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그리스도의 강하심” (고린도후서 13:1-4)

“그리스도의 강하심” (고린도후서 13:1-4)
           
 
 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니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1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하여 그리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자신의 (회개해야 할) 잘못을 잘못이라 여기지 아니할 것이며 동일한 잘못을 계속 반복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것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의사가 있으면 그 잘못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을 받아들임이 용서입니다. 예외적으로,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청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고 용서를 청원하시는 기도를 올리셨으며, 스데반도 그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 올리고선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함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시고 용서하심은 그 여인의 뉘우침과 변화된 삶을 전제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여인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한 8:11)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죄짓는 것의 묵인이나 방조가 아니라 뉘우치고 고침을 위한 것입니다.

2
1절에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고 했습니다.
12장 14절에서 “세 번째 가기를 예비하였으나”라고 말씀한 이래 12장 20절과 21절에 이어 다시 한 번 그의 고린도 교회 방문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문이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확정적인 사실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고 함은 그의 방문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교회 내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징계임을 밝힙니다. 신명기 19장 15절에 보면,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어떤 한 사람을 모함하고 거짓 증거함을 막고자 함입니다.
물론 두 세 사람을 증인으로 세운다고 하더라도 거짓 증거로 무고한 사람을 애매하게 처벌받게 할 수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하던 아합 왕은 악처 이세벨의 계교를 받아들여 두 사람의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게 하여 나봇을 돌로 쳐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을 증인으로 세움으로써 위증(僞證)의 기회와 그로 인해서 오판(誤判)의 잘못을 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때에도 한 사람의 말만 듣고서 이렇구나 저렇구나 단정(斷定)지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우리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단호한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 그리고 편지를 씀으로써 죄지은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 사람들이 회개치 않았을 뿐더러 교회내의 여러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모른척하거나 유야무야(有耶無耶)하게 만들어버리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방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인 것으로 판단되므로 아마도 바울이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죄지은 자들중 어떤 이는 고린도전서 5장에 이미 그 처벌을 명한 음행(淫行)의 죄를 지은 사람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에서 바울은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자기 어머니가 아닌) 혹은 그의 딸을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이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고 쉬쉬하며 모른척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라는 미명아래 덮어둡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한 꾸지람입니다. 이러한 자를 모른척하거나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요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사람은 회개하기는커녕 여전히 교회 안에 머물며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면서도 더욱 뻔뻔하여져서 그 일을 떠들고 자랑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 바울은 징계를 내릴 때 고린도전서 5장 4-5절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전염성이 있는 죄질(罪質)이 나쁜 잘못을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은 교회 밖으로 내어몰아서라도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당장은 분한 마음이 들고 육신의 아픔을 당하지만 그가 회개할 때 그는 구원에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교회 안에 있지만 구원을 상실한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의 당연한 보증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되 회개와 죄사함의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미 두 번째 방문했을 때와 고린도전서에서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 언급한 사안이지만 음행의 죄를 포함하여 다른 저질의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하였나 하면 회개함이 전혀 없고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거나 이들의 죄에 동참하는 일이 계속 있기에 바울은 단호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왜 죄입니까?
이는 방조(傍助)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명백한 잘못을 묵과(黙過)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더욱 더 커다란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로부터 떠나도록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로서 목회자로서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단호함이 얼마나 강한지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함은 출교(黜敎: excommunication)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말입니다. 상습적인 죄를 짓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교회에서 내어몰 것이요,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짓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한 사람들에게도 그 사정을 살펴보아 각각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긍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처벌이 아니요 지금이라도 (그가 도착하여서 그들을 판단하기 전에) 그들이 회개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미워하도 (회개한) 죄인을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일뿐아니요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나는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과거에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로써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오고자 할 때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와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눈 녹듯이 없어져 버립니다.

3절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함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의 의견이나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개인으로서는 그와 같이 엄청난 판단을 내릴 자격이나 권한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심판을 우리에게 내립니까?”라고 반문할 때, 바울은 “내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매 내가 너희에게 이런 판단을 내린다”고 대답합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바울도 약한 사람이지만 그를 사도 삼으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저(=그리스도)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도 저들과 같이 약한 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그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강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아무 의미가 없고 힘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의 권위가 서야 할 것이며 그의 판단이 구속력을 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판단을 부정한다면,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다스림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강력하게 말씀함은 앞서 12장 20-21절에 언급한 바대로, 그가 고린도 교회를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 그의 사도로서의 권고와 판단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바울 개인으로는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불순종하면 어쩔까 하는) 이번 방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한을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사실이고 그의 능력이 무한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를 영접지 아니한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로마병정들 앞에 그는 참으로 약한 자로 비춰졌습니다. 그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자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아니하고 뺨을 치는 자에게도 항변하지 않으십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이 바라기는, 지금이라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무리들을 혼내 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아무 저항도 아니하시고 무기력하게 끌려가십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그를 짓누를 때 그는 나약함으로 쓰러지고 또 쓰러지며, 로마병정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하십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저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라고 의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가 혹 무슨 초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그의 모든 적들을 통쾌하게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왕에 오르시는 사건이 있기를 기대하여 보았지만 그저 무기력하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절규하며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주 죽은 자들 가운데 내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능력으로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시키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 올리우사 그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여전히 과거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태어나 황당한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한 궤변가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를 향하여 눈을 드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과 능력의 주님으로 역사하시며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예하게 됩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와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은 인정하나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여전히 약한 자요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자의 모습으로 고통과 수고와 핍박을 당한 것이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바울을 때리고, 가두고, 중상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바울도 여느 연약한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연약한 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으므로(갈 1:12)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교회 안에서 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목회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고, 직분자에게 직분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사신 모든 성도들에게 성도의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그 권세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3
세상의 권세와 능력에는 강제권이 있고 그 권세에 대항할 때는 제재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장하시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경험하기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만 잠잠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이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란 분이 있다면 나를 심판해보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경험하거나 본 적이 없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일 뿐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에 징계를 늦추시나, 이들이 계속 이러한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갈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쌓여짐으로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롬 2:5 참조).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고 한결같이 이루어 주십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사도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사도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가 사도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능력은 그의 사도 직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집니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성도의 직분과 권세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집니다. 그 스스로가 그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와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 직분자로서 또한 성도로서 하나님 안에서 어떤 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다른 직분자의 권위가 다만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길 때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역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출석하시되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또 직분자로서 여러분의 권위와 능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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