드로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세례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세례의 갖는 의미가 “연합”인데, 이 연합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과의 연합이란 뜻입니다.
로마서 6장 3-5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는 오직 한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부활하여 살고자 함입니다.

6절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이 한분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를 다스리시고,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하나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3
우리 가운데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인데 곧,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의 용납함과 또 다른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행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은 우리의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감격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으로 행한 사랑이 더욱 넘쳐나셔서 부르심에 합당한 하나되는 삶이 더욱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랑의 띠로 서로 연락하여 성도간에 더욱 사랑의 교제와 위해서 기도하여줌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그위에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버리신 주님과 하나되는 삶이 계속 진행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고, 만유를 하나로 통일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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