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2, 2015

“하나님 앞에서 참말을 하노라” (갈 1:18-20)

“하나님 앞에서 참말을 하노라” (갈 1:18-20)
           
 
  1:18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尋訪)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1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까 참말을 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웅변적이거나 논리 정연하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가 하면, 말이 서투르거나 더듬는 사람은 참말을 거짓말처럼 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정치인들만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말을 잘함을 알게 됩니다.

지혜로운 세 사람에게 사람들이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을 (물론 사람이 감출 수 없는 분이지만) 감추어 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 지혜자가 “하나님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 감추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두 번째 지혜자는 언젠가는 우주선이 그 별에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발견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바다 속 깊은 곳에 감추자고 제안합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세 번째 지혜자는, 무수한 세상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바다 속 깊은 곳에까지 식량을 재배해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발견될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는 그가 생각해낸 방법을 제안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나님을 감출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사람의 마음 속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을 감춘다면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fable)입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자신들의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시고 또한 세상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인정할진데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에 진지하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을 보낸 후에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그곳에서 게바와 “주의 형제” 야고보와 기타의 제자들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후에, 유대주의 반대파들은 이 일을 들춰내어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웁니다. 그가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로써 복음을 전수받았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주장합니다. 기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요 가르침을 받은 바라고 주장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사도들이 전하는 것과 비슷한 것같으면서도 교묘하게 다르며, 바울은 이 비슷한 것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그의 복음만을 참복음이라고 전하는 거짓말쟁이요 사깃꾼이라고 중상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비방과 중상에 대하여 바울은 입을 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이 되고 그리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가 아닌 말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참말인 바울의 가르침을 거짓으로 여기고 이에서 떠날 것이기에 입을 열어 이에 대하여 자신을 변론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그가 예수님을 믿은 지 삼 년 뒤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과 기타 그의 신상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복음의 내용과 증거에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도 방문하지 않은 양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도 받지 않은 양한다고 하기에 이제 그 문제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18절: 그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尋訪)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삼 년을 머물던 바울이 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정해 보면,  첫 번째 이유는 다메섹 전도가 벽에 부딛혔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라비아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온 바울은 기쁨과 담대함으로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전도가 얼마나 소동거리가 되었는지 정부에서 그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다메섹 전도경험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5절에는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을 빠져나온 바울로서는 달리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끌고 가기 위해서 이 다메섹으로 향하기 전에 머물던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다메섹 성을 탈출한 바울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복음 증거를 더욱 신명나고 감격으로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그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계시를 받은 즉시 가지 않은 것은 바울 스스로 그 계시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온 것이며 복음의 핵심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함이며 그 계시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과 계시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다지고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자신은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을 사용하면서(1:1) 이에 상응하는 시몬의 이름 ‘베드로’ 대신에 그의 아람어 이름인 ‘게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게바--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요 자신은 헬라인을 포함한 이방인들의 사도임을 드러내고자 함 같습니다.

“게바를 심방한” 의도는 그가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가장 열심으로 주님을 따라다닌 사람이기에 그로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듣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에 대하여 전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던 바울인 터라 게바의 이야기를 듣고 그 복음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포기하려고 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보다 더 생동감 있게 증거하기 위하여 공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듣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게바와 함께 보낸 날수가 십오 일”이라고 했습니다.
“십오 일”은 한 사람이 제자가 되기에는 턱 없이 짧은 날수입니다. 여기서 날수를 언급함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게바에게서 배운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바울의 마음이 아픕니다.
그 자신만의 바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자고 먹고 여행하면서 그의 말씀하시는 바를 들은 게바와의 교제가 참으로 귀하고 할 수만 있으면 몇 달이라도 같이 머물면서 그가 경험한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듣기를 원한 바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는 게바와 같이 보낸 시간과 교제가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깎아 내리기 위한 반대파의 주장에 악용되고 있습니다.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의 증언을 보면, 바울이 다메섹 경험 이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이후에는 제자들과 교제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함은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닌 요한이나 그의 형제 야고보나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닌 제자들로서) 다른 사도들을 만나고 사귈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함이 여기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변론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의 복음에 관하여 조금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경험한 적이 없는 바울 개인으로서는 게바 이외에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도들과 접촉함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것에 관하여 들을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오해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이 사도행전 9장 27절의 기술과 엇갈리는 것같습니다. 거기에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9절에서 말씀하는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가리킴이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복음 전파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일반화된 의미로서)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이와같은 표현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삼 년밖에 안된 바울이 만난 “주의 형제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행전 12:2)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육적 동생(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입니다. 그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경력면에서 바울보다 크게 앞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적 동생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야고보, 유다, 요세, 시므온 등입니다. 그 중에 야고보가 가장 뛰어난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는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예수님)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7장 5절에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지 않던 예수님의 육적 형제들이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인 다른 사도들보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경험과 믿음이 일천하며 늦게 믿음의 삶을 시작한 야고보였지만 그로부터 십사 년이 지난 뒤에 바울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여 만난 야고보는 모든 사도들 위에서 그들을 지시하고 중요한 안건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예루살렘 공회장이 되어 있었습니다(행전 15:13-21; 갈 2:9). 1-2세기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그에게 보고하며 그의 지시를 따랐음을 알게 됩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다른 사도들 위에 이러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의 육적 동생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으로 향한 끊임없는 간구와 기도,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사랑하는 헌신과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기도를 특별히 열심히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지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하나님께 오래 무릎꿇고 기도함을 낙타무릎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고 야고보만 만났다고 하는 것은 그당시의 (믿음이 일천한) 야고보를 만남은 (반대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복음의 가르침을 얻고 그들의 제자됨과는 거리가 먼 일이기 때문입니다.

18-1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된지 삼년 뒤에 있었던 그의 예루살렘 방문이 그가 현재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그의 가르침과는 크게 연관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접 제자들인 사도들 중에는 오직 베드로만을 만났는데 그와는 같이 있은 날수가 십오 일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반대파들이 그를 통하여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함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밖에는 예수님의 육적 동생 야고보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당시의 야고보는 바울에게 무엇을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론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편치 못함은, 그의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님을 역설하기 위하여(1:12) 베드로나 기타 사도들과의 만남과 교제도 제한적으로 기술해야 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말해야 함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그에게 더욱 활력과 감격을 제공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1:1),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1:11),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이 아니라(1:12)는 그의 진술은 참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변화된지 삼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같이 유함은 십오 일에 불과하였고 이 베드로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서술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를 통하여서도 어떤 것도 전해받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참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인터넷 서점의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회지의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되고 널리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세상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고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으로 (사실이 그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여러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 되셔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라는 등의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14-15절에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 1장 9절에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장 23절에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했고,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했고 2장 10절에서는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2장 7절에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그가 참말을 말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강조함은 그만큼 그의 세대가 거짓과 진리가 구별되지 않던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무명의 크리스천 시인은 우리 진실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나, 당신이 말할 때나, 당신이 읽을 때나, 당신이 쓸 때나,
           당신이 노래할 때나, 당신이 걸을 때나, 당신이 기쁨을 구할 때나,
           집 안에서와 밖에서 모든 잘못된 것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 있는 듯이 그렇게 생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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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우리가 부인(否認)하고 싶어도 거짓이 만연(蔓延)되어 있는 곳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참말을 말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느 사람들의 거짓말과 구별되지 않고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세상사람들이 나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함으로 인하여서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내가 비방꺼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참말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스스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와 백성의 진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전파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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