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13, 2016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1
어떤 분의 간증 끝에 들려준 감사의 시가 제 마음에 닿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주님 때때로 병(病)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孤獨)의 수렁에 내던져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와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驕慢)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꺼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가득한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盞)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평안의 때에도 감사하지만 고난과 슬픔의 때에 더 감사함이 넘쳐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설교시간이면 어김없이 조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그 장로님을 볼 때마다 힘이 떨어짐을 느낍니다. 하루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그 장로님을 조용히 만나 말을 꺼넵니다: “장로님, 오해는 마시고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로님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역력합니다: “장로님은 어찌하여 설교시간마다 그렇게 조시는 겁니까? 저의 설교가 듣기 싫어 그러십니까?” 장로님은 펄쩍뛸 듯 놀라며 손을 저으면서 대답합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사님 설교하실 때 조는 것은 안심이 되어 그럽니다.” “안심이 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정식으로 졸업하신 유능한 목사님 아니십니까? 게다가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항상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이단적인 요소도 없고 불건전한 요소도 없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 해도 지적할 것이 없는 순수한 메시지입니다. 늘상 옳은 말씀만 하시니 신경쓰여질 요소가 전연 없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한편으로는 무언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자신을 치켜세우는 장로님의 대답에 동조합니다: “그야 그러시겠지요.” “결국 우리 교회의 양떼들은 좋은 꼴만 먹고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은 편안하고 저절로 잠이 오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는 아무 것도 꾸밈이 없고 덧입지 않은 자세이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기도를 할 때, 장로로서 기도를 할 때, 집사로서 기도를 할 때, 그 기도가 하늘 보좌에까지 상달되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오지 않음은 목사나 장로나 집사란 직분의 겉옷을 걸치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직분은 귀한 것이지만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감에 장애요인이 됩니다.
목사나 장로, 집사란 직분, 사회에서 이루어논 나의 공적, 교회에 쏟아부은 나의 과거의 행적등이 나로하여금 하나님 앞에조차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의 죄와 허물을 솔직하고 낮은 자의 마음으로 고백하지 못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개인으로서, 혹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성하는 한 교회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예배의 갱신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와 같이 예배는 드리되 무의미하며 나에게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고 믿음이 없고 주님이 열납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의무적인 가인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오되 교만의 옷과 위선과 직분의 탈까지 벗어버리고 자신을 활짝 열고 낮추며 찬송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가장 귀한 마음과 시간과 정성으로 아벨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구나가 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누구나가 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들의 바램이 현실화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속에 아직 답답함이 있기 때문이며 상처가 있기 때문이며, 해결되지 못한 문제와 죄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통하여 나의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으며 기쁨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싹트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솔직하여야 할 것이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아가 여러분의 모든 문제와 허물들을 숨김없이 낱낱이 아뢸 때 여러분은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고, 예배의 기쁨과 평강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지루하고 졸립게만 느껴지던 목사님의 설교가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와닿게 될 것이며 목사님의 부족한 입술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줌을 경험하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옛 사람은 우리가 변화되기 전 자연인의 상태에 우리를 지배했던 겉사람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나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성령의 새롭게 하심 곧 속사람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먼저 바울은 옛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같이 허망한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이방인인 우리가 이와같이 허망한 것으로 행하던 자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이하에서 보듯이 우리가 이방의 믿지 않는 자이었을 때 우리는 약속의 언약들이 없는 자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요 해서 허망한 삶을 살아가던 자이었습니다.
‘허망(虛妄)하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거짓이 많고 망령되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되기 전의 삶이 이러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하는 사람의 삶이 여전히 거짓이 많고 하나님 보시기에 망령되이 행하며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겉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18절: 저희 총명(聰明)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無知)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겉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은 총명이 어두워져있는 가운데 삶을 살아갑니다.
이 총명은 세상의 학문이 주는 총명이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총명인데 세상을 좇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총명이 어두어져 하나님을 인정치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의 무지(無知)는 하나님을 알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며 부인하는 태도입니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교만과 고집으로 굳어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곧 영원의 생명의 구원을 얻지 못할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겉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의 삶은 또 어떠한가 하면 이 사람은 ‘감각이 없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감각이 있는자(sensitive)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대신에 그 말씀을 듣지 않고자 귀를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들려주는 쾌락의 이야기에 더 귀기울이며 그 사람의 모양대로 세상의 우상을 더 좋아하는 방탕과 행음의 삶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모하는 대신에 세상의 정과 욕심에 이끌리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이하에서 그 허탄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했고,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했고, 26절에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했고,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말씀합니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을 통하여 배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삶은 이러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마음이 허망한 가운데 행하는 삶, 하나님의 총명에서 멀어진 삶,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무지(無知)한 삶, 마음이 강퍅하게 굳어진 삶,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삶--이러한 삶의 모습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진리란 참된 이치 혹은 도리인데 세상의 진리는 시대와 환경과 관습에 따라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진리이신 예수님--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는 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진리는 시대와 환경과 관습을 초월하여 영원불변하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듣고 또한 가르침을 받은 그 진리는 그리스도 그분에 관한 것이며 그 진리의 말씀은  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22-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진리란 참된 이치 혹은 도리인데 세상의 진리는 시대와 환경과 관습에 따라서 바뀔 수 있습니다.
17-19절에 열거된 옛 사람의 모습 이외에 바울은 예 사람의 모습을 한 가지 더 열거합니다.
이 옛 사람은 욕심이 많습니다. 이 많은 욕심으로 인하여 쉽게 쉽게 사단의 유혹을 받고 이에 넘어갑니다.
또한 이 옛 사람은 한 가지 습관에 머물러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세상의 풍조일 때는 썩고 허물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찬송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새로와지는 것이 없을 때 그 예배와 찬송도 썩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열납치 않으시고 예배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말씀하시고, 또 “너희 패역한 이스라엘이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유다가 이스라엘이 희생제물과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드리는 희생제물과 예배는 현재 우리가 드리는 찬송과 예배보다 훨씬 더 정성되고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새로워짐이 없는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드리는 해서 하나님께 정성스럽고 거룩하게 드리는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고인 물처럼 썩은 냄새가 나며 하나님께 상달되고 열납되어질 고운 향기가 없는 그 예배를 물리치셨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심령(心靈)으로 새롭게 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예배는 변화가 있고 새로워짐이 있는 모습입니다(롬 12:2).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 마음 속에--우리의 속사람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여기 “심령(τῷ πνεύματι τού νοὸς ὑμών)으로”란 말의 원어적 의미로는 “너희의 마음 속의 영으로”란 뜻인데, 마음 속의 영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 말하는 새 사람은 실은 새 사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모습의 옛 사람 이전의 원래 우리 인간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던 그 원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원래 사람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와 진리의 거룩함(holiness of truth)을 갖고있었습니다. 그 원래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생기(生氣)--살아있는 기운--를 갖고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원하며 그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우리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원래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마음 속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우리 속사람이 겉사람을 지배하는 상태를 간구해야 하며, 범죄함으로 타락한 옛 사람의 정과 욕으로 더러워진 옷은 이제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3
심령으로 새로와지기를 원하며 새 사람의 옷을 입기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걸치고있는 세상 지위와 학위 명예와 지위와 교회 안에서의 직분의 가면이요 겉옷입니다.
우리 마음 속의 교만과 편견, 답답함과 상처와 고통과 온갖 고질적인 병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않는 사람은 속시원하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으며 아무리 일주일 내내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을 따라 다닌다한들 심령의 새로와짐과 변화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 맡기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릴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의 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이시며 우리의 아픔과 억눌림을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서 항상 거기 계신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기를 간절히 구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사람은 상실과 좌절의 슬픔 가운데도 감사하고,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아픔 가운데도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과 역경 가운데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며, 이 사람은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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