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 12:11-13)

“사도의 표된 것” (고린도후서 12:11-13)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1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도경(道經)」 제 24장):
   발뒤꿈치를 들고 서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企者不立)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다 (跨者不行)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自見者不明)
   스스로 옳다 하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고 (自是者不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이 없고 (自伐者無功)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自矜者不長)
   도(道)의 관점에서 이러한 것들은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만물이 혹 그것들을 싫어하는 바니, (物或惡之)
   그러므로 도(道)를 가진 사람은 이러한 것들에 처하지 않는다. (故有道者不處)

남보다 커보이고 싶고, 더 잘보이고 싶고, 나아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어서 발뒤꿈치를 드는 사람은 잠깐동안은 그렇게 보이도록 서 있을 수 있지만 오랫동안은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동안은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 신앙이 좋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더욱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이런 사람은 인정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큰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큰 걸음을 내디디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내 그 걸음을 멈춰버립니다. 계단을 두 세 계단 한꺼번에 뛰어오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디게 보이더라도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고 자기의 세상 자랑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드러나집니다.

저는 40세가 되어서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평신도(3년의 전도사)의 삶을 살았기에 안수를 받은 초기에는 제가 목사란 느낌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제가 목사임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목사전용 검은 셔츠(Clergy shirt)를 착용하곤 했습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즐겨 입기도 했지만, 그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목사로서의 몸가짐을 조심하고자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크리스천의 표시가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보증으로 보여 주십니다(고후 1:22, 고후 5:5; 엡 1:14, 엡 4:30). 성령의 역사가 어떤 사람이 과연 크리스천인지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크리스천인가?’ ‘나에게 과연 크리스천의 표시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 방법이 있는데, 우스개 소리같지만, 용하고 영험(靈驗)이 있다는, 신내림이 확실하다는 무당의 굿판에 가보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내가 거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잡신(雜神)을 부리는 무당의 굿이 잘 되지 않는다면, 이는 나에게 크리스천의 표시--곧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과 영의 세계는 통하는 법인데,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무당의 잡신이 옴작달삭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그에게 여러 가지 희한한 기사(奇事)들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날 정도의 대단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행전 19:12).  그러자, 떠돌이 유대인 무당(=마술사)들까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능력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도 바울이 행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逐邪)을 행하고자 합니다(행전 19:13). 스게와(Sceva)라고 하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이 바울의 능력이 부러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는데 믿음이 없이 행하는 고로 악귀의 힘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가지고 놉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전 19:15)고 하며 악귀들린 사람의 몸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억제할 때 그들은 상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표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이런 일이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크리스천에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믿는 마음으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할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의 표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자 하지 않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표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신도로서 학원목회를 하거나 교회의 직분자의 생활을 할 때에는 저에게 말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거치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말하는 일에서나 행하는 일에서 자제하고 조심을 하게 됩니다. 이는 목회자의 말과 행동은 쉽게 그리고 왜곡(歪曲)되어서 비난과 비판의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그의 책, 「새들백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n Church)」에서 말한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파도)이 우리 교회와 교우님들에게 밀려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도가 마침내 여러분 앞에 이르렀을 때 파도타기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여러분이 은사로나 열매로든지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부담스럽던 교회생활이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의 교회생활이 되고, 전에는 여러분의 삶의 한 변두리에만 머무시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좌정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11절에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함은 그가 육신의 것--그의 외적 조건들과 그가 수고한 일들을 부득불 나열하였음을 가리킵니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도요 사람인 것을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와 같이 말함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렇게 한 것은 너희 고린도 교인들의 연고란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고 허황된 말과 가르침을 좇지만 않았더면 굳이 나의 외적 조건들과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고난을 열거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희가 거짓 교사들이 훌륭하니 그들을 좇는다고 말하므로 내가 나의 어리석은 자랑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의 조건과 행함으로 그들을 칭찬하니,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더욱 더 커다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하심과 선하심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교회를 선동하고 어지럽히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들 자칭 “지극히 큰 사도들”(고후 11:5)과 비교하여서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12절에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자칭 “지극히 큰 사도”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이 뛰어난 웅변술과 사람의 철학과 논리로 교회를 선동하고 미혹하고 자극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바울에게는 그들과 구별되는 진정한 사도의 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참음(all patience)과 표적(signs)과 기사(wonders)와 능력(mighty woks)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행하는 이 사도의 표들--모든 참음, 표적, 기사와 능력--은 사람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마술을 행하는 사람과 비슷한 능력과 기사인 것 같지만, 다른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과 모든 참음 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하여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크고 작은 표가 나타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에 더하여서 그리스도의 제자--곧,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표시는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보여준 확실한 사랑의 증거가 모든 참음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선동과 미혹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바울에게서 돌아서서 그를 비난하고 중상하는 일에 가세하였지만,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그들을 향한 아픔의 나무람도 사랑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도의 표시인 것입니다.

13절에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고자 하면 그가 이 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저 말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비난꺼리를 삼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선동하고 미혹하여 바울을 비난하고 중상한 거짓 교사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 운동을 벌리는 일을 갖고는 그가 돈을 거두어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한다고 비난-선동하던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생활비를 위하여서는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지고는, 바울이 그의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마게도냐 교회들은 더 사랑하고 생활비 요구를 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는 덜 사랑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고후 11:7-9 참고).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형편이 다른 교회들과 달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생활비를 받지 아니하고 재정적으로 다른 폐를 끼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서 너희들을 다른 교회--바울은 적극적으로 도운 빌립보 교회--교인들보다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생활이 넉넉하여서 부모에게 쓸 돈을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자식도 있고 빈궁하여서 오히려 연로하신 부모의 도움을 여전히 받기만 하는 자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넉넉한 용돈을 주는 자식이나 아직도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자식이나 다 한결같이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더 비근(卑近)한 예로, 여러 자식들 중에 형편이 못한 자식은 부모의 쓸 것을 공급하여 주는데 형편이 넉넉한 자식은 무심하게 부모의 쓸 것을 전혀 생각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부모를 생각하여 주고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는 자식이 더욱 자랑스럽고 대견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돕지 않는 자식에 대하여 더욱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에 느끼는 사랑이 한결같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문제가 많기에 더욱 신경이 쓰이고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그를 욕하고 중상하지만, 그가 가르친 영적인 자녀들이기에 더욱 사랑을 쏟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함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공평의 법칙대로라면, 그에게 잘 대해 준 대상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문제 삼고, 그에게 생활비를 공급하기에 인색하여 아예 생활비를 도와주지 않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다른 교회들과 성도들 사랑에 못지 않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양대로는 참으로 공평치 못한 일이지만, 이러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너희들을 향한 공평치 못하고 지나친 사랑을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갖고 있는 모든 참음이요 사랑이요, 진정한 사도됨의 표시입니다.

3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표가 여러분에게 나타나 있습니까? 일시적으로, 인위적으로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성경을 읽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얼마 지나면 싫증을 느끼고 그만두는 것은 확실한 크리스천의 표시가 아닙니다. 남이 나의 하는 일을 알아주고 칭찬하면 만족해 하지만, 알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비난꺼리가 되면 쉽게 실망을 하고 집어치워 버리는 것도 뚜렷한 크리스천의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기쁨으로 감당하고, 신실함과 한결같음으로 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건 비난을 하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분쟁함으로가 아니라 화평함으로, 미워함으로가 아니라 사랑함으로 감당해 나갈 때, 우리에게는 크리스천의 표시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약함과 미련함이 많은 자연인으로서의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마가 16:17)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크고 작고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나 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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