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간구와 권면” (고린도후서 13:5-10)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6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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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협영화를 보든지, 요가나 선(禪) 기타 어느 도를 닦기 위하여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부(師父) 혹은 매스터(Master)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시키는 일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든지, 장작을 패는 일이라든지, 마루를 닦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단순 노동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이 단순하고 유치하며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서 거부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무술이나 도(道)의 높은 경지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왜 이와 같이 지루할 정도로 단순한 일을 반복하게 하고 순종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기초를 닦는데 걸림돌이 되는 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게 하고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을 배제하게 합니다.
일정 기간 묵묵히 잘 견디어 냄으로써 기본적인 순종의 자세를 인정받은 사람에게 이제 무술이나 도의 기본을 배울 기회를 주는데, 무술의 기본기나 기본적인 도의 연마에 또한 많은 기간과 공을 들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무술의 동작이나 도의 진리를 가르쳐주는데, 이렇게 하여야지만 비로소 단단하고 바른 무술인이나 도인(道人)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여서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은, 그렇지 아니할 때 저차원적이고 경망스럽게 자기를 드러내는 무술인이나 도인밖에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도의 기본을 익히는 훈련을 잘 견디어 냈음에도 중간에 (허세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무술이나 도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또한 허다합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바르고 잘 다듬어진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기본을 익힘이 필요합니다. 기본을 제대로 잘 갖추지 못한 사람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항상 젖이나 빨고,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을 따라 살며 자신을 드러내는, 크리스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있기 쉽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특히 교인들이 귀한 이민교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1-2세기 당시의 교회들은 신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엄격한 규정을 두었습니다. 카테큐만(catechumen: 입문자 또는 예비 신자)이라고 하여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그가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신앙 교리와 고백을 갖추었는지 살피는 일정한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기간을 잘 견디지 못하고 카테키즘(Catechism: 교리 문답)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비로소 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세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세례문답을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를 주며,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죄사함의 확신도 없고 믿음의 고백이나 삶이 없는데도 직분자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바른 교회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음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스님이 “나는 30년 동안 좌선(坐禪)을 해왔기 때문에, 번뇌(몸과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어지럽히고, 귀찮게 하고, 사로잡혀 방황하게 하고, 더럽히는 정신작용)가 말끔히 없어졌습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를 듣고 있던 어떤 큰스님이 초상집에서나 하는 조문(弔問)의 인사를 합니다. “정말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그러자, 자기의 오랜 좌선 수련을 자랑스럽게 말했던 스님은 화를 내면서 그런 조문의 인사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대듭니다. 큰스님은 대답합니다. “번뇌가 있어야만 벗어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번뇌는 벗어나고 깨닫는 밑천입니다. 스님은 (번뇌가 없다고 하니) 그 밑천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어질 때는 사람이 죽은 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상심이 되셨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송원스님의 「알기 쉬운 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곤고(困苦)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그 자신만으로는 곤고함이 있음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참고)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죄에 노출되고 죄로 인하여 넘어지기 쉽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다 순조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자신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과 생각으로 인하여서 안타까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느 크리스천들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받고 있던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험상궂은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이르른 까닭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오랜 교회생활을 하여 이미 거룩하여져 있다면, 여러분에게 이제 성령도 필요없고, 기도도 필요 없고, 교회생활도 필요 없을 것이며, 부족한 목회자의 설교말씀과 성경공부는 더더욱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삶의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더욱 강하신 능력과 은혜를 간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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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Check up on yourselves. Are you really Christians? Do you pass the test? Do you feel Christ's presence and power more and more within you? Or are you just pretending to be Christians when actually you aren't at all?"(너희 자신을 점검해보라. 너희들은 진실로 크리스천들인가? 시험에 합격했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너희 속에 더욱 더 느껴지는가? 아니면, 너희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그저 크리스천들인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또는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만한) 믿음(의 삶)을 갖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도 안에 계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곧, 성령께서 그의 안에 계심이 느껴지고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성도의 안에 있는 줄 무슨 증거로 알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예로서는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8-30; 롬 12:6-8 등)과 열매들(갈 5:22-23)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또한 그의 깊은 속으로부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싶은 마음이 샘솟아납니다.
만일 이러한 증거들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아직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버리운 자들”(ἀδόκιμοί: failing to meet the test, disqualified)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의 시험(점검)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믿음의 삶 가운데 거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6절에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자”입니다. 곧, 그는 크리스천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에게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의 깊은 속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싶은 의욕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바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가 그리스도의 믿음에 속하여 있는 자임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그의 하는 권고나 나무람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뜻 가운데 되어지는 것임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7절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함이 어떠한가 단적으로 표현한 절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아니하더라도, 바울이 믿음에 있는 자가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바울이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악을 행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람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figure of speech)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될 그의 열망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이 악은 버리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로써 바울이 옳은 사도이요 그의 권고의 말이 옳았음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원함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타난 삶의 열매로써 그들의 믿음이 바른 것이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참 크리스천된 자들임을 보고자 함입니다.
8절에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안에 항상 역사하시기에 그는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진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고 그를 인도하시기에 바울이 행하기를 원함은 “오직 진리를 위한 일뿐”입니다.
9절에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고 낮은 자로 사람들에게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한 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13장 4절).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는 원래 부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이 우리로 부요한 자 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또한 그리스도의 예를 본받아 약한 자, 가난한 자가 되기를 자청합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약한 자가 되어 때로는 비난꺼리가 되고, 때로는 능욕당하더라도,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강한 자가 되기만 한다면 바울은 이를 기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강하여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바울이 간구하는 바인데,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성숙한 크리스천들이 되기만 한다면, 바울은 그 자신이 약하게 되는 것--멸시당하고, 비방당하고, 웃음꺼리가 되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10절에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2절에서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함으로 강한 징계의 의지를 보인 바울이지만, 이는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역설(力說)입니다. 사도로서 바울이 원함은 징계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죄지은 자들의 회개--죄에 대한 뉘우침과 고침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원함이시기도 합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 하겠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바울에게 또한 두려워함이 있다고 했습니다(고후 12:20-21). 그의 사랑하는 영의 자녀들인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치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원치 않는 징계를 그들 중에 행사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원치 않는 대면을 피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권고하고 또 권고하는 것입니다.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인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세울 권세도 주시고 파할 권세도 주셨는데(치리권),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을 파함이 아니요 그들을 강하게 세우고자 함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거짓 교사들과의 잘못된 관계의 청산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인정함과 순복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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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교인이라고 하는데, 교인이 곧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느끼지 못하고도 (정기적인) 교회 출석만으로도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또한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보증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너희가 크리스천인가 아닌가 진단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가? 너희가 믿음에 속하여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는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울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알쏭달쏭합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줄 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의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는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원함이 있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에 속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역사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시험에 통과한 성도들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그 믿음의 결과로서 악을 멀리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기 진단에서 아직 크리스천의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긍극적으로 주님의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고 자녀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징계와 심판으로 임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랑과 긍휼로서 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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