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은 사람의 삶” (에베소서 4:25-32)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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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석가모니불이 영산(靈山)에서 중생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說破)합니다. 석가모니불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중생에게 보입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서 잠자코 있었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짓습니다. 석가모니불은 가섭이 그 뜻을 참으로 깨달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설명하고자 하면 오히려 그 진리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가섭 존자에게 말합니다: “내게는 정법안장(政法眼藏: 올바른 진리를 갖추고 있음)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 상태의 미묘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 변화하는 생멸의 세계를 떠난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로 가는 미묘한 길)이 있는데, 문자를 통해 표현치 않고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마하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뜻을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유래되었고 또한 이 사건에서 염화시중의 미소란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가섭만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달은 것이 그의 천재성에 기인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원함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미인선발대회에서는 지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된 육체의 아름다움 혹은 육체의 아름다움만이 그 판정 기준이지만,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제자는 외모와 상관없이 그가 가르치는 학문을 터득하기 위하여 그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배우고, 배운 학문을 연마하여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그의 기풍(氣風)을 이어받기 위하여 정진하는 학생이 아름답고 귀하게 보입니다. 피아노나 기타 악기, 혹은 성악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제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에게 주어진 몫을 훌륭히 잘 해내는 사람입니다.
공자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를 잃었을 때의 슬픔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안회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쓰며 선생인 공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군자의 세 가지 낙(樂) 가운데도 ‘천하의 영재(英材)를 얻어 그를 훌륭한 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회자에게도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교인들이 있는데,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힘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생으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다른 학문이나 예·체능계의 선생들과 다른데, 다른 분야의 경우에 선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주장이나 학설 혹은 기풍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것이지만, 목회자가 바라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전하여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목사들이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 혹은 교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자기의 제자들로 삼고자 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적(敵)이 되며 이단(異端) 종파의 교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힘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과 형상으로 변화하고자 매일 매일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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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새 사람의 옷-곧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이 지향(指向)해야 할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7-19절과 22절에 나오는 옛 사람의 삶의 모습과 오늘 25-32절에 나오는 새 사람의 삶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새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혹 하루 이틀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합니까? 사랑의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이 일을 감당케 하는 원동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아무리 강권한다고 한들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물에 어떤 차의 봉지(tea-bag)를 담궜을 때 그 속의 냄새와 색깔이 뜨거운 물을 채우듯이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와 우리의 온 몸과 영과 혼을 채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광대하시고 대속적인 희생의 사랑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눈을 향하고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먼저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사 아들의 형상으로 오셔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강요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이것이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며 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17절에서 옛 사람의 생각과 행함은 허망-거짓이 많고 망령되다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 사람은 먼저 거짓을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과 참된 것으로 교제합니다. 이는 진리이시며 참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서 우리의 마땅히 행할 일입니다.
26-27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는 것은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겸손(謙遜)과 온유(溫柔)의 대표적인 삶을 사신 예수님도 때로는 불의를 보시고 분을 내셨습니다. 그를 불신의 눈으로 마음의 완악함을 갖고 바라보는 자들에게 노하심으로 대하시고(마가 3:5), 그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태 23:33) 노를 발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상과 의자를 노하심으로 뒤엎으셨으며 그들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으셨습니다(마가 11:1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함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은 불의에 대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의 분냄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또 다른 죄가 싹트게 방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분을 내되 해가 지도록 오래 품고 있어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케 하는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어떤 사람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 분을 풍고 있었더니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내는 쓸 데 없는 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전에는 우리가 사람을 속이고 남의 것을 마음으로 또는 행동으로 도적질하던 자들이었는데 새 사람의 옷을 입을 때 더 이상 도적질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고자 합니다.
전에는 부당한 이익을 구하며 게을리 행하며 일하지 않고 구제의 대상으로 얻어먹고자 하였지만 이제는 새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며 가난한 중에도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욕하는 말이나 불신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목사님이 불평과 원망투성이의 말을 하고, ‘내가 실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마음 속에서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설령 그 목사님과 같이 원망과 불평이 많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일지라도 그 목사님을 그들의 목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 혹은 믿음이 앞선 사람들은 나중에 믿은 사람들 앞에서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는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은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라고 무심코 한 말이지만 이런 것이 믿음의 문턱에서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문밖으로 밀어냅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어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대신에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말로 인해 그들보다 더 악한 지옥자식으로 만들고 있음을 꾸중하셨습니다.
새 사람은 더러운 말은 삼가며,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믿음의 선한 말을 합니다.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내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내가 정결하고 믿음이 충만한 생각을 하고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탐욕과 추함과 불신의 생각을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나간다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속에 거하시며 활동하기를 원하시는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 구원과 하나님 나라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늘 거하시는데 그분과 불편한 관계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1-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납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악독이라고 함은 남을 해치는 독기가 들어있는 악한 마음이고, 노함(anger)과 분냄(Wrath)은 일시적 혹은 지속적인 노여움의 감정이요, 떠드는 것은 노여움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요, 훼방하는 것은 이 노여움의 표현으로 인하여서 상대방을 중상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방을 향한 절제할 수 없는 악한 감정과 그 표현인데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옷-그리스도의 옷을 입고자 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인데 우리가 남보다 더 자비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남들보다 더 죄악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자이요 불의한 자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는 ‘의인 중에 의인’인 것 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도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을 진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대하듯 그렇게 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저는 교회에 각기 다른 인격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 감사합니다.
전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리 믿음이 없고, 왜 그리 책임감이 없고, 왜 그렇게 변덕스러울까 불만이 많은 적도 있었지만 주위의 다른 모양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마음이 천국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교회 밖의 삶에서는 만나기 싫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은 피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보기 싫은 사람도 보아야 하고,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도 어울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전에 미워하던 사람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워지고, 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고, 나와 견원(犬猿)의 관계에 있던 사람, 나를 욕하고 돌아선 사람까지 용납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용서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왜 나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지 그 깊으신 사랑의 은혜를 깨닫는 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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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의 옷을 입음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입니다.
해서, 새 사람이라고 함은 기실은 원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짓과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마음에 도적질함과 더러운 말과 악의와 위선과 교만으로 두꺼운 옛 사람의 겉옷을 입고 있었던 우리인지라 이 옛 사람이라고 하는 옷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시며 나에게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나에게 다가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만 있다면 해서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분의 영이신 성령께 나의 전부를 내놓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옛 사람은 벗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역사하시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의무감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정이 우리의 감정을 대신하고, 성령의 의지가 우리의 의지를 대신하고 성령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대신하는 변화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새 사람의 삶으로의 변화를 사모하시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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