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2, 2015

“헛되지 않은 달음질” (갈 2:1-5)


“헛되지 않은 달음질” (갈 2:1-5)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1
어떤 악기 연주자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서는 연주회에 앞서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부단하고 반복되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는 그가 피나게 준비한 곡들을 우아하고 자신에 넘치는 모습으로 잘 연주해냅니다. 이렇게 할 때, 그의 모든 준비과정과 그의 연주자로서의 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자질이 있고 고된 연습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연주회를 앞두고 병이 난다면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상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준비하는 선수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가 출전하는 경기에만 몰입합니다. 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 그가 좋아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경기에 출전하여서는 규칙에 따라 경주하여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규칙에 어긋나게 약물을 복용하거나, 트랙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거나, 또 다른 모양으로 규칙을 어기면 그의 모든 재능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한 연주자로서, 한 선수로서, 한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경주하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포기하고 희생할 것들이 큽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음의 경주와 또 그 훈련과정이 이와 같다면, 아니 이러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님으로 향한 꾸준함이 있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경주도 헛된 달음질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삼 년의 세월을 아라비아의 사막과 다메섹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로써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준비하고, 전도자의 출발을 하였습니다(갈 1:17).
삼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게바를 만나 예수님에 관하여 좀더 알기를 원하였고 그곳에 머물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증거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그는 이를 피하여 수리아의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그의 고향이었던 길리기아의 닷소에까지 이릅니다(갈 1:21). 그 과정에서 그는 꾸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고향 닷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을 받은 바나바가 안디옥을 거쳐서 사울을 찾으러 닷소에까지 오고 그들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는데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전 11:22-26).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갈라디아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감당하고 돌아옵니다.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십사 년 후”라고 함은 바울이 게바를 만나기 위하여 일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후 십사 년이 경과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 기간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별도로 나름대로 주님과 교통하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바나바)의 복음증거와 사역에 대하여 그가 정해진 규칙의 한계 밖에서 복음을 증거한다는 중상과 비방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이에 대한 변론 겸 그의 사역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사도행전 15장 1-2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고 했고, 계속해서 4-5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라고 함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그 자신에 대한 비방을 변론하기 위하여 임의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매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곧,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바리새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주장하는 할례나 모세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상하는 자의 입을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은 도무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하여 비방꺼리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 지킴이 구원의 요건이 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만일 할례나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헛것이요 구원의 어려움에 또 한 가지 어려움을 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변론하기 위하여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privately)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자들이란 예루살렘 공회에서 기둥처럼 여기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복음증거에 대한 전체적인 보고형식으로 하고,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이들 유명한 자들 앞에서 사사로이 한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와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그의 반대자들에 의한 소요로 말미암아 올바른 변론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의 복음을 인정하여 줄 때,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유대주의 크리스천들도 그들이 지지하는 복음의 내용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의 운영(특별히 장로교회들)도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당회가 결정하는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막바로 교인 전체의 의견이나 결정을 물을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은혜스러운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이로써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열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1:11),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1:12), 왜 예루살렘 공회의 기둥같은 사도들의 인정함이 필요합니까?
바울 자신은 그가 증거하는 복음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요 따라서 그 내용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음을 확신하지만, 만일에 그 당시 옳고 그름의 판단자인 사도들의 판정이 교회의 질서와 사람들 사이에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에 그들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그가 이제까지 복음 증거자로서 달음질한 것이 헛 것이요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 헛될 수 있음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이단(異端) 판정을 받은 목사님들의 사역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설령 그분은 자신의 설교의 내용과 사역에 대하여 전혀 거리낄 것이 없지만, 이단의 문제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거리낌을 주고 따라서 그 교회로 향한 발걸음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증거자로서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달음질하는 경주에 종종 비유합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달음질하는 경주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경주자가 헛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로써 믿는 자의 구원과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규정대로 경주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경주한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도 이르지 못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교회가 필요하고 교회에 목회자가 있는 것은 각 성도의 달음질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규정이 무엇이며 그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고 그의 달음질을 권장하기 위함입니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할 때 디도를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고 안 받음이 바울에게 그렇게 커다란 문제꺼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유대주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주목함도 있고 하여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함도 그 긴박한 상황을 무마함의 한 방편이 되려만 바울은 디도를 억지로 권하여 할례를 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 대치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지만, 구원을 위하여 할례와 율법의 효력성을 부인하는 바울의 복음은 그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한 표시로 헌신(獻身)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헌신도 구원을 위한 요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더욱이 믿음의 표증인 마음으로부터의 헌신이 결여된 외형상의 헌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神靈)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디도로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은 이유로 바울의 행동을 엿보고자 하는 거짓 형제--거짓 크리스천들을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람의 의견이나 비방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주신 자유와 확신과 담대함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만일 디도가 그 스스로 원함이 있었다면 할례를 받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바울 스스로가 그를 엿보는 거짓 형제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형제 디도의 자유를 제한시키고자 함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조하는 바울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아울러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사단의 종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종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의로와지고 구원받음이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는 구원에 이를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자로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고 기뻐서 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헌신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것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도 아니요, 목사님이 강압적인 설교로서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큰 일 날 것처럼 말씀해서도 아니요, 나의 기쁘고 자발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이것이 종이 아닌 자유자의 즐거움이 넘치며 건전한 신앙의 삶의 모습입니다.

   5절: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엿보는 자에게 눈치가 보여서 헬라인 디도를 할례 받게 하였다면 이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율법주의에는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전하고 그가 지키는 복음의 내용과 진리가 항상 빛을 잃지 않게 하기를 원함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와 진리 지키는 자를 넘어뜨리고자 크고 중요한 문제를 갖고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쯤 무시해도 좋을 문제, 흔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갖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단은 이 일을 빌미 삼아서 다음 번에는  좀더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믿는 사람을 미혹합니다. “너 지난번에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 줄 아니? 아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안 된다고 그래? 지난번에 그 일이나 이 일이나 안 되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나, 염려할 것 없어. 너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인데, 이번 한 번만 더 하는 것 큰 문제 아니야. 한 번 더 한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다음 번부터 안 하면 되잖아. 다음 번에는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나도 너를 그냥 내버려둘게.”라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여 작은 일에서 그의 믿는 바 진리를 저버린 사람은 다음 번에도, 그 다음 번에도 동일한 미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3
바울은 그의 전하는 복음과 복음의 진리가 온전히 전파되고 지켜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되 그 일이 그에게나 그의 동역자들에게 억지가 아니라 자유와 기쁨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달려가는 경주자로서 그의 달음질이 헛되이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더욱 더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의 일생이 경주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경주할 때 향방 없는 자같이 아니할 것이며, 우리의 푯대를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가 기쁘고 자유하는 자의 경주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속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1
제가 아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님이 현지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교회 건물을 짓다가 겪은 어려움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공사 현장에 매일 주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교회 짓는 일을 방해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이들에게 시달리다 못한 선교사님은 무슨 수를 내야 되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들을 처리 좀 해달라고 떼를 써보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그들과 부딪혀보기로 작정합니다. 해서, 어느 날 그들이 나타나자 그 가운데 가장 힘이 세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담판을 짓습니다. “당신이 나를 힘껏 때려서 내가 쓰러지면 당신들의 요구대로 따르겠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지 말라고 하면 짓지 않을 것이요,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힘껏 쳤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로 버티면 앞으로는 우리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과연 이 불량배들이 흥미로와합니다. ‘감히 겁도 없이 내 주먹을 맞아보겠다고...’ 하며 그 불량배들의 두목 격으로 보이는 사람은 실실 웃으면서 이 선교사님이 내건 조건에 순순히 응합니다. 선교사님은 맞을 준비를 하고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저 불량배의 주먹에 맞을 터인데 하나님의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힘 세 보이는 불량배가 선교사님의 배를 겨냥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일격을 가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선교사님은 맞은 것 같지도 않게 끄떡없이 버티고 서있는데 일격을 가한 그 두목은 ‘어이쿠’ 외마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나가 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선교사님의 복부를 강철같이 단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는 공사 현장에 불량배들이 얼씬도 하지 않게 되고, 선교사님은 교회를 아름답게 완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십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 -)의 ‘러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글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은혜에 굶주린 국민을 보았다. ... 러시아의 보통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도는 것이 꼭 매맞은 어린아이 같았다. ... (그러나) 러시아를 떠날 때 나는 앞으로 바뀌어야 할
   많은 것들에 현기증과 동시에 강한 희망을 느꼈다. 맨살만 남은 황폐한 도덕의 땅에서 사체(死體)의 모양을
   따라 자라나며 황무지를 쓰다듬는 한 점 푸르른 땅, 즉 생명의 싹을 본 것이다. ...
   이념은 사라졌지만 그리스도인 신앙은 살아 남았다. 지금 교회는 무섭게 재기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는 한국, 중국, 아프리카, 러시아 같은 곳에 속한 것일지 모른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중에서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나 그것이 배를 건조한 목적은 아니다”(A ship in a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were built for.)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안전, 평안이나 생존이 우리 인생의 의미 있는 목적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해서 때로는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모험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현상유지(maintenance)가 아니라 모험(adventure)"인 까닭입니다(John C. Maxwell의 글 중에서).
우리의 교회나 개인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우리는 작은 배일 수도 있고 큰 배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배이건 작은 배이건 모든 배는 항해(航海)를 목적으로 건조된 것입니다. 그저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 같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The Perfect Storm」(완전한 폭풍)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고 귀환하던 어선(Andrea Gail)이 폭풍을 만나고 100피트(30미터)나 되는 거대한 파도와 싸움하는 것을 그린 영화입니다. 심한 풍랑과 싸우는 도중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결국에 커다란 파도에 삼키는 바 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지만 그들은 폭풍과 싸우는데 최선을 다하였으매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때로 교회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시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흩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교회에 어려움이 임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이는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니까,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의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게 하시고 그들을 모든 땅으로 흩으셨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찾아가서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오직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니까 집사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준비된 그릇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허무하게(?) 죽게 하시고 베드로를 투옥 당하게 하심으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더욱 더 흩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권능을 보이시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실어주시는 대신에 때로는 무기력한 죽임을 당케 하시며 박해와 흩어짐을 당케 하십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역은 결과적으로  더욱 크게 드러나며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2
다메섹에서의 바울의 개종과 아라비아에서의 준비와 다메섹 전도, 예루살렘 방문 등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의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20절에 기록된 15일간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 다음 21절에 나오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의 옮겨감을 기술함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은 고난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병행구절인 사도행전 9장 26-30절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움직임과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수리아(안디옥)와 길리기아(다소)로 옮겨가는 경로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9장 28-30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마음이 직선적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증거를 감당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은총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신상에 평안할 날이 없었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전심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21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에 십오 일만 머물려고 작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를 감당하고자 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으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동족인 유대인에게 더욱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유대인의 사역을 막으십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바울은 가이사랴를 거쳐서 안디옥(수리아)으로 피해갑니다. 이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러하지만 바울의 전도의 결실은 이방 지역에서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인 안디옥(Antioch)은 후에 바울의 세계선교의 기반이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을 보면,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을 지나 길리기아 다소(Tarsus)에 머물고 있을 때 바나바가 다소로 바울을 찾아와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오고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일 년간 머물면서 무리를 가르치고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리게된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요, 일꾼이요, 군병임을 인정하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입니다.
길리기아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주후 32년(또는 33년)경이고, 개종이후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이 삼년 뒤인 35년(또는 36년)경이고, 그가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이 47년경인 것으로 볼 때, 예루살렘을 떠난 그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보낸 햇수는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그의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만 오늘 본문의 간단한 언급 외에 다른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본격적인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를 훈련시키신 곳이 수리아와 길리기아입니다. 이곳에 십년을 머물며 전도하게 하심으로 더욱 큰 그릇으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다소에서 복음증거를 하게 하심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22-23절: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발 없는 말이 천리(千里)를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잔해했을 때에 그 소문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다메섹에까지 퍼졌었습니다(행전 9:13, 20-22, 26). 그런데, 이제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의 바울의 복음 전도의 사역이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나갑니다. 좋은 소식은 퍼지는 힘이 나쁜 소식 보다 약한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온 유대지역에 바울의 전도에 대해서 퍼진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왕성하게 복음을 증거한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의 체험이 크면 클수록 그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잔해하던 바울이었는데, 그가 변화되어서 잔해하던 사람들의 믿음을 전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모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변화가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는, 나같이 변변치 못하고 죄 많은 삶을 살아가던 자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톤(John Newton)의 묘비에는 그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간을, 올니 교회에서 무려 27년 간을 봉사했다.”

   24절: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의 말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며 영광을 가리울 때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생각--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의지(意志)와 신념(信念)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능력이 많은 일꾼이 될 수 있고, 전도의 놀라운 것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말을 하노라” (갈 1:18-20)

“하나님 앞에서 참말을 하노라” (갈 1:18-20)
           
 
  1:18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尋訪)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1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까 참말을 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웅변적이거나 논리 정연하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가 하면, 말이 서투르거나 더듬는 사람은 참말을 거짓말처럼 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정치인들만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짓말을 잘함을 알게 됩니다.

지혜로운 세 사람에게 사람들이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을 (물론 사람이 감출 수 없는 분이지만) 감추어 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 지혜자가 “하나님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 감추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두 번째 지혜자는 언젠가는 우주선이 그 별에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발견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바다 속 깊은 곳에 감추자고 제안합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세 번째 지혜자는, 무수한 세상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바다 속 깊은 곳에까지 식량을 재배해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발견될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는 그가 생각해낸 방법을 제안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나님을 감출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사람의 마음 속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을 감춘다면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fable)입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자신들의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시고 또한 세상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인정할진데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에 진지하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을 보낸 후에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그곳에서 게바와 “주의 형제” 야고보와 기타의 제자들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후에, 유대주의 반대파들은 이 일을 들춰내어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웁니다. 그가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로써 복음을 전수받았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주장합니다. 기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요 가르침을 받은 바라고 주장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사도들이 전하는 것과 비슷한 것같으면서도 교묘하게 다르며, 바울은 이 비슷한 것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그의 복음만을 참복음이라고 전하는 거짓말쟁이요 사깃꾼이라고 중상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비방과 중상에 대하여 바울은 입을 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이 되고 그리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가 아닌 말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참말인 바울의 가르침을 거짓으로 여기고 이에서 떠날 것이기에 입을 열어 이에 대하여 자신을 변론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제까지 그가 예수님을 믿은 지 삼 년 뒤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과 기타 그의 신상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복음의 내용과 증거에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도 방문하지 않은 양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도 받지 않은 양한다고 하기에 이제 그 문제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18절: 그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尋訪)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삼 년을 머물던 바울이 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정해 보면,  첫 번째 이유는 다메섹 전도가 벽에 부딛혔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라비아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온 바울은 기쁨과 담대함으로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의 전도가 얼마나 소동거리가 되었는지 정부에서 그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다메섹 전도경험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3-25절에는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을 빠져나온 바울로서는 달리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끌고 가기 위해서 이 다메섹으로 향하기 전에 머물던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다메섹 성을 탈출한 바울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복음 증거를 더욱 신명나고 감격으로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그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계시를 받은 즉시 가지 않은 것은 바울 스스로 그 계시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온 것이며 복음의 핵심인 것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함이며 그 계시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과 계시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다지고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자신은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을 사용하면서(1:1) 이에 상응하는 시몬의 이름 ‘베드로’ 대신에 그의 아람어 이름인 ‘게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게바--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요 자신은 헬라인을 포함한 이방인들의 사도임을 드러내고자 함 같습니다.

“게바를 심방한” 의도는 그가 예수님의 삼 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가장 열심으로 주님을 따라다닌 사람이기에 그로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듣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에 대하여 전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던 바울인 터라 게바의 이야기를 듣고 그 복음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포기하려고 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보다 더 생동감 있게 증거하기 위하여 공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듣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게바와 함께 보낸 날수가 십오 일”이라고 했습니다.
“십오 일”은 한 사람이 제자가 되기에는 턱 없이 짧은 날수입니다. 여기서 날수를 언급함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게바에게서 배운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바울의 마음이 아픕니다.
그 자신만의 바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자고 먹고 여행하면서 그의 말씀하시는 바를 들은 게바와의 교제가 참으로 귀하고 할 수만 있으면 몇 달이라도 같이 머물면서 그가 경험한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듣기를 원한 바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는 게바와 같이 보낸 시간과 교제가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깎아 내리기 위한 반대파의 주장에 악용되고 있습니다.

   19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의 증언을 보면, 바울이 다메섹 경험 이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이후에는 제자들과 교제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함은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닌 요한이나 그의 형제 야고보나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닌 제자들로서) 다른 사도들을 만나고 사귈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함이 여기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변론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의 복음에 관하여 조금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경험한 적이 없는 바울 개인으로서는 게바 이외에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도들과 접촉함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것에 관하여 들을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오해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주장이 사도행전 9장 27절의 기술과 엇갈리는 것같습니다. 거기에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9절에서 말씀하는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가리킴이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복음 전파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일반화된 의미로서)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이와같은 표현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삼 년밖에 안된 바울이 만난 “주의 형제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행전 12:2)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육적 동생(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입니다. 그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경력면에서 바울보다 크게 앞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적 동생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야고보, 유다, 요세, 시므온 등입니다. 그 중에 야고보가 가장 뛰어난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는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예수님)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7장 5절에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지 않던 예수님의 육적 형제들이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인 다른 사도들보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경험과 믿음이 일천하며 늦게 믿음의 삶을 시작한 야고보였지만 그로부터 십사 년이 지난 뒤에 바울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여 만난 야고보는 모든 사도들 위에서 그들을 지시하고 중요한 안건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예루살렘 공회장이 되어 있었습니다(행전 15:13-21; 갈 2:9). 1-2세기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그에게 보고하며 그의 지시를 따랐음을 알게 됩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다른 사도들 위에 이러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의 육적 동생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하나님으로 향한 끊임없는 간구와 기도,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사랑하는 헌신과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기도를 특별히 열심히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지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하나님께 오래 무릎꿇고 기도함을 낙타무릎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고 야고보만 만났다고 하는 것은 그당시의 (믿음이 일천한) 야고보를 만남은 (반대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복음의 가르침을 얻고 그들의 제자됨과는 거리가 먼 일이기 때문입니다.

18-1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된지 삼년 뒤에 있었던 그의 예루살렘 방문이 그가 현재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과 그의 가르침과는 크게 연관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접 제자들인 사도들 중에는 오직 베드로만을 만났는데 그와는 같이 있은 날수가 십오 일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반대파들이 그를 통하여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함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밖에는 예수님의 육적 동생 야고보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당시의 야고보는 바울에게 무엇을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론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편치 못함은, 그의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님을 역설하기 위하여(1:12) 베드로나 기타 사도들과의 만남과 교제도 제한적으로 기술해야 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말해야 함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그에게 더욱 활력과 감격을 제공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1:1),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1:11),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이 아니라(1:12)는 그의 진술은 참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변화된지 삼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같이 유함은 십오 일에 불과하였고 이 베드로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서술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를 통하여서도 어떤 것도 전해받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참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라틴어로는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데, 인터넷 서점의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청년회지의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되고 널리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은 우리는 마음과 말과 행동과 삶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무소부재하셔서 모든 세상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고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모습으로 (사실이 그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여러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 되셔서,”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라는 등의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9절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3장 14-15절에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 1장 9절에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장 23절에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했고,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했고 2장 10절에서는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2장 7절에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그가 참말을 말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강조함은 그만큼 그의 세대가 거짓과 진리가 구별되지 않던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무명의 크리스천 시인은 우리 진실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나, 당신이 말할 때나, 당신이 읽을 때나, 당신이 쓸 때나,
           당신이 노래할 때나, 당신이 걸을 때나, 당신이 기쁨을 구할 때나,
           집 안에서와 밖에서 모든 잘못된 것을 피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 있는 듯이 그렇게 생활하십시오.

                                                               3    
이 세상은 우리가 부인(否認)하고 싶어도 거짓이 만연(蔓延)되어 있는 곳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때로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참말을 말하여도 참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느 사람들의 거짓말과 구별되지 않고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세상사람들이 나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함으로 인하여서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고 내가 비방꺼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참말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스스로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와 백성의 진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전파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