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지 않은 달음질” (갈 2:1-5)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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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악기 연주자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서는 연주회에 앞서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부단하고 반복되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는 그가 피나게 준비한 곡들을 우아하고 자신에 넘치는 모습으로 잘 연주해냅니다. 이렇게 할 때, 그의 모든 준비과정과 그의 연주자로서의 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자질이 있고 고된 연습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연주회를 앞두고 병이 난다면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상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준비하는 선수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가 출전하는 경기에만 몰입합니다. 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 그가 좋아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경기에 출전하여서는 규칙에 따라 경주하여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규칙에 어긋나게 약물을 복용하거나, 트랙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거나, 또 다른 모양으로 규칙을 어기면 그의 모든 재능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한 연주자로서, 한 선수로서, 한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경주하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포기하고 희생할 것들이 큽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음의 경주와 또 그 훈련과정이 이와 같다면, 아니 이러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님으로 향한 꾸준함이 있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경주도 헛된 달음질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삼 년의 세월을 아라비아의 사막과 다메섹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로써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준비하고, 전도자의 출발을 하였습니다(갈 1:17).
삼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게바를 만나 예수님에 관하여 좀더 알기를 원하였고 그곳에 머물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증거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그는 이를 피하여 수리아의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그의 고향이었던 길리기아의 닷소에까지 이릅니다(갈 1:21). 그 과정에서 그는 꾸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고향 닷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을 받은 바나바가 안디옥을 거쳐서 사울을 찾으러 닷소에까지 오고 그들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는데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전 11:22-26).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갈라디아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감당하고 돌아옵니다.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십사 년 후”라고 함은 바울이 게바를 만나기 위하여 일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후 십사 년이 경과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 기간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별도로 나름대로 주님과 교통하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바나바)의 복음증거와 사역에 대하여 그가 정해진 규칙의 한계 밖에서 복음을 증거한다는 중상과 비방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이에 대한 변론 겸 그의 사역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사도행전 15장 1-2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고 했고, 계속해서 4-5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라고 함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그 자신에 대한 비방을 변론하기 위하여 임의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매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곧,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바리새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주장하는 할례나 모세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상하는 자의 입을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은 도무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하여 비방꺼리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 지킴이 구원의 요건이 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만일 할례나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헛것이요 구원의 어려움에 또 한 가지 어려움을 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변론하기 위하여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privately)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자들이란 예루살렘 공회에서 기둥처럼 여기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복음증거에 대한 전체적인 보고형식으로 하고,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이들 유명한 자들 앞에서 사사로이 한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와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그의 반대자들에 의한 소요로 말미암아 올바른 변론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의 복음을 인정하여 줄 때,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유대주의 크리스천들도 그들이 지지하는 복음의 내용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의 운영(특별히 장로교회들)도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당회가 결정하는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막바로 교인 전체의 의견이나 결정을 물을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은혜스러운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이로써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열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1:11),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1:12), 왜 예루살렘 공회의 기둥같은 사도들의 인정함이 필요합니까?
바울 자신은 그가 증거하는 복음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요 따라서 그 내용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음을 확신하지만, 만일에 그 당시 옳고 그름의 판단자인 사도들의 판정이 교회의 질서와 사람들 사이에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에 그들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그가 이제까지 복음 증거자로서 달음질한 것이 헛 것이요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 헛될 수 있음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이단(異端) 판정을 받은 목사님들의 사역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설령 그분은 자신의 설교의 내용과 사역에 대하여 전혀 거리낄 것이 없지만, 이단의 문제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거리낌을 주고 따라서 그 교회로 향한 발걸음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증거자로서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달음질하는 경주에 종종 비유합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달음질하는 경주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경주자가 헛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로써 믿는 자의 구원과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규정대로 경주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경주한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도 이르지 못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교회가 필요하고 교회에 목회자가 있는 것은 각 성도의 달음질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규정이 무엇이며 그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고 그의 달음질을 권장하기 위함입니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할 때 디도를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고 안 받음이 바울에게 그렇게 커다란 문제꺼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유대주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주목함도 있고 하여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함도 그 긴박한 상황을 무마함의 한 방편이 되려만 바울은 디도를 억지로 권하여 할례를 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 대치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지만, 구원을 위하여 할례와 율법의 효력성을 부인하는 바울의 복음은 그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한 표시로 헌신(獻身)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헌신도 구원을 위한 요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더욱이 믿음의 표증인 마음으로부터의 헌신이 결여된 외형상의 헌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神靈)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디도로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은 이유로 바울의 행동을 엿보고자 하는 거짓 형제--거짓 크리스천들을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람의 의견이나 비방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주신 자유와 확신과 담대함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만일 디도가 그 스스로 원함이 있었다면 할례를 받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바울 스스로가 그를 엿보는 거짓 형제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형제 디도의 자유를 제한시키고자 함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조하는 바울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아울러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사단의 종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종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의로와지고 구원받음이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는 구원에 이를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자로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고 기뻐서 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헌신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것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도 아니요, 목사님이 강압적인 설교로서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큰 일 날 것처럼 말씀해서도 아니요, 나의 기쁘고 자발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이것이 종이 아닌 자유자의 즐거움이 넘치며 건전한 신앙의 삶의 모습입니다.
5절: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엿보는 자에게 눈치가 보여서 헬라인 디도를 할례 받게 하였다면 이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율법주의에는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전하고 그가 지키는 복음의 내용과 진리가 항상 빛을 잃지 않게 하기를 원함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와 진리 지키는 자를 넘어뜨리고자 크고 중요한 문제를 갖고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쯤 무시해도 좋을 문제, 흔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갖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단은 이 일을 빌미 삼아서 다음 번에는 좀더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믿는 사람을 미혹합니다. “너 지난번에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 줄 아니? 아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안 된다고 그래? 지난번에 그 일이나 이 일이나 안 되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나, 염려할 것 없어. 너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인데, 이번 한 번만 더 하는 것 큰 문제 아니야. 한 번 더 한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다음 번부터 안 하면 되잖아. 다음 번에는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나도 너를 그냥 내버려둘게.”라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여 작은 일에서 그의 믿는 바 진리를 저버린 사람은 다음 번에도, 그 다음 번에도 동일한 미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3
바울은 그의 전하는 복음과 복음의 진리가 온전히 전파되고 지켜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되 그 일이 그에게나 그의 동역자들에게 억지가 아니라 자유와 기쁨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달려가는 경주자로서 그의 달음질이 헛되이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더욱 더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의 일생이 경주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경주할 때 향방 없는 자같이 아니할 것이며, 우리의 푯대를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가 기쁘고 자유하는 자의 경주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속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