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바울이 구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4-18)


“바울이 구하는 것” (고린도후서 12:14-18)
           
 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
이집트를 여행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거대한 스핑크스(Sphinx)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스핑크스는 사람의 여자얼굴과 사자의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이 스핑크스라고 하는 괴물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는 수수께끼를 내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면 무사히 보내주지만 풀지 못하면 죽여 버립니다. 수수께끼를 푼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 괴물과의 만남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오이디푸스(Oedipus, 테바이 왕 라이오스의 아들)라고 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젊은이는 스핑크스의 이야기를 듣고도 겁을 내지 않고 오히려 대담하게 그 괴물과 대결하러 찾아갑니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프스에게 묻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슨 동물이냐?“
오이디푸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사람이지. 갓난아기 때는 두 손 두 무릎으로 기니 네 발이요, 자라면 서서 다니니 두 발이요,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니 세 발이지.”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명쾌한 대답에 굴욕을 느낀 나머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서 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늙지 않고 영원히 강건한 기운을 유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하와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육신이 늙고 정녕 죽는 징계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어릴 때는 두 손 두 무릎으로 기고, 장성한 후에는 두 발로 걷고, 나이 들어서는 두 발 이외에 지팡이(혹은 자녀)에 의지하여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장성하여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전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양육합니다. 장성하여 경제적 능력이 생기게 되면 자기의 아이를 양육하고 또 연로하신 부모를 부양합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면 이 제는 그가 양육했던 장성해진 자식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기본 가정 위에 거시경제(macroeconomy)의 현상을 예측하는 모델을 경제학에서는 OLG(Overlapping Generation) 모델(Model)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밖에서 살게 된 인간에게 지워주신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장성하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할 때 자식의 부양을 받아야 마땅한 연로한 부모가 자식을 계속 돕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마련하여 주신 인륜의 법칙에서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요즘은 (경제 능력이 있는) 장성한 자식이 연로하신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따라서 부모도 자식 신세를 지지 않는 방편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는 인륜의 법칙에서는 다소 벗어난 경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찬송(=찬미)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엡 1:3, 6, 12, 14 참고).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세상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세상축복이라는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도에 있어서는 세상축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세상 복을 구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장성하여져서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와 긍휼을 찬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주위를 돌아보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쁨으로 나누어주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연륜이 오래된 교회요 오래 믿음생활을 한 성도인데도 여전히 젖을 빠는데서 벗어나지 못함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성도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요 신앙생활의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를 보는 목회자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장 12-14절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믿음의 연조가 짧아서 아직 어린아이인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고 감당할 힘과 여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복만을 생각하여 교회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생활을 한지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는데 여전히 교회에 출석하되 ‘세상 복만을 주시옵소서’ 하고 그 외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에는 무심한 사람은 자라지 않는 지진아(遲進兒)적인 교회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미의 삶이 세상 교육을 받지 못하여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과 심령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을 때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하면, 2,00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중적인 교회가 그래왔듯이 자라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은사 사모함이 있었지만 그 은사 사모함도 하나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함이기보다는 자기 자랑과 세상 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5년이 지나도 자라나지 않는 지진아적인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젖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지만, 이제 바른 목회자를 도울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온전히 감당하여야 마땅할 것인데 영적으로 여전히 어린아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2
14절에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 지방을 방문한 것은 사도행전 18장에 보는 바대로, 그의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1년 6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면서 목회하였습니다.
두 번째 방문한 것은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는 대로 고린도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방문한 것인데 그의 권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비난과 불의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세 번째로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비난하고 중상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는 고린도 교회에 가야 할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함이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마무리짓기 위함입니다.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생활비를 요청할 권이 없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12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함으로 그가 고린도 교회에 왜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는지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장성한 교회라고 한다면, 바울이 생활비를 요청하기 이전에 그의 육신의 쓸 것을 알아서 마련하여 주었을 것이며 바울은 이를 기쁨으로 받았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과 같은 시기인 그의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행전 16장)는 바울의 쓸 것을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조달하여 주었는데, 이때 바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빌립보서 4장 10-20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구하는 것이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전히 증거되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함이 바울에게 있었기에 다소 생활의 곤란함이 있더라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늘 바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그들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현재는 (거짓 교사들과 내적인 문제로 인하여) 다소 거칠은 환경 가운데 고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아이에, 자신을 부모에 비유하였습니다. 재물을 요구하지 않음을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한다’는 세상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장성하여야 할 것이며 그의 영적 부모에게 재물로 봉양함이 마땅히 할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못함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리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영적 부모로서 바울의 심중에는 자신을 위한 생활비 문제는 아무래도 좋고 다만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되어지기만을 갈구합니다.

15절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장성함에 이를 수만 있다면 나의 없는 재물을 다 내어놓고 또 자신의 시간과 삶 전체를 다 드려서까지 이제까지 그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쏟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할 각오가 되어있는 바울입니다.
“허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파나오’(δαπανάω)는 온전히 부담하다, 소비하다(spend)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재물과 자신을 허비하면서까지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영혼을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의 상급을 쌓아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허비함은 그들이 이 세상을 살 때에 재물을 많이 얻어 부유해지고,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출세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교회에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이 오직 성도들의 세상 축복과 성공을 빌어주기 위한 것인 양 성도들과 목회자가 생각할 때에 그 교회에 속한 목회자와 성도들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랑은 참으로 큰 데, ‘너희들은 어찌 나 바울을 덜 사랑하려고 하느냐?’고 안타까운 반문을 해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사랑을 요청하는 일조차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을 사랑함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당부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에 열심을 보여달라는 의도입니다.

16-17절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고 또 반문합니다.
바울을 중상하는 거짓 교사들은 끊임없이 반대의 목청을 돋굽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자기의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기실은 생활비보다도 더 큰돈을 그가 챙긴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겉으로는 진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간교하고 음흉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성도를 빙자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방함은, 8-9장에서도 강조되어 있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도 서둘러 모금하는 일을 마무리짓되 할 수만 있으면 풍성한 연보를 드림으로 그리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의 말을 타겟(target)으로 삼은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에게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금의 문제를 독려하고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는 것도 못마땅합니다. 바울이 모금한 돈을 직접 다루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의 수중으로 다 떨어질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바울이 설령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모금한 돈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교회의 것들을 모아서 (그 당시에는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어떤 교회가 얼마를 모금하였는지 확인하기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부만 전달하고 상당한 부분은 자신이 착복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주장함은 그들이 차지할 재물이 다른 용도로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불의한 자의 간계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비방의 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은 모금의 순정과 공정을 위하여 이 모금한 돈을 취급하는 사람을 선정함에 엄격함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 그가 파송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잘못 다루거나 유용하는 일이 없음을 확신합니다.

18절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연속적으로 반문합니다.
바울의 사신으로 디도가 두 차례(고후 2:13, 8:16)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디도의 정직과 청렴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3-15절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도 디도가 그곳에 처음 이르렀을 때 그의 인격에 감동하여 그를 영접하고 순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형제(고린도후서 8장 18절과 22절의 기록에 의하면 디도이외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형제가 두 사람인데 본 절에는 한 사람으로 되어 있음)도 재물의 문제에서 깨끗하고 자유로운 사람이기에 바울은 결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한 돈이 잘못 사용되어질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디도, 그리고 바울과 함께 하는 일행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는 “동일한 성령으로”(τῷ αὐτῷ πνεύματι) 하기에 전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강조입니다.
또한 “동일한 보조”(τοίς αὐτοίς ἴχνεσιν)라고 함은 바울의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뜻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순전하게 감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정경기(boat race)를 할 때 선수들이 보트 좌우의 노를 빨리 젓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들이 좌우의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배가 삐뚜로 나가거나 돌게 됩니다. 따라서, 선수들 중 한 사람은 노를 젓는 대신에 배의 맨 앞쪽(=이물)에 앉아서 선수들이 동일한 보조로 노를 젓도록 독려합니다. 동일한 보조로 협력하여 노를 열심히 저을 때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교회의 일도 동일한 보조로 서로 협력할 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3
바울의 마음에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장성하기를 원함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고 간구하고 있음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줄 것을 주지시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미성숙이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전력을 다 하기 보다는 세상의 일들로 교회 안에 비난과 중상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성숙한 교회와 성도로서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며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협력하며 잘 해 나가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회와 교인들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라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께 세상 복 달라고만 매어 달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돌려야 할 것이며, 우리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신 구원과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감당함에도 각자 다른 주장과 생각으로 인한 불일치와 충돌로써 행할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로서 동일한 성령과 동일한 보조로서 아름답게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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