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2, 2015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1
제가 아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님이 현지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교회 건물을 짓다가 겪은 어려움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공사 현장에 매일 주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교회 짓는 일을 방해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이들에게 시달리다 못한 선교사님은 무슨 수를 내야 되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들을 처리 좀 해달라고 떼를 써보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그들과 부딪혀보기로 작정합니다. 해서, 어느 날 그들이 나타나자 그 가운데 가장 힘이 세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담판을 짓습니다. “당신이 나를 힘껏 때려서 내가 쓰러지면 당신들의 요구대로 따르겠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지 말라고 하면 짓지 않을 것이요,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힘껏 쳤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로 버티면 앞으로는 우리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과연 이 불량배들이 흥미로와합니다. ‘감히 겁도 없이 내 주먹을 맞아보겠다고...’ 하며 그 불량배들의 두목 격으로 보이는 사람은 실실 웃으면서 이 선교사님이 내건 조건에 순순히 응합니다. 선교사님은 맞을 준비를 하고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저 불량배의 주먹에 맞을 터인데 하나님의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힘 세 보이는 불량배가 선교사님의 배를 겨냥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일격을 가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선교사님은 맞은 것 같지도 않게 끄떡없이 버티고 서있는데 일격을 가한 그 두목은 ‘어이쿠’ 외마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나가 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선교사님의 복부를 강철같이 단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는 공사 현장에 불량배들이 얼씬도 하지 않게 되고, 선교사님은 교회를 아름답게 완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십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 -)의 ‘러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글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은혜에 굶주린 국민을 보았다. ... 러시아의 보통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도는 것이 꼭 매맞은 어린아이 같았다. ... (그러나) 러시아를 떠날 때 나는 앞으로 바뀌어야 할
   많은 것들에 현기증과 동시에 강한 희망을 느꼈다. 맨살만 남은 황폐한 도덕의 땅에서 사체(死體)의 모양을
   따라 자라나며 황무지를 쓰다듬는 한 점 푸르른 땅, 즉 생명의 싹을 본 것이다. ...
   이념은 사라졌지만 그리스도인 신앙은 살아 남았다. 지금 교회는 무섭게 재기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는 한국, 중국, 아프리카, 러시아 같은 곳에 속한 것일지 모른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중에서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나 그것이 배를 건조한 목적은 아니다”(A ship in a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were built for.)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안전, 평안이나 생존이 우리 인생의 의미 있는 목적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해서 때로는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모험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현상유지(maintenance)가 아니라 모험(adventure)"인 까닭입니다(John C. Maxwell의 글 중에서).
우리의 교회나 개인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우리는 작은 배일 수도 있고 큰 배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배이건 작은 배이건 모든 배는 항해(航海)를 목적으로 건조된 것입니다. 그저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 같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The Perfect Storm」(완전한 폭풍)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고 귀환하던 어선(Andrea Gail)이 폭풍을 만나고 100피트(30미터)나 되는 거대한 파도와 싸움하는 것을 그린 영화입니다. 심한 풍랑과 싸우는 도중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결국에 커다란 파도에 삼키는 바 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지만 그들은 폭풍과 싸우는데 최선을 다하였으매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때로 교회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시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흩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교회에 어려움이 임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이는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니까,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의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게 하시고 그들을 모든 땅으로 흩으셨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찾아가서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오직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니까 집사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준비된 그릇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허무하게(?) 죽게 하시고 베드로를 투옥 당하게 하심으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더욱 더 흩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권능을 보이시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실어주시는 대신에 때로는 무기력한 죽임을 당케 하시며 박해와 흩어짐을 당케 하십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역은 결과적으로  더욱 크게 드러나며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2
다메섹에서의 바울의 개종과 아라비아에서의 준비와 다메섹 전도, 예루살렘 방문 등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의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20절에 기록된 15일간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 다음 21절에 나오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의 옮겨감을 기술함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은 고난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병행구절인 사도행전 9장 26-30절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움직임과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수리아(안디옥)와 길리기아(다소)로 옮겨가는 경로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9장 28-30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마음이 직선적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증거를 감당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은총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신상에 평안할 날이 없었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전심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21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에 십오 일만 머물려고 작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를 감당하고자 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으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동족인 유대인에게 더욱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유대인의 사역을 막으십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바울은 가이사랴를 거쳐서 안디옥(수리아)으로 피해갑니다. 이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러하지만 바울의 전도의 결실은 이방 지역에서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인 안디옥(Antioch)은 후에 바울의 세계선교의 기반이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을 보면,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을 지나 길리기아 다소(Tarsus)에 머물고 있을 때 바나바가 다소로 바울을 찾아와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오고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일 년간 머물면서 무리를 가르치고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리게된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요, 일꾼이요, 군병임을 인정하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입니다.
길리기아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주후 32년(또는 33년)경이고, 개종이후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이 삼년 뒤인 35년(또는 36년)경이고, 그가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이 47년경인 것으로 볼 때, 예루살렘을 떠난 그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보낸 햇수는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그의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만 오늘 본문의 간단한 언급 외에 다른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본격적인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를 훈련시키신 곳이 수리아와 길리기아입니다. 이곳에 십년을 머물며 전도하게 하심으로 더욱 큰 그릇으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다소에서 복음증거를 하게 하심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22-23절: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발 없는 말이 천리(千里)를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잔해했을 때에 그 소문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다메섹에까지 퍼졌었습니다(행전 9:13, 20-22, 26). 그런데, 이제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의 바울의 복음 전도의 사역이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나갑니다. 좋은 소식은 퍼지는 힘이 나쁜 소식 보다 약한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온 유대지역에 바울의 전도에 대해서 퍼진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왕성하게 복음을 증거한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의 체험이 크면 클수록 그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잔해하던 바울이었는데, 그가 변화되어서 잔해하던 사람들의 믿음을 전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모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변화가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는, 나같이 변변치 못하고 죄 많은 삶을 살아가던 자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톤(John Newton)의 묘비에는 그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간을, 올니 교회에서 무려 27년 간을 봉사했다.”

   24절: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의 말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며 영광을 가리울 때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생각--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의지(意志)와 신념(信念)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능력이 많은 일꾼이 될 수 있고, 전도의 놀라운 것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도 살 수 있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