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고린도후서 13:11-13)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고린도후서 13:11-13)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갈등을 경험한 사람들이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끼리만 모여 교회생활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잘 될 것 같아 한국에 평신도교회를 유행처럼 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목회자보다 성경적 지식이 없으란 법이 없고, 성경연구야 굳이 신학교에 가지 않고도 독학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평신도가 목회자보다 기도를 못하란 법이 없습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무릎을 꿇다 보면 목회자보다 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축도권이 없습니다. 시원찮은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안수를 받은 목사인 한에 있어서는 축도권이 있는데, 아무리 기도를 잘하고 성경에 통달한 평신도(장로나 집사)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축도권이 없습니다. 목회자로 인하여 심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따로 교회를 세운 터라 그깟(?) 축도권쯤 없으면 어떠랴 하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곤 하는데, 한동안은 그런 대로 견디어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예배를 마무리한 것 같지 않고, 드린 것 같지 않아 평신도교회의 유행은 잠시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아직 목사안수를 받기 전 상태인 전도사로서 교회를 사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도 축도의 권한이 그에게 없습니다. 축도권은 세례·성찬을 주관하는 권한과 함께 안수 받은 목사에게 부여된 독특한 권한입니다. 목회자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중을 축복할 때 그 기원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치려고 하매, 몇 가지로 더 권면의 말씀을 하고, 사도의 축도권을 활용하여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말썽도 많고 탈도 많으나 그가 매우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2
11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살펴보고 확증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를 권고합니다.
“기뻐하라”(χαίρετε)고 합니다. 성도의 표된 것 중에 두드러진 것이 그의 삶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 전도여행을 하고 때로는 반대에 부딪히고 비난꺼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을 늘 표현하기를 원했고 또한 그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기뻐할 것을 늘 권면합니다. 바울의 서신 도처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쁨의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반복적으로 기뻐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했고, 1장 18절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고, 2장 17-18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고, 2장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했고, 3장 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기뻐하라“)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했고,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기뻐함은 기도함과 감사함과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곧, 기뻐함과 기도함과 감사함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성도의 표가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있으니 죄짓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의 기뻐함이 중요합니다. 이는 성도의 기뻐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케 되라”(καταρτίζεσθε)고 말씀합니다.
“잘못을 고치고”(mend) “온전을 향하여 노력하라”(strive for perfection, make complete)는 권면입니다. ‘나는 이대로 괜찮습니다. 나에게 설교하지 말아요. 나는 고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결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바른 지적에 귀를 기울이고,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 하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끊임없이 바로 잡고자 하는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온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온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온전하여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온전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사람인가’ 발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치 못함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온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위로를 받으라”(παρακαλείσθε)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죄와 허물의 문제에 대해서, 고통과 환난과 슬픔에 대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것 괜찮아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요”라고 하는 사람의 말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자복하는 세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함께 하심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 간구하는 자의 슬픔과 고통을 모른 척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시편 30편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라”(τὸ αὐτὸ φρονείτε)고 권면합니다.
헬라어 프로네오(φρονέω)는 ‘생각하다, 마음을 갖다, 마음을 품다(think, have in mind)’의 뜻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로서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시끄러운 잡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뒤로 가거나 옆으로 가기가 십상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τὸ αὐτὸ φρονήτε)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하다”란 말은 달리 표현하면 “동일한 마음을 품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품어야할 “동일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τούτο φρονείτε ἐν ὑμίν)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함”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인데, 이러할 때 그들은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행동하며 각자의 죄된 자아(自我)가 여전히 펄쩍펄쩍 뛸 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평안하라”(εἰρηνεύετε)고 권면합니다.
불화와 다툼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사도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신 평안(평화 또는 화평)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어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그러나 곧 잃을까봐 불안한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보장받은 자의, 동록이나 도둑이 침입할 수 없는 하늘창고에 보화를 쌓는 사람의 뿌듯하고 영속적인 마음의 평안입니다.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그 가운데 갖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천국 백성의 평안입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든든함이 없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불안하여 함은 하나님께서 혹 안 계신 것이 아닌가 또는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험한 산길을 갈 때에나 깊은 골짜기를 갈 때에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만 한다면 이 사람은 불안하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쫓김과 고통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언합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합니다.
 “거룩한 입맞춤”(holy kiss)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인사법이었습니다(고전 16:20). 처음에는 남녀 가리지 않고 행하다가, 후에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행하다가, 더 후에는 악수로 대체되어졌습니다.
성도간에 서로 문안함은 다른 성도의 필요가 무엇인지, 형편이 어떠한지 아는 방법이며 이로써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마땅히 할 바는 자기만 위하지 아니하고 남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필요를 보충하여주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의 “모든 성도”는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마게도냐 지방의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한번도 고린도 교인들을 본 적이 없지만 한분 하나님 안에 거하고 동일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에 이른 형제·자매로서 성도들의 문안과 영적인 교제는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함으로써 편지를 마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도 대제사장들이 축도를 하였는데, 그 축도의 전형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즉,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머물게 된 신약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도는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본 절은 바울의 서신들에 등장하는 축도들 가운데 가장 온전한 형태로서 현대 대부분의 교회들의 목사님들의 축도의 전형입니다. 축도의 제일 먼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축도는 바울의 모든 서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했고, 고린도전서 16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했고, 갈라디아서 6장 18절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했고, 에베소서 6장 2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고 했고, 빌립보서 4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6장 21절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22절에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디도서 3장 15절에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빌레몬서 1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은혜(χάρις)는 나의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용서와 선물을 체험케 하는 선하시고 친절하신 뜻(grace, kindness, glory, goodwill)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롬 5:6, 8, 10)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하나님 앞에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엡 6:23 참고).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환난과 곤고와 어둠과 깊음과 사망 가운데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가능케 합니다.

그 위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 가운데 교통하심으로 각 사람의 필요와 간구를 생각나게 하시며, 성도와 하나님간에 역사하사 성도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기뻐하며”“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그리스도께 속함의 표징입니다.

그 위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끊임없이 항상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주장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전반을 통하여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선동과 미혹으로 말미암아 “바른 복음”과 “바른 예수”와 “바른 영”에서 떠나 있는(고후 11:4 참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그들을 권면하고 나무라고 바로잡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소연하는 어조로, 때로는 엄한 어조로 목소리를 바꾸어 보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전달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또한 현대 교회들의 잘못을 생각나게 하시며 이제라도 바른 복음과 ‘바른 예수’와 ‘바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도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표된 것과 삶의 증거들을 발견할 것을 권유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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